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 True History
  • Ike Is Best (teddykim)

미국, 1942년부터 한국신탁통치 계획
11/16/2017 14:11 댓글(0)   |  추천(2)

카이로의 3 거두와 마담 숭메이링   (장총통의 비서겸 통역으로 참석)

"미국, 1942년부터 한국신탁통치 계획

현대사 연구가 문헌 발굴


로즈벨트 구상  필리핀 예를 따름

vs 영국 단물만 빨고 해준게 없었다


[카이로선언74주년] 한국현대사연구가 김태환회장 관련 문헌 발굴 공개


원본: 본국 중앙 일보 2015년 11월 26일 게재 

news.joins.com/article/19140833

 

【뉴욕=뉴스로】노창현 특파원 = 1943 11 27일의 카이로 선언은 단지 한국의 독립을 명문화한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신탁통치를 전제한 고도의 수사적 문구들이 있었다.

카이로 선언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 역사적인 사건이었지만 선언문의 행간에 신탁통치의 복안이 담김으로써 훗날 남북분단과 6.25 전쟁까지 초래한 또다른 비극의 전주곡이 됐다

카이로 선언 1년전인 1942년부터 미국의 로즈벨트 대통령은 한국의 독립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한국을 일정기간 신탁통치를 해야 한다는 구상이 전제된 것이었다.

재미현대사연구가 김태환씨는 25(현지시간) "당시 로즈벨트 대통령은 영국 프랑스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의 온갖 단물만 빼먹고 현지 주민들에게 해주는 것은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전후 해외 식민지를 해체하는 대신 신탁통치를 구상하여, 주민들이 자치능력이 생기도록 교육, 복지, 사회간접자본 투자 등을 다음에 독립을 시켜야한다는 착상을 했다" 소개했다.

로즈벨트는 1898 -스페인 전쟁을 통해 지배권을 넘겨받은 필리핀의 자치 능력을 키우는데 50년을 계상했다. 미국의 필리핀 통치는 자율성을 보장하고 인권을 보호하는 기존 서국국가와는 완전히 다른 정책이었다. 1946 독립을 했을 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이룬 국가였던 필리핀은 이후 마르코스 정권의 독재정치와 부정부패로 뒷걸음질 했다.

로즈벨트는 상대적으로 한국을 높이 평가했으나 자치능력을 갖기 위해선 20~30 년정도 신탁통치 기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다른 나라의 정상과 회의시나 문서로 항상 필리핀의 예를 들면서 한국 역시 장기간의 신탁 통치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가 한국의 독립을 언급한 번째 문서는 1942 1224 장제스(蔣介石) 중국 총통에게 보낸 서한이다. 카이로 회담보다 거의 일년이나 앞서 한국의 독립구상을 표명한 것이다. 그는 장제스의 고문으로 일한 오원 래티모어(Owen Lattimore) 통해 보낸 서신에서 "식민지를 전후 종전의 식민국가에게 되돌려 주는 것보다 새로운 신탁통치 방안을 적용할 있다,..조선의 독립같은 문제를 소련의 관여 없이 해결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소련을 고립시키려는 것은 긴장을 완화하기보다는 긴장을 조장하게 된다" 피력했다.

이듬해 327 앤소니 이든(Anthony Eden) 영국 외상 백악관을 방문하자 로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의 식민지/점유지등의 종전후 처분과 관련, 한국의 독립방침을 다시 한번 언급하면서 일본 패망시 한국의 국제신탁 미국과 중국을 포함, 3-4개국에 위임하는 의견을 제시했다

김태환씨는 "당시 영국 외상은 로즈벨트의 제의에 호감을 표했고 회의에 합킨스 특별보좌관도 동석했기때문에 카이로 선언 초안 작성시에 한국독립 조항을 메모 없이 삽입할 있었다. 일부 학자들이 추정하는 것처럼 초안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이 만들어준 행운이 아니었다" 설명했다

역사적인 카이로 회담은 1943 1123 오후 8 만찬과 함께 회의로 이어졌다. 로즈벨트와 처칠, 장제스 3인이 모였고 로즈벨트 보좌관 합킨스와 장제스의 통역으로 부인 (숭 메이링) 충후이(王寵惠) 비서실장도 참석했다. 로즈벨트가 미국과 중국이 조선, 인도차이나 태국의 장래에 대한 상호 이해에 도달하자는 제안에, 총통은 조선에 독립을 부여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고 로즈벨트도 동의를 표시했다.

그러나, 뜻밖의 문제가 발생했다. 영국의 반응이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김태환 씨는 " 과정에서 한국의 독립 시기가 구체적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우여곡절을 거치게 것이 오늘날의 분단 천추의 한으로 남게 되었다" 안타까워했다.

장제스와의 면담에서 대체적 합의에 이르자, 로즈벨트 대통령은 1124 합킨스에게 합의서 초안을 작성하게 했는데 한국의 독립에 관한 문구는 "한국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가능한 가장 이른 시기에(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 한국을 자유롭게 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 것이었다

초안을 살펴 루즈벨트는 자신의 신탁통치 구상을 고려하여 '가능한 가장 이른 시기에'라는 합킨스의 문구를 '적절한 순간에(at the proper moment)' 수정했다. 한국의 독립시기가 한발짝 물러난 것이다.

