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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의 핵 공갈과 트루먼 - 애틀리 공동 선언
03/30/2018 15:03 댓글(0)   |  추천(2)




애틀리 영국 수상--한국전 국지화시켜 트루먼의 핵 공갈 놀란 세계 대전 막았다

반면에 확전하려고 광분한 맥아더는 파면 당하고 송환 당해


트루먼 애틀리 공동 선언의 중대성


한반도 휴전선으로 영구 분단


한국전의 국지화로          3 대전 방지


무력통일 방침 폐기        분단 영속화


중국으로 확전 반대


한국전 휴전 교섭 개시 ( 유엔군 전세 유리할 )


확전 광분하든 맥아더 파면 소환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는 현재 


트루만 - 애틀리 공동 성명 (1950/12/8 


관련 어록의 틀 속에서 살고 있다

 

착각은 자유 라는 유행어가 있는데, 한국 전쟁에서만큼 그 말이 딱 들어 맞는 경우가 드물 것 같다.


착각 제1: 우리가 쳐들어가도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착각 제2: 우리가 38 선을 넘어가도 중공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위에 든 예의 착각(錯覺)을 내린 사람이 누군지는 필자가 말하지 않더라도 다 잘 아실 것이다. 그 착각 때문에 말할 수 없이 많은 수의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죽거나 다쳤고, 조국의 분단 상태는 70년이 훌딱 넘었다.

 

일본의 항복 후에 조국이 38 선으로 분단된 것은 그 단초가 얄타 밀약이라는 것은 다 잘 알고 있으나 한국전쟁을 휴전으로 마무리 짓고 분단 상태가 70 년이 이미 넘었으나, 그 상황이 적어도 앞으로 100 여년은 더 지속될 것 같은데, 그러한 테두리를 잡게된 정황을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결론부터 내리면,  우리는 트루만 -- 애틀리 공동 성명 (1950  12  8 ) 과 관련 어록의 틀 속에서 살고 있다 고 말 할 수 있다.

 

 

 

 

트루만 대통령의 핵공갈

 

한국전의 비극적 소식이 미 본국의 신문 지면을 장식하고, 한국전에 유엔 경찰이라는 명목으로 미국의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보내서 죽게 되자 트루만 대통령은 국면을 전환 시킬 목적으로 기자회견을 열어서 (1950 11 30) 앞으로의 한국전 수행 계획을 설명하는 가운데, 중공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 무기고에 있는 모든 병기를 모두 활용할 수 있다고 말하자 기자 한명이 그러면, 원자탄도 포함되느냐고 묻자, 트루만은 다시 모든 것이 다 포함된다고 되풀이 했다.

 

트루만 대통령의 핵사용 고려라는 가히 핵폭탄급 발언이 나오자 핵사용은 당장은 고려 않는다는 국무부 해명에도 불구하고 전선 사령관 (=맥아더 장군) 이 결정한다는 내용이 대서특필(大書特筆) 됐다. 

 

아세아인들 (일본인) 들에게 핵을 두번이나 사용한 장본인인 트루만이 또 다시 아시안 (중국인 및 북한인들)에게 핵 폭탄을 사용하려는 것은 미국의 인종 차별 관념의 표시라고 비난속에 핵사용은 현재 국지전에 멈추고 있는 한국전이 전면 세계전쟁으로 확대될지 모른다는 서구 국가들의 우려가 일었다. 

 

프랑스의 르네 플레빙 수상이 영국으로 날아와 서구에 세계대전이 번지면, 유럽 국가들이 단숨에 쏘련 T-34 탱크의 트랙에 짓밟히고, 영국도 재래무기의 포격과 소련 폭격기들의 폭격권에 들어가서 안전 할 수 없으니 애틀리 수상이 유럽을 대표해서 미국에 항의할 것을 권고 받았다. 여당인 노동당 하원의원 100 명이 서명한 청원서를 받고, 맥아더가 원자탄 사용권을 휘두른다면 제3차 대전이 일어나게 되므로 이를 트루만 대통령과 따져서 원자탄 사용을 막겠다고 의회에서 선언하고 워싱턴을 향해 날아가 1950 12 4일 도착하여 당일 제 1차 회담을 시작하였다.

