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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과대 망상 미군 참패 불러
03/29/2018 15:03 댓글(0)   |  추천(4)

중공군의 포위 작전에 포로가 된 미 2사단 장병 (3천명중의 일부)

그래도 전사한 동료 (4천명)보다 천만 다행이다. 



맥아더 과대 망상 미군 참패 불러

 

8군과 X군단 사이 넓은 틈 (GAP)



미 합참 경고 무시

중국 인민지원군 그 틈새로 잠입해



8 X군단 측면 심대한 피해 입혀



2 사단   한국군 2군단   작살나다


2군단 해체  2사단장 직위 해제


(한국 정부 아직도 숨겨)

 

 

맥아더의 치명적 헛발질

 

전회에 여러분들은 맥아더의 신나는 헛발짓들을 보았읍니다. 그 때는 실수는 했으나, 인명 피해는 없었읍니다. 그렇지만, 인천 상륙 성공으로 기고 만장한 맥아더는 주변은 말할 것도 없고 상부의 명령이나 충고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 수만명의 인명 피해를 낳게합니다.

 

그는 워커 장군이 지휘하는 8군은 서부 전선에서 진격하게 하고, 이와는 별도로 그의 일본 진주군 참모장을 지낸 아몬드를 X () 군단장으로 북한의 동해안 쪽에서 한만, 한소 국경으로 진격하게 했는데, 워커 장군과 아몬드 장군은 서로 상하 관계도 아니고 연락은 모두 도쿄의 맥아더를 통해서 하게 하였으며, 두 부대 간에 아주 넓은 틈 (Gap) 이 벌어져, 미 합참에서 우려를 나타냈으나, 도망가는 북한군 패잔병을 추적하는데, 틈이 무슨 걱정이야고 냉소적 반응만 보였읍니다.

 

하기는 북한 지도를 보면, 두 부대 사이에 아주 높은 낭림산맥이 있어서 그곳을 왕래하기가 힘들 것으로 보여서 걱정을 내려 놓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으나, 이것이 맥아더 장군이 간과해 버려서 미군의 패배를 자초한 셈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소련이나, 중국의 개입 가망성이 보이면 중국과 소련 국경 근처로 진격하는 경우에는 한국군만 내보내고 비 한국군 (Non-Korean) 부대를 사용하지 말도록 역시 미합참에서 주의를 주었으나, 이 역시 맥아더가 무시했읍니다. 위의 두 가지 사항을 무시한 죄값을 한국군과 미군이 혹톡히 받게 되고 자신의 몰락을 가져오게 됩니다.

 

중국 인민 지원군 한국전 참전


맥아더 장군이 트루만 대통령에게 중공의 개입이 없을 것으로 안심시킨지 불과 나흘째 되는 (1950 10 19 ) 중공은 그들의 군대를 인민 지원군이란 명칭을 붙여서 압록강을 넘어 왔다. 그들은 유엔군이 북진할 행군 예정로를 미리 파악하여 기슭에 매복하고 그들을 맞이할 차비를 하고 있었다.


중공의      1    전역


10 25 중공군은 초산 근처로 올라오든 한국군과 최초의 조우를하는데,한국군은 처음엔 패주하든 인민군이 반격하는줄 알았으나,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서 6 사단이 피해를 당했고, 공백을 매우려고 들어온 미 제1 기갑 사단의 8 기갑 연대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전투에서 중공군이 포로로 잡혀서 동경 사령부에 보고를 올렸으나, 한국군이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상대 (중공군) 전세를 크게 부풀렸다고 보았다. 일단 유엔군은 청천강 부근으로 재집결했고, 중공군은 예상밖의 성과를 올렸으나, 보급이 따르지 않아서 공세를 펼치지 않고 산간지역으로 잠적했다.


(물론, 중공군은 장진호 쪽으로도 진군하여 전투를 벌였으나, 전투는 흥남 철수등으로 너무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의도적으로 기록하지 않은) 서부 전선의 미군과 한국군의 혹독한 참패를 알리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때 통일이 안된 것을 아직도 통탄하고 있다.)


