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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경고 무시 38선 넘어
03/15/2018 14:03 댓글(0)   |  추천(5)


George Kennan: 미군이 38선 넘는 것을 반대한 유일한 미국 관리 

트루먼 대통령 명에 따라 말리크와 비밀 회동해 휴전 회담 끌어냄

올바로 내다보고 소신대로 보고한 용기 있는 사람


중국 경고 무시 38선 넘어


예언자 케넌만 북진의 위험 부담 감지


중국은 미국의 중국 침입 경계


7함대 파견 본토 수복 전조로 파악


인도 대사 통해 경고했으나


미국 중국 얕잡아보고 엄포 간주


인민 지원군이라 부르고


소련 공중 지원 확약전 참전 확정

 

 

 

 

서울을 1950 9 28 수복하자, 원래 유엔 결의는 북한 공산군의 38선이북으로의 격퇴, 전전상태 (Status Quo Ante Bellum) 회복이었기 때문에 무렵에 북한군은 모두 38 이북으로 도주했으므로 유엔군 파병 목적은 달성했기 때문에 이론상 그기서 멈췄으야 마땅하지만, ‘떡본김에  굿한다 말이 있듯이 도망가는 적을 두고 걸음을 멈출 없었든 미국과 맥아더는 38선을 넘을까 말까 주저했다.


이때 중국 (당시엔 중공이라부름) 한국군이 38선을 넘는 것은 요즘 유명해진 표현을 사용하자면, 괘념하지 않으나, 미군등 유엔군이 월경할 경우에는 중국이 팔짱을 끼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인도의 주중 대사 파니카가 중군군 참모총장대리 이넨 룽전과 만났을 넌즈시 참전 의사를 전했고 (1950 9 25), 이어서 1주일 (1950 10 2) 중국의 주은래 총리가 파니카 대사를 초치해 정식으로 참전의사를 통보했다.


메세지는파니카 대사가 본국에 보고했고, 이는 다시 영국을 통해 워싱턴에 전해졌다. 미국정부는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할 힘은 없고 그냥 블러핑 (Bluffing: 엄포) 하는 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중국은 이미 미국이 중국 본토 수복 작전에 돌입한 것으로 보고 이에 대한 대비 작전을 계획할 밖에 없었다.


미국이 그러한 빌미를 것은 대만해협에 7함대를 파견한 까닭이다.  중국은 대만으로 도주한 장개석 잔당 소탕으로 중국 통일을 이루려고 대만 대안에 정예군대를 포진하고 대만 상륙 작전 준비에 들어 갔는데 느닷없이 미국이 7함대를 보내 통일 작전을 방해 했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침공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의심하지 않을 없었다.


중국은 미국이 세갈래 길로 중국 침공을 계획한다고 보았다.  첫째는 대만을 기지로하여 대안으로 상륙 작전을 벌이든지, 둘째로, 남쪽의 월남 (당시 프랑스가 식민지애 대한 통치를 계속하려 하고 월맹이 이를 반대해서 해방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쪽으로 밀고 들어오든지, 현재 전쟁중인 한반도를 통해 만주 (그들은 동북 지방이라 부른다) 진격할 것으로 우려하였다.


겨우 1949 10 1일에 베이징에서 중화인밈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중국으로서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놓인 것이다. 이에 모택동 주석은 미국의 침공을 앉아서 당할 것이 아니라, 월남이나, 대만 건너 상륙 작전은 힘들 것으로보고 한반도에서 (미군) 맞아 싸우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정치국 회의에서 논의했으나, 아무도 동의하지 않아서,각개 격파식으로 하나씩 설득하여 동의를 구하고 10 2 회의에서 대미 참전을 결정했다. ( 1)


그리고, 한반도에 파병할 군대를 중국 인민 지원군 (Chinese People’s Volunteers)이라 부르기로 했다.