 

그는 트루만을 만나서 제일성이 한국전 지휘 총책임자는 당신 (트루만)이요 아니면, 현지 사령관 맥아더요하고 단도직입적으로 트루먼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질문을 쏘아붙였다. 그로부터 4 5 일간 만나서6 차례 회담을 통해 유럽 동맹국의 우려를 전하고 토의해서 다음과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공동 성명에 나온 문자를 옮긴 것도 중요하지만, 명문화하지 않은 것도 역시 중요한 사항들이 있어서, 우리 민족과 우리나라의 장래에 미치고 있는 사항을 설명하려한다. (이를 위해서 필자는 회담 준비상황에 관한 기록과 6차에 걸친 회담 회의록, 공동 성명 전문, 본 회담외에 정상을 제외한 대표간 회동 내역, 그리고, 이 회담 평가 저술서까지 샅샅이 두루 살펴 보았다.)



트루먼 - 애틀리 공동 선언 주요 내용

  

1. 한국전을 국지화함. 공동 성명에 없으나, 회담록 전체 분위기가 이점을 중심으로 논의 하였고, 실제로 중국 본토나 쏘련으로 전쟁이 비화하지 않았다.

 

2. 유럽 우선주의 확인함. 역시 명문은 없으나, NATO 군 총사령관을 조속히 임명하겠다고 성명에 삽입시키고, 아이젠하워 원수를 12 19일에 임명하였다.

 

3. 한국을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방침 포기함. 역시 명문화하지 않았으나, 평화적 또는 교섭을 통한다고 명문화해서, 무력 통일 방침을 포기함.

 

4. 중국으로 전선 확대 하지 않음. 애틀리 방미 목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문 중의 하나로 이미 중공을 승인한 영국으로서 만일 전선이 중국 본토로 확대되면 당장 홍콩을 잃게 될 위험이 있고 말레이등 영국의 이해 당사지역에 불똥이 튈까 염려했다.

 

5. 핵사용 필요시에 영국과 상의한다. 성명 문안에는 미국이 핵사용 필요 상황이 발생하면 영국에 항상 통보해 주겠다 (Keep at all times informed) 라고 적시되어 있으나, 트루만 대통령이 애틀리 수상과 개별 대담시 미국과 영국은 핵문제에 관해서 동반자이고 영국과 사전 상의 없이 (Without Consultation) 원자탄 사용을 고려하지 않겠다는 언질을 주었고, 이를 명문화 하자는 애틀리의 요구에 대해서 명문화는 할 수 없고, 만일 제 말이 의미가 없다고 보신다면 문서화 한다고 더 나으라는 법이 없지 않냐고 답해서 애틀리 수상이 트루만의 언질에대해서 감사를 표했다는 내용이 제섭 (Jessup) 특임 대사 (Ambassador at Large)가 기록한 두분의 대화록에 있다. (Memorandum for the Record by Ambassador at Large (Jessup) Washington December 7, 1950)

 

또한, 애틀리 수상이 본국에 귀환해서 하원에서 트루만이 언급한 이 부분을 낭독하면서 트루만과의 회담 결과에 흡족하다고 말했다. 처칠 전 수상도 회담 결과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6. 유엔군의 파병 목표는 침략자의 격퇴이지 한국의 통일이 아님을 확인함. 이점은 당시 회담에 참석한 맥그래스(McGrath) 미국 법무 장관이 성명 초안을 다루면서 제기한 것을 트루만 대통령과 애틀리 수상이 동의하고, 또한 다른 문건에서 미국의 유엔 대사인 오스틴(Austin) 도 이와 똑 같은 문안을 사용하여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무력 통일 소리가 그 때부터 싹 들어갔다. 이렇게 선언함으로써 그들의 무력 통일이라는 부담으로부터 무거운 짐을 놓게 되어 그 부분에 대한 의무감에서 해방되고 싶은 감을 확인했다.

