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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禪涅槃(선열반) (zenilvana)

한국인 뇌리 깊은 곳에 노예근성이
05/05/2019 08:05 댓글(0)   |  추천(9)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 굴레에서 벗어나려던 부르짓음이었다. 1600년도 초기에 종교의 자유를 찾아 淸敎徒(청교도)들이 북-남미대륙으로 대량 이주했다. 이들이 정착한 한 곳은 북부의 마사추셑州 plymouth였고, 또한 곳은 남부 Virginia, Jamestown이었다. 오늘날 성공회라고 알려진 국교의 박해에서 기독교 정신의 Puritanism을 고수하기 위하여 신대륙에 왔으나 북쪽은 공업경제로, 남쪽은 노예경제로 살 방도를 찾았다. 자신들은 종교의 자유를 외첬지만 흑색 인종을 노예로 부려먹는 일에는 종교적 양심에 하등의 거리낌이 없었다니... 


조선땅에서는 한 발작 더 나가서 같이 피를 나눈 동족을 노예로 부려먹은 역사가 꽤나 오래된다. 몽고군에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귀향한 여인들과 그 자녀들을 還鄕女(화냥년), 그리고 胡奴子息(호노자식)으로 천대했다. 그 발자취는 고려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王과 신하들이 잘못해서 나라가 치욕을 당했던 그 희생자들, 다시 말해서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던 위정자들이 이따위 짓을 제도적으로 오랜동안 과감히(?) 해냈다. 국민을 세습적으로 사고 팔고, 짐승처럼 부려먹고..., 인간의 양심을 져바린 인류의 '슬픈 역사'(哀史)가 한반도에서 기승를 부렸다. 이런 사실을 당신네들은 아시는가? 한국민들 뇌리 속, 깊은 곳에 이웃을 등처먹는 속성이 자리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조선시대의 노비(奴婢)제도가 흑인 노예제도와 맞먹는, 아니 훨씬 더 가혹한 국가적 제도였음을 학자들의 저서와 논문 등의 여러 사료(史料)들이 신빙성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고 있다. 그 실상이 어떠했는가... 그 사실을 들쳐내서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현주소가 어째서 고모냥 고꼴로 치닫고 있는지, 그 원인분석을 해보고 싶다. 현금의 주사파들의 작태가 어찌해서 논리적 내지 상식적인 사고의 범주를 넘어서며 국가의 存亡(존망)을 위협하고 있는지... 또한 가진 者가 못 가진 무리를 "갑질하는" 물줄기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알고나 지냅시다..., 오늘날에 왕따 좋아하는 우리들이.


이조 5백년의 전통사회는 기본적으로 네 계층, 즉 양반(兩班) 중인(中人) 상민(常民) 천민(賤民)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賤民 중에는 창기(娼妓) 무당 광대 등이 속하였으며, 불교의 몰락으로 승려도 천인의 대우를 받았다. 천인 중에서도 백정(白丁)은 인간 이하로 취급되어 특수부락(特殊部落)을 이루어 일반인과 격리되었다. 賤民 중의 천민이 바로 '남자종 奴, 그리고 계집종 婢, 합해서 奴婢(노비)였었다. 오늘날 흔히 한갓 '종'이란 말은 실상 미국의 흑인 노예들과 별로 다를 바 없는 100% 노예였다.


이들은 돈으로 사고 팔렸다. <경국대전> 및 <형전>에 따르면, 노비의 값은 나이 열여섯 살 이상 쉰 살 이하면 저화(종이돈) 4 천장..., 열 다섯 살 이하이거나 쉰 한살 이상은 저화 3천에 거래됐다. 노비의 하루 평균 임금이 6장이었음으로 666일 어치의 임금이었고, 이는 논 20 마지기 소출에 해당 되었다. 조선 후기에 노비의 가격은 20양, 가축의 반 값이었다. 노비는 사람이 아닌 재산으로 간주되었던 바라, 상속문서의 맨 윗자리에 기재되었다. 땅이나 가옥보다 노비의 수가 얼마되는 가를 먼저 따졌다.