맥아더의   크리스 마스 공세 무력화시킨   중공의   2 전역


중공군이 홀연히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졌기 때문에, 맥아더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중공의 개입 의도와 개입 정도 (군인 숫자) 대한 판단 착오를 이르켰다. 중공군과 직접 전투를 경험한 단위 부대의 적정 판단이 8 군에서 취합해서 동경 맥아더 사령부에 올라 갔으나 , 곳에서는제 1 전역 (공세) 보인 중공군은 압록강변의 수풍 발전소 방위 목적으로 들어온 소수에 불과하다고 사실과는 떨어진 평가를 하였다. 


그래서 청천강가에 집결한 유엔군은 보급품의 보충을 받아서 (미국) 추수감사절의 명절을 좋은 칠면조 고기로 즐긴다음  (1950년 11월 24일) 다시  크리스 마스에 귀향 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공세 (Home by Christmas Offensive) 펼쳤다.


첫날은 전선에서 순조롭게 북상하였으나, 다음  (11월 25일) 미리 그물망을 치고 기다리고 있든 중공군에게  서부 전선 유엔군의 우측으로 북상하든 한국군 부대 ( 2 군단) 먼저 당하고, 한국군 부대는 모든 기록을 잃어버려서 자세한 손실 기록도 없고, 선엽 장군에 의하면 군단 자체가 해산되었다니 규모를 오직 추측할 따름이다.


다음으로 한국군 2 군단 좌측에서 북상하든 9 군단의 2 사단은 먼저 앞에 막는 중공군의 강력한 반격을받고 후퇴할 밖에 없었는데 마침 들어온 옆이 산골이고 속에 중공군이 들어차 포위하고 산골 길에 있는 미군을 사격해대자 아비규환이 되어 도망을치는데 트럭등 군용차들이 사격을 받아 나아갈 없게되자 뛰어내려 골짜기를 도보로 달아날 밖에 없었고 버려진 차량들은 장애물이되어 도피에 방해가 되었다. 


평안 북도 군우리에서 부터 순천까지 가는  산골짜기 도로가 10 Km 정도가 되었는데 미군들이 산골을 죽음의 계곡 (Death Valley ) 또는 인디안 태형 (笞刑: Indian Gauntlet) 이라부른다. 여기서  미군이 4천이 죽고 3 천여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사단장 카이저 장군은 뒤에 지휘책임을 물어 직위해제 되었다.


우리 언론이나 역사에 아무도 사실을 자세히 말하거나 기록하지 않아서, 이러한 미군과 한국군의 혹독한 참패를 모르기 때문에 거의 통일을 놓쳐버렸다고 애통해하고 있다.


현장 상황이 좋지 않을 것을 뒤늦게 깨달은 맥아더는 8 사령관 워커 중장과 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을 동경으로 불러 그들의 전선 상황 브리핑을 듣고 일단 8군은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하고 10 군단은 흥남으로 철수하도록 결정했다 (1950 11 29 ).

 

중화기도   없는   중공군에   참패 당한    맥아더 장군


초기에 개입한 중공군은 가장큰 화기가 휴대해서 운반할 있는 기관총과  박격포 정도이고, 개인 화기로는 군인 일인당 소총도 자루씩 가지지 못하고 전위병은 막대기 수류탄을 가지고 적군 (국군과 유엔군) 다가가서 집어던지는 수류탄 투척병들이었다.


 이들에게 어이 없게 당한 것은 전적으로 맥아더의 적의 전략적 목적 오판과 적군수를 과소 평가한  때문이며 또한 그들의 전술을 전혀 몰랐다는 점이다. 당시 미국 장군 가운데 2 대전시 유럽  전선의 아이젠하워와 아울러 태평양 전선의 맥아더가 쌍벽을 이뤘는데, 독일이나 일본보다 형편 없이 약한 중공군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기 때문으로 있겠다.  어느 책에서는 맥아더가 단순히 삼단 론법을 적용하여, 중국군이 일본군보다 약했고, 일본군은 미군에 약했으니까, 당연히 중공군은 미군 보다 훨씬 약하다는 결론을 내고 얕잡아 보았다고 설명했다.


