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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는 프랜차이즈 많이 성공시켰으나 진작 자신의 재정 상태 악화
12/25/2017 14:12 댓글(0)   |  추천(2)


레이는 프랜차이즈 많이 성공시켰으나


진작 자신의 재정 상태 악화돼


회사 지분을 기간 사원에 30 % 주고


자금 빌리는데 22% 줘서 본인 몫은 48% 줄고


늙어서 사업 시작에 마땅해 하든 부인과 이혼 까지해


맥도널드 서비스 브랜딩에 심혈 기울여

 

  

레이 크락은 프랜차이즈 사업의 성공은 프랜차이저 (Franchiser: 프랜차이즈 제공자) 프랜차이지 : (Franchisee: 프랜차이즈 사서 운영하는 사업가) 공존 공영에 있다고 보고 그점에 집중했다. 레이가 맥도널드사업을 시작했을 때에는 A&W, Dairy Queen, Tastee-Freez 그리고, Big Boy 등이 제대로 요식업 체인으로 자리잡고 있었으며, 첫번째 Burger King (처음엔 InstaBurger King 으로 등장) 스토어가  마이아미에서 개장을 하였다그는 그러한 경쟁업채들과 차별화 하기위해 그는 프랜창지들을 그의 동반자/ 동업자로 생각하고 그들이 성공을해야 자신도 성공한다는 점을 철저히 믿고 실천하였다그가 아이스 크림 세일즈하면서 목격한 것은 많은 프랜차이즈 업자들이 프랜차이지들의 이익이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그들로부터 울겨낼 생각만해서 프랜차이지들이 남는 것이 없어서 손들고 그만두는 것을 자주 보아왔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실수를 거듭하지 않겠다는 결의로 임했다.  (요즘 한국의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자주 사용해 신문 기사에 오르고 있다)


레이는 나는 개별 프랜차이즈 운영자 (프랜차이지) 성공할 있도록 내가 있는 모든 면에서 그를 적극적으로 도와 주어야한다는 신념으로 일했다 회상했다 (프랜차이니) 성공이 바로 레이 자신의 성공을 보장한다고 믿었다


그는 프랜차이지에게 아이스 크림 만드는 포뮬러 (Formula) 등을  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새로운 파트너에게 단위의 운영 시스템을  제공해주기를 원했다다시 말해서, 델러웨어주에 있는 스토어에서나, 네바다 주에 있는 스토어에서나 고객들에게 똑같은 크기와 품질의  햄버거 (Hamburger) 에다 같은 조각의 피클 (Pickle) 같은 분량의 머스타드 (Mustard) 케첩 (Ketchup) 바르고, 같은 시간에튀겨서 만든 프랜치 프라이를 같은 크기의 쟁반 (Tray) 담아서 서브하는 방식을 제공하는 식당 체인을 만들려고 하였다이것은 종전의 다른 체인들과 비교하면 과연 혁신적인 제도이다


레이 크락은 나중에 이렇게 회상한다. “완벽함을 이루기는 무척 힘들다그러나, 나는그 어려운 완벽함을 맥도널드 시스템에서 이루려고 노력했다 이외의 것은 부차적이었을 따름이었다.” 엄격한 요구는 전략적 목표를 달선에 좋은 길잡이가 되었다


그는 다시 우리의 목표는 한번 와본 손님들이 다시 찾아 주도록 (Repeat Business) 만들어 나가는 것인데, 스토어나 운영자의 평판만으로 이루려는 것이 아니고 맥도널드 시스템의 믿음성으로 이루려하였다. “ 라고 부연설명했다 방식을 요즘 사용하는 표현으로  말하자면, ‘맥도널드 식당 운영 시스템을 브랜딩” (Branding: 상표로 인식시키다) 해서 고객들이 어느 곳에서든지 맥도널드 식당에 가면 같은 햄버거를 먹을 있다는 것은 상품인 경우 마치 코카 콜라 깬은 전국 어는 스토어에 가서 사도 같은 것과 같은 인식을 심는다는 것으로 서비스를 브랜딩해서 고객들에게 인식을 시키는 획기적인 발상이라하겠다


