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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습게 보았든 중공군에 참패당하자 패닉에 빠져
04/05/2018 15:04 댓글(0)   |  추천(3)


맥아더가 망친 한국전 전세를 역전시킨 리지웨이 장군



우습게 보았든 중공군에 참패당하자 패닉에 빠져


맥아더 패전을 감추려      확전 주장하나


트루먼 휴전으로 종결하기로 작정


UN에서 영연방국 주도 먼저 휴전 제의


미국 동의  중공 거부로          한국이 살아 남아


한국      닷새동안의 나락에서 회생


맥아더 독단적으로 최후 통첩 발해

 

 

 

중공군이 한국전에 참가하려는 모든 징후가 나타나서 정보가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에 모두 보고 되었으나, ‘중이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다 말이 있듯이 북한 땅만 점령하면 한국전이  종결되어 한국이 통일될탠데, 맥아더라는 인물은 한국 통일은 뒤전으로 물리고, 드디어 자신이 대망하든 중공군이 한국전에 참전했다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30만명의 중국 인민 지원군이 이미 압록강을 건너 산속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계속 신나게 북으로 (아마 만주로 향해서) 나아갔다.


맥아더가 처음에는 중공군 개입 숫자를 실세의 십분의 (1/10) 해당하는 3만이라고 상부에 보고하다가는,  자신의 휘하 장병이 포위되어 거의  섬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하고 나자, 자신이 너무 적을 얕보아서 당한 혹독한 패전을 감당할 없이 많은  중공의 대군을 맞아 한국전이 신국면 맞았다고 엄살을 떨고, 대만의 국부군을 한국전에 투입하고, 중국 본토 해안을 봉쇄하며, 만주폭격과 나아가서 중국 본토도 폭격하라고 워싱턴에 확전을 주장했다.


그러나, 트루면은 이미 12 초에 영국 수상 애틀리와의 회담에서 한국전의 국지화와 전 불확대를 합의했기 때문에 인명을 줄이는 방도는 휴전 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다.


무렵 유엔내에서 한국전 휴전 방안이 활발히 논의되어 38선을 경계로 이북으로 20 마일에 걸쳐 비무장 지대로 하자는 아시아 13개국이 주도한  1차안이 가결되었다 (1950.12.14). 그러나, 중공측에서 당시 승승장구하든 참에 안을 거부하였다. (1950.12. 22)


바로 다음날, 전투와 관계없는 일이 벌어졌다. 미제 8 사령관으로 전장의 최고 지휘자였든 워커 중장이 타고 가든 집차가 한국군 트럭과 정 충돌하여 자리에서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후임으로 당시 육군 참모 차장이었든 매슈 리지웨이 중장이 부임했다.


그는 새로 부임하여 후퇴만 거듭하든 유엔군의 현황을 파악한 다음 변화를 가져온다. 내역은 잠시 뒤로 물리고, 유엔에서 휴전 논의가 계속되어, 이번에는 캐나다와 인도 중심의 영연방 주축으로 하는 협상파가  현전선을 휴전선으로 하자는 2 유엔 휴전안을 가결하였다 (1951.1.13). 


결의안 내용은 다음과 같다.


A         전선에서의 휴전

B         평화를 회복하기 위한 정치회담 개최

C         단계적으로 한반도에서 모든 외국군 철수

D        한반도 전부를 관리할 준비 절차 착수

E         휴전 성립후 미국,영국, 소련, 중국이 참가하는 회담 개최하여, 대만 중국의 UN 가입에 따르는 문제등 극동 관련 문제 논의


상기 안은 중국 (중공) 측에 극히 유리하고 미국측에 불리했지만, 참전국이 많은 영연방을 소외시키지 않으려고 에치슨 국무 장관이 트루먼에게 동의를 건의해서 트루먼 대통령의 재가를 얻었다.  애치슨은 승세를 중국이 조차도 받아 들이지 않을 것으로 보고  사실상 도박을 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애치슨 장관의 예상대로,  중국의 주은래 총리는 닷새뒤인 1 17 성명을 통해 이를 거부했다. (2 결의안) 대한 과정을 미국은 한국 (이승만) 정부에 하마디 상의도 없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운명이 우리의 관여 없이 강국들간의 뒷거래에 맞겨진  것이다.


(필자는 여러차례에 걸쳐서 미국만 너무 믿지 말라는 경귀를 발한 있다.   당시 우리가 너무 힘이 없어서 협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국력을 키워야  우리 목소리를 있다.)

 

 만일 안을 중국이 받아들였드라면, 당장 휴전이 서울 남방에서 이루어지고 , 단계적이지만, 미군이 한반도를 철수해야 했고, 그렇게 되면 쉽게 공산화가 됐을 것이다. 생각만해도 끔찍스럽다. ( 당시 전선은 이미 1-4 후퇴 이후여서 평택 ? 원주 ? 삼척 선이 되어 있었다.)

 

 새로 8 사령관에 취임한 리지웨이 장군은 먼저 전선 상황을 판단하고, (중공군) 너무 남쪽으로 내려와 보급선이 길어져 전진하지 못하는 점을 알아 차리고,  1 15   25 사단  27연대에 위력 수색 (威力 搜索 : 일부러 적을 위협하여 적으로 하여금 출동하거나 사격하게 함으로써 그 역량이나 배치 상태를 알아내는 일. ) 실시하도록 명령을 내려서 마이클리스 대령 휘하의 연대가 오산에서 수원까지 나아갔으나 중공군의 위세를 별로 느끼지 못했다.  지금까지 청천강에서부터 계속 밀리기만 했는데  이일로 자신감을 되찾아 반격 작전을 펼치기로 한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의 죽는 소리만 들어오다가 사실 확인 차원에서  콜린스 육군 참모종장과 밴던버그 공군 참모총장을 한국 전선에 보내 현장을 돌아보고 직보하게 했는데 그들이 리지웨이를 만나서 희망적인 목소리를 듣고, 트루먼에게 보고하자,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의 말은 이제 콩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믿지 않게 되었다.

 

아무튼, 미국도 전력에 한계가 있고, 많은 전사자가 생겨서 염전 사상이 만연되자 트루먼 대통령은 자신이 주도하는 휴전 계획을 세워서 참전 동맹국에도 보내고, 맥아더에게도 안을 참고하도록 보냈다.

 

트루먼이 보낸 안을 맥아더는 결국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전을 미국이 자신이 바라는 반공 대장정 길로 가지 않고 휴전으로 끝내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휴전안을 내놓는데, 사실상 적장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 다름이 없었다. (1951 3 24)  그의 제안에는 중국 본토 폭격등 확전을 암시하는 문귀들로 가득차 있어서 트루먼 대통령을 위시한 그의 상관들이 놀랐을 아니라 동맹국들도 모두 놀랐다.

 

이것은 명백한 명령 불복종/ 항명이었고, 사실상 재에 회부될 사항이었다. 맥아더는 과대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의 묘혈을 파나가는데 광분했다. 다음에는 그가 어떻게 파면 당하는지를 살펴보자.


과거를 되돌아보면 미래를 알 수 있다(관왕지래觀往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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