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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禪涅槃(선열반) (zenilvana)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좋은 고래괴기
04/10/2019 09:04 댓글(0)   |  추천(11)

6-25전쟁 통에 우리는 대구로 피난갔다. 1951년 1월 4일이었다. 눈보라로 뒤덮힌 용산역...그 곳을 힘겹게 출발한 기차에 구사일생의 몸을 실었다. 그 지붕 꼭대기에 둥우리를 틀고 몇일 간을 달린 끝에 당도한 곳이 바로 그 도시다. 나의 제2의 고향이 될 줄이야. 어린 시절의 그곳 3년 간은 값진 牧歌的(목가적)인 추억이 아닐 수 없다. 피난시절... 童心(동심)이 한껏 꽃필 적의 추억들이 내 정서생활에 밑거름이 되고 있다. 


대구 아이들 특유한 사투리와 그들대로의 텃세랄지..., 피난온 학생들 만을 위해서 판자집의 긴 건물이 영남대학의 부지에 따로 세워졌다. '맛좋은 고래괴기... 그 말씨도 생소했고 놀려대는 원주민의 자녀들과 노는 것조차 별로였던 지라 대구출신의 동무는 아예 한 명도 없이 서울로 왔다. 요새는 초등학교라 부른다만 당시의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지망해야 했는데 경북중학교나 대구사범도 알아준다 했으나 서울의 한 중학교에 지망하고 말았다. 나는 어차피 서울 사람이 아닌가?


1차에 떨어질 경우를 생각해서 제2차를 미리 정해놓아야 했다. 장난삼아 청량리 밖의 어떤 학교를 써넣었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철없는 짓이었다. 광화문 근처인 도렴동이 우리가 살던 동네였는데 어쩌자고 교통도 불편하고 이름조차 없는 학교를 2차로 가겠다고 했는지... 내 부모는 어느 중학교가 좋은지 마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던 바라 결국 내 동무들이 좋다는 곳을 선택했던 것이 다행이라 할까. 피난국민학교생들인 그나 나나 둘다 합격하는 행운인지, 공부를 잘한 덕택이랄지, 하여간 천만다행이었고 하겠다.


그때 거기 영남대학으로 통학하던 길목에는 보리밭이 널려있었다. 초여름에 한창 자라나는 보리 이삭을 소매 속에 넣고 걸으면 겨드랑까지 올라갔고, 왕잠자리 암놈을 잡아서 막대 끝에 매고 "오다리 청청" 외이며 돌려대면 날아가던 숫컷이 덮친다. 그 쌍을 땅으로 내려서 또 한 놈을 잡을 수 있었다. 여름에는 근처의 저수지...영산못에서 물을 빼면 붕어가 득실득실 등을 보이자 바지를 한껏 올리고 그 갯벌 속에서 맨손으로 잡았던 기억이 난다. 그걸 집에 가져왔는지는 모른다. 잉어인지 큰 붕어인지,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내 작은 손을 밀치고 순식간에 달아나 버렸다.


어떤 때는 앞산 비행장의 변두리에 앉아서 경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광경을 넉없이 바라다 보기도 했고, 아주 더운 날은 앞산 골짜기에서 발을 젖셔보기도 했지를. 말이 산골 물이지만 사람들로 뒤덮힌 냇물은 음식 찌꺼기와 물줄기의 범벅이었다. '남이야 어떻던 나만 즐기자'란 정신이 발원하던 곳이다. 알다시피 대구란 곳은 분지라서 한국에서 가장 덮다는 곳이다. 대구의 서쪽인지 남쪽인지에 방천이란 곳이 있었다.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고, 그 뒤로 괴암의 절벽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르고 내리고... 철없는 위험한 짓을 내팽겨친 내 부모를 원망해야 할지, 아니면 멋대로 굴러먹던 개구쟁이들의 놀이가 이랬는지...


대구의 동쪽으로는 남대천이라 하던가?  강 건너 저 멀리에 팔공산이 눈 높이 펼처져 있었다. 그 앞으로 동촌비행장이란 곳이 있었고 그 주변으로 사과밭의 사과가 주렁주렁 했다. 같은 반의 한 동무가 자기집으로 놀러가자 해서 채 잉글지고도 않은 풋사과를 따먹었다. 얼마나 시금털털 했던지 지금도 사과를 보면 그때를 기억한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사과를 별로 안 좋아한다. 그 아이네 집에는 창녀들이 여럿 보였다. 주변의 공군기지라서 피난 시절에 먹고 살기 위한 한 방편이었지. 어린 나이에도 좋은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 더 남쪽으로 사과의 본고장인 경산이란 곳이 있다고.


대구란 고장은 비만 오면 사람 다니는 곳이 진흙밭으로 돌변했다. 고무신도 벗길 정도로 질쩍해져 버렸고, 똥다리 마저  미끄러지기가 일수였다. 아슬아슬하게 발을 딛고 조심하다가 한번은 똥속에 빠졌다가 급히 발을 끌어 올리는데 발만 올라오고 고무신이 그 속에 그냥 남겨진 거라.  다시 내려서 고무신을 발고락에 걸고 발과 신발 한짝을 구출했던 기억이 있다. 동네 사람들의 공동변소에서 매일 이런 일을 치뤄야 했었으니, 당시의 생활 환경이 열악하기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아니면 우리들 피난살이가 그런데 밖에 살 수가 없었던지...


약전골목이란 데로 들어서면 한약재의 냄새가 크를 벌름거리게 만들었는데, 긴 골목 길은 수백년의 역사가 서려있는 곳이라 하더만 한약을 다려먹을 일은 없어서 그곳에서 뭐를 산 적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대구는 경상도에서도 양반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이라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부산 사투리보다는 좀 느리고 경상도 나름의 품격을 갖춘 그런 말씨라고 하더군.


내 妻는 포항이 고향이다. 서울행 기차를 대구에서 갈아타는 기회가 있어서 예전에 살던 남산동을 일부러 찾아갔다. 이게 웬 일인가? 고래당 같은 개와집들로 꽉차 있어서 내 소중한 흔적들을 되찾을 수가 없었다.


세월이 가면 강산도 변한다고. 대구의 모습도 이젠 더 많이 변했겠지? 전국이 아파트로 꽉차있으니 거기인들 다르겠는가? 고층건물의 정글이 눈가는 곳의 어디든지 옛 시골풍경을 가로 막고 있다. 결코 좋아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자연과 가까이 살아야 하거늘...편한 것만을 중요시 하는 속세의 몸뚱이는 비대해져 가고 정서는 메말라서 생각없는 영상 속의 인생을 어찌 봐주어야 할지.


禪涅槃

4/10/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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