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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탄 투하와 트루먼의 속셈
07/27/2017 11:07 댓글(0)   |  추천(5)


원자탄을 최초로 일본에 투하한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한국전에서도 사용하려다

애틀리 영국 수상이 유럽을 대표해 이를 막았다.

[기고]원자탄 투하와 트루먼의 속셈

입력 2015.08.17 14:36

= 김태환 남가주한인 하버드 동창회장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미국이 소련에 대일 참전을 요청하지 않고 원자탄으로 일본을 굴복시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남북 분단은 없었을 것이고, 일본이 신탁통치 내지는 분단국이 되지 않았을까. 2차대전까지 패전국은 승전국의 '전리품'이라는 불문율이 있었다.

프랭클린 로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1943 11 소련 스탈린 총리와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만나 대일 참전을 요청했다. 미국이 진주만 공습을 당한 이후 태평양 상의 수많은 섬에서 소위 일본군의 결사 항쟁에 너무나 많은 인명 피해를 입고 있어서 소련이 북쪽에서 2 전선을 펼쳐서 일본을 협공한다면 미군의 피를 흘리고, 전쟁도 빨리 끝낼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 그냥 주는 '공짜' 없다. 얻는 있으면 반대급부를 주기 마련이다. 로즈벨트가 스탈린에게 약속한 것은 · 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빼앗긴 것을 되찾게 해준다는 . 미국은 소련 참전으로 매우 이득을 얻게 되지만, 미국 것으로 내주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아주 좋은 흥정이었던 셈이다.

일본의 항복을 가져 가지 중요한 요소는 소련의 대일전 참전과 미국의 원자탄 투하인데, 가지 극적인 사건이 어뗳게 얽혀 있는지 자세히 필요가 있다. 미국은 1945 2 얄타 비밀협정에서 또다시 소련으로부터 대일 참전을 확인받았다. 스탈린은 독일과의 전쟁이 끝나고 3개월 후에 개전하겠다고 약속했다. 독일이 연합국에 59 무조건 항복했기 때문에 자연히 소련의 개전일은 89일로 예정되었다.

만일 미국의 원자탄 실험성공이 얄타회담보다 빨랐다면 굳이 소련을 참전시켜 전리품을 나눠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한반도 또한 미국의 수중으로 넘어가 소련의 남진을 허용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일본 역시 미국의 전리품으로 장악했거나, 독일을 ·서독으로 분할한 것처럼 세계 정복의 야욕을 품은 아시아의 망나니를 신탁통치 내지는 분할통치로 힘을 뺐을 수도 있다. 우리 한민족의 현대사가 전혀 다르게 전개될 수도 있었던 뼈아픈 역사의 가정법이다.

원자탄은 미국, 독일, 일본, 소련 2차대전 참가국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헝가리 출신 과학자 질라드(Leo Szilard) 영국에 있을 핵분열을 이용한 폭탄의 이론적 체계를 갖춘 미국에 먼저 망명객으로 있던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명성을 빌어 로즈벨트 대통령에게 독일에 앞서 성공시켜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래서 시작된 핵개발 사업이 '맨해튼 프로젝트'이고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책임자가 되었다.

극비 프로젝트는 언제 완성되고 실험이 성공될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로즈벨트는 얄타 회담에서도 스탈린에게 대일 참전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로즈벨트가 독일 항복을 4 앞두고 돌연 운명한 공화당은,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에게 너무 많은 양보를 했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동유럽과 중유럽을 소련에 그냥 넘겨줬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이 나치에서 해방시킨 프랑스, 네덜란드, 그리스 등의 내정에 대해 소련이 관여하지 않은 것처럼 소련이 피흘려 얻은 나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상호주의에 어긋난다고 평하는 인사들이 많았다. 얄타 회담에 참가했던 국무장관 스테티니어스는 오히려 소련이 많은 양보를 했다고 말했다. T-34 전차를 앞세운 소련은 독일 전체를 점령할 있는 막강한 힘을 갖췄지만, 미국과 영국이 독일 서부를 차지하도록 했고, 수도 베를린까지 분할하는 선심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로즈벨트의 급서로 부통령 취임 88일만에 세계 최강국의 대통령이 되버린 트루먼은 원자탄 계획을 브리핑 받고, 역사에 남을 대통령이 있다는 야심에 부풀었다. 원자탄 개발이 성공하면 소련의 참전없이 일본의 항복을 받기로 작정한 것이다.

실험이 성공했을 경우를 대비하여 열린 회의(1945.6.1.)에서 원자탄 사용 시기, 대상 등을 논의한 결과 원폭 투하 예정지로 히로시마, 고쿠라, 니가타, 나가사키 교토가 선정됐다. 스팀슨 장관이 교토는 일본의 고도로 문화 시설이 많다며 비토를 놓았는데 그가 신혼여행을 교토에서 보낸 것이 일부 작용했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트루먼은 맨해튼 프로젝트가 진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독일 항복 후에 열기로 포츠담 회담 개최 날짜를 2주나 연기했다. 뉴멕시코에서 행한 원자탄 실험이 성공한 것은 716 포츠담 회담 개막일이었다. 트루먼은 721 맨하탄 프로젝트 책임자인 그로브스 장군으로부터 상세한 보고를 받고 나서, 당일 원폭을 일본에 투하하는 것을 승인했다.