중화기가 없고, 공군이 전혀 없었든 중공군은 지형을 활용하여, 기습, 우회침투, 야습, 후방 교란, V ( 八字) 자루 포위 작전을 사용하였고, 특히 척후병들의 우수한 전투 지경선 (부대단위의 경계선) 파악 능력으로 주공의 정면과 부닥치지 않고 지경선 쪽으로 파고 들어 왔다. ( 1)


손자  병법  101    몰라서     맥아더   장군이   당했다


쉽게 말해서 맥아더는 클라우제비츠 (Clausewitz) 전쟁론에 정통했을지 모르지만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 백승이라는 손자 병법 (孫子兵法)  101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맥아더가 어느 정도로 적을 모르냐 하면, 지원군 사령관을 린뱌오 알고 있엇다 한다. 그는 칭병하여 사령관직을 사양했고, 대신에 서북 사령관이었든 펑더화이 사령관직을 맡았다.)


당시 중공군과 전투 경험이 있었든 국부군 장교 명을 장개석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대려와서 그들의 조언을 들었드라면 참화를 예방은 못했드라도 적어도 피해는 줄일 수는 있었을 터인데   (여담이지만, 만주에서 군인 생활을했든 일권, 백선엽등이일찌기 미군 장성들의 눈에 들어 일취월장하게된 것으로 보인다.)


일단 청천강으로 후퇴한 미군은 중공군이 보급부족으로 더이상 뒤를 쫓지 않았으나, 8 사령관 워커 중장이  12 3 북한을 포기하고 유엔군의  38 까지 후퇴를 결정해, 못가져갈 보급품은 불태우고  20여일 동안 전투도 없이 190 Km (120 마일)   후퇴해서 미군 사상 최대의 후퇴라 불리게 되었다. 당시 라디오 뉴스 시간에 국군과 유엔군은 오늘도 작전상 후퇴 거듭했다는 발표가 지금도 귀에 선하다. (필자는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필자


1: 중공군은 오랜 대일 전쟁과 국공 내전을 통해 전투 경험이 풍부하고, 꿔다 놓은 보리자루가 아니라, 한반도에서 미군의 본토 침공 흉계를 막아 혁명 조국 (중국) 보위하자는 열의에 가득해서 싸웠다고 한국이 중국과 수교한 이후 백선엽 장군의 중공군의 전투 능력을 높이 평가 하였다.


전투 지경선이란 전투 부대 사이, 사단과 사단 또는 연대와 연대 사이를 이르는 말로써, 지경선 쪽이 가장 인력 (군인 ) 이나, 화력 (주와기, 대포 ) 배치가 적기 때문에 척후병들이 이를 빨리 파악해서 그쪽으로 침투 또는 공격한다


V ( 八字) 자루 포위 작전이란 적을 포위하는 작전 대형 (隊形) 짜는 방식의 하나로 쉽게 예를 들면, 적이 산골을 통과한다고 가정할 , 산골 < ()자의  양변>으로 군대를 길게 배치하여 (잠복시켜), 적이 긴자루 속으로 들어왔을 때에 팔자의 끝쪽을 막아버리면 완전히 독안의 쥐꼴이 된다. 그런 다음에 산골 옆에 잠복해 있든 병력이 골짜기에 갇힌 적을 몰살시킨다. 작전은 삼국지에도 자주 등장하는 오래된 전술이다.


참고로, 장군에 의하면, 개전 초기 (1950 6 25일부터 10 중순까지) 인민군과 싸웠지만 중국인민 지원군 참전 이후는 중공군과 싸웠다 합니다. 그말이 맞다고 생각되는군요. 마치 유엔군 덕분에 한국이 살아 남은 처럼, 북한도 중국 참전으로 살아 남았고, 그래서 김정은 위원장이 중국 가서 (2018 3)  혈맹운운 하는 말이 빈말이 아닙니다.


과거를 되돌아보면 미래를 알 수 있다(관왕지래觀往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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