11
26 하오 330분부터 미중의 초안과 영국의 초안을 놓고 열린 최종 조율 회의는 미국 합킨스 특별 보좌관, 중국 충후이 비서실장, 영국 카도간 외교부 사무차관이 참석했다.

영국측은 ·중의 초안에서 '조선이 자유롭고 독립된다' '조선이 일본 통치에서 해방된다' 수정하자고 제의하며, "수정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영국 내각에서 아직 조선 문제를 다룬 적이 없고, 소련의 태도를 없기 때문에 조선 독립 문제 조항은 성명문안에서 삭제하자" 주장했다

이에 충후이는 영국의 요구가 "난센스"라고 강력히 반발하며, 조선이 일본 침략의 첫번째 희생양이었음을 상기시켰다. 이때 로즈벨트 대통령이 당시 카이로 회담에 동석한 해리만 소련주재 미국 대사에게 의견을 물었고, 해리만은 "소련의 태도에 신경 필요가 없다" 해서 조선독립 의제는 ?중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살아남게 되었다.

로즈벨트가 가필한 '적절한 순간에'라는 문구가 카이로선언의 최종안에서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in due course)' 바뀌게 것은 영국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었다.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 처칠 수상이 즐겨 표현하는 단골 문구이기도 했다.

얼핏 봐서는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절차를 거쳐서' 비슷하지만 사실은 차이가 있다. '절차'라는 단어 하나로 한국의 독립시기를 위한 논의과정이 길어지고 그만큼 자주 독립으로 가는 길이 멀어지는 결의가 됐기 때문이다.

김태환 씨는 "영국이 제시한 선언문 초안에는 한국독립 조항이 없다. 그만큼 한국독립에 부정적이었던 영국은 21 열세임을 고려해 조항을 포함하는데 동의했지만 시기문제에 물을 타서 언제가 될지 아주 모호한 표현을 사용했다" 비화를 공개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카이로 선언문은 최종 합의됐다. 3개국 수뇌는 선언문을 이후 일정으로 잡힌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 소련수상의 동의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카이로에서 만날 공표하기로 했다. 작성일은 1127일이지만 공식 발표는 1945 121일이 까닭이다

한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역사적인 카이로 회동이후 장제스 총통은 곧바로 충칭을 향해 떠났고, 로즈벨트와 처칠은 테헤란으로 가서 스탈린을 만났다. 1130 · 정상은 스탈린에게 카이로 선언문을 보여주고 동의를 얻었다. 스탈린은 로즈벨트의 요청에 따라 독일 항복 후에 대일전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했다.

한국의 독립과 신탁통치에 관한 협의는 이태뒤 '얄타 회담(Yalta Conference)'에서도 있었다. 얄타 회담은 1945 24-11 소련 흑해연안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미국·영국·소련의 수뇌부가 모여 나치 독일의 2차대전의 패전 처리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눈 회담이다.

의제 대부분은 독일 유럽에 관한 내용이었지만 로즈벨트는 이곳에서도 한국의 신탁통치 구상을 펼쳤다. 필리핀을 다시 한번 예로 들며 "신탁통치 기간이 20~30 년은 되어야 한다" 말하자, 스탈린은 "신탁통치 기간이 짧을수록 좋겠다" 의견을 제시했다.

이처럼 신탁통치는 한국의 독립을 전제로 로즈벨트의 아이디어였고, 기간을 줄여서 빨리 독립국의 지위를 부여하자고 것은 스탈린의 제안이었다. 소련 입장에서는 신탁통치기간이 늘어날 경우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그만큼 증대될 것을 우려했을 가능성이 크다.

DA 300


김태환 씨는 "일각에서는 얄타 회담에서 남북 분단이 약속되었다고 주장하는데 문서로 남은 것은 없다" 면서 "로즈벨트가 독일의 항복을 눈앞에 412 갑작스럽게 타계한 합킨스가 소련에 갔을 , 스탈린은 '로즈벨트와 구두로 약속한 한국 신탁통치 합의를 지키겠다' 말했다" 밝혔다.

스탈린의 신탁통치 약속은 독일 항복후 열린 포츠담 회담을 위해 헨리 스팀슨 전쟁상(War Secretary Henry Stimson) 로즈벨트 후임인 트루먼 대통령을 위해 만든 짤막한 메모랜덤에도 나온다.

카이로 선언은 테헤란 회담의 경유지 성격으로 출발했지만 1945 5 독일이 항복한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열린 회담(717-82)에서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그대로 이행된다" 포츠담 선언(726) 명기함으로써 명실상부한 국제 공약 되었다




로즈벨트 대통령이 1943년 3월 이든 영국 외상에게 조선의 신탁 통치 의사를 표명해서 동의를 얻었다



오늘의 가장 중요한 뉴스와 해설 

 

 

Copyright 2017 Teddy Kim  All Rights Reserved.

 

이 박사와 아이크 맥아더 카테고리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