레이 크락이 그가 차린 표본적 스토어에 열정을 쏟아 부어서 많은 손님들로 북적대는 것을 보고 스토어가 사실상 성공적이라는 광고 효과를 나타내서, 그가 다니는 롤링 그린 컨트리 클럽 (Rolling Green Country Club) 다니는 동료 회원들부터 그의 프랜차이즈를 사서 운영하기 시작했다.  1958년에 와서 레이는 모두 79개의 스토어를 열었다. 많은 프랜차이지는 자신들이 레이가 시작한 스토어 (식당)에서 독특한 점을 느껴서 직접 그를 찾아 와서 프랜차이즈 기회에 대한 문의를 하고 문을 경우도 많고, 그외는 신문 광고에 응해서 찾아 사례도 있었다


그렇게 광고를 보고 찾아온 케이스로는 당시 스물 세살 (23) 프레드 터너 (Fred Turner) 있었다레이는 그를 시간당 달러씩 주고 햄거버 뒤집는 (Hamburger Flipper) 시켰다.  (1955) 프레드는 그의보스가 햄버거 만드는데 황홀감에 빠지는데 공감을해서, 오래지 않아레이가 가장 총애하는 종업원이되었다레이에게는 딸만 하나 두었는데, 레이가 프레드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내게 이제 아들이 하나 생겼고, 그의 이름은 프레드다.” 정도로 그의 자서전에 썻다그래서 프레드는 레이 크락의 첫째가는  조력자가되어 레이의 맥도널드 본부의 세사람의 기간 멤버 가운데 한명이 되었다 한명은 멀티-믹서 사업때부터 데리고 있었든  마티노 (June Martino) 이고, 다른 한명은 해리 소너본 (Harry Sonneborn) 인데 전에 테이스티-프리즈 (Tastee-Freez )체인 본사 재무 담당 간부로 일했었는데, 레이가 주당 백불 ($100) 이라는 낮은 급료를 주고 1955년에 채용했다.  (이들은 이후에 높은 자리에 올라 가는데, 언제나 창업 공신은 대접 받게 되어 있다.)


프레드 터너, 레이가 뽑은 첫 종업원으로 나중에 사장, CEO 까지 올라 갔다

이처럼 창업 공신이 큰 보상을 받는다 


비록 레이의 프랜차이즈 식당들이 중서부와 서부에 우후죽순처럼 (영어 표현은 봄비 내린 뒤에 잡초가 번성하듯이”) 쏫아났지만, 그의 회사는 얼마 버틸 없어 보였다.  1960년까지, 레이가 도와서 세운 프랜차이즈 식당들의 매상액은 7 오백만 ($75,000,000) 이었으나, 레이의 본사 수입은 십오만 구천 ($159,000)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재정 상태로는 레이가 구상했든 맥도널드 왕국 건설은 일장 춘몽으로 끝날 판이었다라고 맥도널드 회사 역사 기록자인 러브 (John Love) 기술했다.   레이의 카드로 지은 꿈의 (Dream House of Cards) 제풀에 넘어지게 생겼다귀중한 종업원들인 마티노 (Martino) 소너본 (Sonneborn) 에게 봉급 인상을 해줄 수가 없어서 그들에게 회사 지분 30 퍼센트 (30 %) 주었다그에 더해서 1961년에는 오십만 ($1,500,000) 대출을 받기위해 en 군데의 보험회사에 호사 지분 22 퍼센트 (22 %) 넘겨서 그의 회사 지분이 줄어들었다.


이처럼 상항이 어려워지자 레이의 부인은 그의 남편이 나이들어 새로운 사업을 한다는데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든 차에   사람 사이가 삐걱거리드니  드디어 39 간의 결혼 생활을 이혼으로 끝내게 되었다. (1961) 레이는 그의 결혼 생활 끝장을 이렇게 표현했다. “ 이것은 와그너 (Wagner) 갈등의 오페라를 입증시키는 장면으로 우리 사이의 문에 빗장을 잠궜다


어려운 상황을 레이가 어떻게 풀어 나가는지 다음호를 기대하십시요


과거를 되돌아보면 미래를 알 수 있다(관왕지래觀往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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