 

7. 한국 전쟁을 유엔군의 힘의 강세에서 휴전 교섭(交涉)을 시작한다. 이 양자 회담에서 결정된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 영향을 미친 조항으로서, 그 당시 유엔 회원국들 간에 당장 휴전을 추진하자는 움직이 많았으나, 그 때 휴전 논의를 하게 되면, 그 당시 유엔군 (미군)이 군사적으로 퇴패해서 약체이므로 중공 측에 휴전을 요구하면 중공측에서 믾은 것을 요구하게 되므로 후에 유엔군쪽의 전세가 유리할 때 휴전 교섭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미국 측에서 내다 보았다. 

 

그 당시 주미 대사관에 근무 했든 한표욱씨는 그해 10 25일 중공군이 첫 전투를 치룬지 채 두 달도 되기 전에 미국 정부는 참전 우방의 압력과 확전 및 장기전에 대한 국내의 우려등으로 휴전을 논의하게 된 것이라 평했다.

 

그리고 당시 주미대사 장면 박사가 국무부로 찾아가서 38 선으로 휴전을 할까봐 염려하는 이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38선을 휴전 경계선으로 하는데 반대 입장을 표했는데 그를 맞은 극동 담당 차관보 딘 러스크씨는 38선으로 휴전하는 것이 싫다면 유엔군이 한반도에서 전원 철수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묻자 그점에 대해서 훈령(訓令)이 없어서 대답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이야기만 보아도 약소국의 입장은 비참하다는 감을 느꼈다.

 

이 선언은 남북 분단을 가져온 얄타(Yalta) 회담 이후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한 최대의 국제 협약이다. 이점을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알고 있는 소수는 입을 봉하고 말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조약이 아니드라도 강대국간의 선언 또는 협약 등이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것은 큐바 미사일 사태 해결 타협이 웅변(雄辯)으로 말해준다.  ( 1) 즉 그 때 쏘련이 큐바에서 미사일을 철거하는 댓가로 미국으로부터 큐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는데, 그 이후로 바로 코 밑에 있는 큐바를 미국이 50 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약속을 지켜서 눈엣가시 같지만, 손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1950 12 8일 발표된 선언하에 우리가 휴전선을 경계로 60 여년이 지나도록 트루만-애틀리 선언의 틀 속에서 살고 있다.


 

트루먼-애틀리 합의 효과

 

이 선언 덕분에 첫째, 중국으로 전선이 확대 되지 않아서 세계 대전을 방지했고, 둘째, 휴전을 막무가내로 반대한 맥아더는 다음 해 4월에 파직 송환 당하고, 세째로는 아쉽지만 무력 통일로 가지 않고, 네째로 한 반도에 휴전이 달성되어 완전한 평화는 아니더라도 평화가 정착되어 적어도 남한만은 경제적 번영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 주


1: 한국에서는 한미동맹을 헌법이나 성경보다 더 귀한 금과옥조 (金科玉條) 로 여기나, 조약도 국익에 따라 언제던지 헌신짝처럼 내던져질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6.25 사변이 났을 때, 한미 동맹이 없었지만 미군이 왔다. 그러나, 한미 동맹이 있고, 제 손으로 만드는데 당사자였든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휴전이 된지 6년이 지난 1959 6 25일 열린 미국 안보회의에서 (제411 차) 이승만 대통령이 북침할 기미만 보여도 당장 한미 동맹을 파기하고 그 (이박사)를 체포하며 미군을 철수시킨다고 공언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케네디와 흐르시쵸프 사이의 큐바 사태 해결 책은 조약도 아니지만 미국이 약속한 큐바 불침공은 지금까지도 지켜지고 있다. 조약이나 협약은 두 나라 사이에 국익이 일치할 동안은 효력이 있지만, 상황이 바뀌어 어느 한쪽이라도 국익에  반한다고 판단되면, 폐기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과거를 되돌아보면 미래를 알 수 있다(관왕지래觀往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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