부모 어느 한 쪽이 노비이면 일천즉천(一賤則踐)이라 하여 자자손손 노비로 처리되어 영문도 모르고 평생를 종노릇 하여야 했다. 소위 奴婢 世傳法(노비세전법)이라는 거다. 미국의 'One-Drop-Rule'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남자의 정액이 한방울 떨어져도 노예가 된다는...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성왕 (聖王)으로 모시는 세종대왕도 '노비 종부법 (從父法)'을 '노비 종모법 (從母法)'으로 바꾸어서 애비의 씨와 상관없이 산모가 노비면 자동적으로 노예신분으로 살도록 했다. 흔히 소유주는 양반계급이었음으로 그들의 재산을 불궈주는 좋은 논공행상의 책략에 해당한다.


도대체 奴婢의 숫자는 얼마나 되었을까? 사료들의 기록마다 다르다만 그 엄청난 수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15세기의 총인구 가 900만 정도였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노비였고, 17세기 중엽에는 총인구 1,200만 중에서 노비의 비중이 30-40%, 즉 360만명에서 480만명으로 추정한다. (참고: 단성실록과 숙종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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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비 문서 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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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전재가 않됨)는 숙종 15년인 1689년에 노비 막동쇠가 이조로부터 발급받은 입안 입니다. 막동쇠는 상전인 도승지 이담명의 여름 녹봉을 받기 위해 이조에 증빙을 요청하는 소지를 올렸고,그에 따라 이조에서는 공증서인 입안을 발급해 주었다. (출처:서울 역사 박물관 소장 유물 정보-http://www.museum.seoul.kr)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1663년 한성부의 서대문 밖 十里(십리)지역의 호적엔 2,374명 중에서 노비가 1,729명으로써 주민의 73%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볼때 서울 사대문 (四大門) 안의 인구 중에서 노비의 비율이 80%를 웃돌았을 것으로 추산한다. 한편 1801년 정순왕후 김씨에 의해 공(公)노비, 즉 관가의 6만 6천구(口)가 <입 '口' 는 노비를 세는 단위> 노예신분에서 해방되었고, 같은 해 순조는 '(內)노비' 36,974口와 사(私)노비 29,093구를 모두 양민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순조실록 참조) 자유를 구가하는 우리들로서는 상상을 불허하는 엄청난 인간차별이 그 땅에서 자행되었음을 알려준다.


이리하야... 서울에 사는 미관말직의 양반관료들은 평균 100여명의 노비를 소유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퇴계 이황이 367명의 노비문서를 자식들에게 남겼고, 홍문관 부제학 이맹현은 758명의 노비를 재산으로 물려 주었다. 그리고 16세기 안동의 명문가 양반 권속들이 후대에 남긴 재산을 보자하면 노비가 317명이었고, 18세기 해남의 윤두수는 584명의 노비를 대물림 하였다.


이조 초기로 올라가 보자. 태종 때에 홍길민, 세종 때에 안망지의 妻 허 (許)씨, 문종 때의 유한 등은 1쳔여 구(口)의 노비를 소유했고, 특히 세종의 왕자 중 광평대군과 영응대군은 각각 1만명 상당의 노비를 소유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긴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톤' 대통령도, 그리고 토마스 제퍼슨 역시 수백명의 흑인노예를 부렸으니...당시에는 입으로는 평등을 부르짓고 행동으로는 인간차별이 당연했다고 봐야 하것지. 그들의 독립선언서에 All men are created equal, etc. 불라 불라...웃기는 현상이다.


저명한 미국의 한국학자 '제임스 필레 (James B.Palais)'교수는 "전체 인구에서 노비의 비중이 30%를 훨씬 넘은 18세기 중반까지 조선은 노예제도의 사회였다고. 같은 민족을 대를 이어가면서 노예로 부려먹은 나라는 조선 밖에 없다." 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어떤 사가(史家)는 '동방노예지국 (東方奴隸之國)'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하였는데, 조선의 노비제가 미국의 흑인 노예제 보다 더욱 가혹했다는 사실, 두가지에 촛점을 맞추고 싶다. 