이렇게 이유는 인민 해방군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면, 중국 이라는 국가가 참전한다는 뜻이어서 미국 공군이 중국의 베이징등 모든 중요 도시를 폭격할 있고 또한 해군이 연안 도시에 함포 사격할 구실을 주기 때문에 중공군 가운데 일부가 자원해서 참전하는 형식을 갖춰서 미국의 확전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의용군 또는 지원군이 많이 사용된 경우는 2 대전이 일어나기 1936 스페인 내전 때인데, 독일과 이태리는 왕당파에, 소련은 공화파에 가각각 의용군이란 이름으로 참전해서 전쟁에 개입은 했으나, 참전 각국이 전화 (戰禍) 피할 있었다.


이러한 결정은 미국이 38 넘기전에 용의 주도하게 택동이 소련의 공군이 만주에서 보호막을 줄지 확실한 보장도 받기 전에 취한 결단이다. 그런데, 승기를 미국은 들떠서 (38선넘어서 )    북진하는데 거의 모두 찬동했으나당시에 북진을 반대한 사람은 딱 한 사람으로 '대소 봉쇄 작전(Containment of Soviet expansion) 주장으로 유명한 조지 케난이었다. 1952년 소련주재 미국대사를 5개월간 맡기도한 그는 "38선에서 머무는 것은 전전 상태(Status Quo Ante Bellum) 회복으로 유엔 결의를 달성하며, 봉쇄작전의 성공이지만, 38선을 넘어가면, 롤백(Roll Back) 작전이 되어 중공이나 소련의 개입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고 우려했다. 그의 예상은 한달도 되지 않아 적중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예언대로 미국 정부가 어려움에 처할 , 나중에 설명하는 처럼 트루먼의 휴전의사를 소련의 유엔대사 말리크와 비밀 접촉으로 전달해서 휴전 회담이 시작하게하는 중책을 수행했다 ( 2)


다음 번에는10 15 태평양상의 조그마한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의 회동에서 맥아더가 대통령을 기망한 사건도 있었읍니다. 그는 중공군의 참전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물타기해서 대통령을 안심시켰읍니다. 유명한 정일권 장군의 회고록에 나오는 이승만-맥아더 음모도 다룰 것입니다.


그리고,  중공군 참전 이전의 맥아더 장군의 유명한 헛발질 보여 드립니다. , 원산 상륙 작전한다고 10군단을 동해로 파견했으나, 한국군이 이미 점령한 다음으로,  원산항에 기뢰가 빽빽히 설치되어 제거 작업하는 동안 상륙군은 유람선 타듯이 동해 바다를 오르락 내리락했고, 그리고, 퇴주하는 북한군 지도부를 포위한다고 낙하산 부대를 평안도 숙천/순천 지구에 급파했으나, 새앙쥐 몇마리만  잡았답니다. 이것들은 희극으로 볼 수 있고, 다음에 비극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읍니다.

 

 

필자주

1: 필자는 대학교 1학년 (1960) 서울대 본관 (동숭동) 도서관에서 China Crossed the Yalu라는 중국이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에 참전했는지를 최초로 앨런 화이팅 (Allen Whiting)  저술한 책을 읽었다.

China Crosses the Yalu: The Decision to Enter the Korean War

by Allen S. Whiting (Author)

이후에 미국과 중국 학자들에 의한   문제에 대한 저술이 많이 나왔다.


2: 일반적으로 휴전 제안을 소련의 말리크 시작한 처럼 알고 있으나, 실은 트루먼 대통령이 케넌을 통해 말리크와의 접촉을 통해 이루어졌다.  필자는 비밀 해제된 문서를 보고 있었지만, 그러한 서류를 접근하지 못한 분들은 정부 발표/신문 보도대로만 믿을 밖에 없다. 그러니, 지금 현재 발표 사항들을 곧이 곧대로 믿는 사람들이 월하다. 항상 중요 사항은 발표 되지 않고 당사자만 알고 있다. 그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겉만 보고 이러쿵 저러쿵하고 있다. 케넌이 말리크가 있든 롱 아이런드 별장 (Glen Cove소재) 을 두번 찾아가 결실을 맺었다.


과거를 되돌아보면 미래를 알 수 있다(관왕지래觀往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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