일본의 암호를 훤히 꿰고 있던 미국은 일본이 소련을 통해 항복 주선을 요청한 사실도 알았고, 일본의 해외주재 무관으로부터도 천황제만 유지되면 항복할 뜻이 있다는 것을 전달받고도 726 포츠담 선언을 통해 모든 일본 군인이 "무조건 항복하지 않으면 즉각적이고도 철저한 파괴가 따를 "이라고 경고했다.

트루먼은 725 일기에 "원자탄을 오늘부터 810 사이에 사용할 "이라고 적었다. 그는 일본이 728 무조건 항복 요구를 거절했다고 했지만, 하세가와 츠요시 (Hasegawa Tsuyoshi) UC 산타바바라대 교수에 의하면 일본은 거절한 적이 없고 다만, 아무 행동을 취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트루먼은 '무조건 항복'이라는 받아들일 없는 조건을 걸어놓고 일본의 '무응답' '거부' 해석, 원자탄 투하의 명분 쌓기를 셈이다.

아이젠하워를 위시한 모든 고위 장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86 히로시마(廣島) 번째 원자탄 '꼬마(Little Boy)' 투하한 트루먼은 미군의 인명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용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소이탄 이미 사용 중인 다른 무기처럼 원자탄도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강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트루먼이 기대했던 일본의 즉각적인 항복이 나오지 않았는데, 이미 미국이 도쿄 여러 도시를 대상으로 융단 폭격을 해왔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하나의 엄청난 공격으로 오인하는 사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소련은 얄타회담 합의대로 3개월이 되는 88 저녁 몰로토프 외상이 일본 대사를 초치해 "연합국의 요청에 따라 이날 자정을 기해 일본에 선전포고한다" 통보했다. 150만에 달하는 소련군은 명장 바실리에프스키 원수의 지휘 아래 , , 3 방면으로, 압도적인 탱크 기계화 부대를 앞세워 물밀듯이 내려와, 일주일만에 만주 전역과 나진 청진 북한 지역을 휩쓸었다.

일본은 중재를 기대했던 소련이 참전한데다 진격 속도가 너무 빠르자 당혹했다. 사할린, 천도 열도 쪽에서 남하하는 소련군이 홋카이도 쪽으로 몰려 온다면 방비할 도리가 없을 터이므로 항복하여 천황제를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한편, 미국은 소련 참전일 일본에 하나의 원폭을 투하하러 고쿠라(小倉) 향했으나, 상공이 짙은 구름이 끼어 있어서 대타 후보지인 나가사키(長崎) '뚱보(Fat Man)'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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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마침내 일본이 항복하자, 미국은 원자탄 발에 일본이 들었다고 주장했으나, 하세가와 츠요시 교수 항복 직전의 일본 고위 인사들의 자료를 철저한 검증한 "원자탄이 아니라, 소련군 참전이 일본 항복의 직접적 원인이라는 분석 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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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소련의 참전이 개시된 상황에서 번째 원자탄을 투하한 것은 왜일까. 이는 반드시 일본의 항복만을 목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소련에 대해 실력 과시, 전후 소련의 세력 팽창에 대한 억제책으로 행한 것이며, 이로 인해  동서 냉전이 시작됐다는 알프로비치(Gar Alperovitz) 교수의 수정주의 학설이 많은 호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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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경기고와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고 서울대대학원 외교학과 1 수료 코리아 헤럴드 기자, 남북회담 사무국 외신담당관을 역임했다. 1970년대 평양서 열린 남북 적십자사 회담시에 대한 적십자사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한 바 있던 그는 도미 육군에서 컴퓨터 오퍼레이터로 근무했고 파예트빌스테이트 대학(회계학) 하버드 경영 대학원(Harvard Business School MBA) 졸업했다.  GM  Chrysler 등에서 Finance 관련 분야에서 근무한 다음, 현재 한국전쟁 및 냉전 시대를 중심으로 현대사료 연구가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남가주 한인 하버드 동창회장을 맡고 있다.

 

본국 중앙일보 전재 기사 URL:  news.joins.com/article/18464545


필자주: 오는 8월은 원자탄 투하와, 쏘련의 대일전 참전 그리고 해방의 기쁨과 함께 비극적 분단이 72년전에 일어났읍니다. 앞으로 몇번에 걸쳐서 이  분야를 살펴 보겠읍니다.

강대국의 행태를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못난 우리 조상, 그리고, 아직도 친일 사대파를 청산 못한 우리 스스로를 자책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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