첫째는, 미국의 흑인 노예나 고대 희랍-로마 시대의 노예들은 잦은 침략전쟁의 포로들로서 조선조의 제도는 같은 동족을 노예로 삼았다는 점에서 다르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중국에도 노비가 있지만, 모두들 범죄로 인한 노예이거나, 스스로 몸을 팔아 고용되었을 뿐이다. 혈통을 따라 대대로 노비가 되는 법은 없다."라고 비판한다.


두째는, 미국 흑인 노예제도는 관행 및 관습을 뒷받침 하기 위해 州(주)에 따라 각각 다른 'Black Slave Code'가 있었지만, 연방정부 차원에서 이를 다스리는' Federal Law'는 없었던 것으로 안다. 그런데 한국은 애초부터 중앙정부가 이에 개입해서 관리했다는 사실이다. '장예원 (掌隸院)'이라는 관서를 두어 모든 노비의 신원을 '노비안 (奴婢案)'이란 장부에 기재해 관장했고, 노비 분규에 따르는 소송을 이토록 담당케 했다. 심지어 도망간 노비들을 찾아내어 본 고장에 돌려보내는 '추쇄 (推刷)'사업을 지원하는가 하면,  '비총법 (比摠法)'에 따라 도내의 노비의 숫자를 고정 유지케 했고, 각 고을의 노비 출생자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노비의 수를 재조정했다.


이들은 어떤 대우를 받았는가? 노비는 동물과 같이 매매, 상속, 증여의 대상이었음으로 소유주는 살해만 빼고, 어떤 형벌이라도 가할 수 있었다. 관할 부서는 노비를 상전의 재산인 가축과 동일시 했다. '우마매매한 (牛馬賣買限)'과 동일한 조항에서 취급하는가 하면, 군역을 맡은 노비들을 '천예군 (踐隸軍)' 이라 불렀고, 노비들의 출생, 도망, 사망 등을 기록한 '노비안', 이에 준하여 다른 이름으로 '천적안 (踐籍案)' 이라 부르기도 했다.


한마디 추가할 것은 내 조상 靑海 李씨의 고향인 함경남도 북청에는 양반 상놈의 구별이 없었고, 따라서 奴婢의 신분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고려 말에 윤관이란 장군이 함흥의 이북에 5개의 성곽을 쌓아서 여진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던 고장이었기 때문이리라. 후에 이씨조선에 편입되었기 때문도 그 이유가 되겠고, 이성계가 관동지방 사람들을 기용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는 말이 전해진다. 워낙 대가 쎄다 보니 중앙의 말빨이 먹이지 않았던 것이나 아닐지.


<참고>

<1> 公 노비제는 1801년, 私 노비제는 1894년 공식적으로 폐지됨.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 1865년.  

<2> 조선 초기에 姓氏를 가진 수는 15%, 1894년 갑오개혁 전까지 30%에 불과했다. 노비는 이름만 썼다. 

<3> '조선 왕조 실록'엔 수천개의 노비 관련된 기사가 실려 있다.

<4> 'One-Drop-Rule' 즉 '흑인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흑인으로 판정하는 법규.

<5> http://snuaa.org/main/wp-content/uploads/2019/02/123Seoulalum_1902_web-1.pdf


<문헌> namu.wiki, ko.wikipedia, 국사편찬위 '한국사', seouland.com, '조선 왕조 실록', '조선의 노예제에 관하여, '한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jisikworld.com / 등...


<後記> "서울대 미주 동창회보 298호(2019년 2월)에 장동만(문리대 55회)선배가 올린 글을 필자의 허락없이 내 구미에 맞게 加減校正(가감교정) 및 재편성 했음을 밝힙니다. 한국인들의 심성에 이러한 추악한 뿌리가 내려져 있었음을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할 필요성에서 무리한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禪涅槃

5/5/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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