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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박사와 아이크
07/01/2017 21:07 댓글(0)   |  추천(5)

머  릿  말


이승만 박사가 권좌에서 물러나고 하와이로 떠난지도 어언 57년이나 지났건만, 아직도 우리 어진 한국 시민들은, 이 박사가 "자진 하야" 하고 "자진 망명" 한 것으로 정부가 발표한 그대로 곧이 곧대로 믿고 있다.


필자는 약 5년 전에 당시 (미주)서울대 동창회보 편집 위원장이셨든 지인수 선배님이 영문 기사 한편을 청탁하셔서 프리웨이를 탈 때마다 감사히 생각하며 한국 전쟁에 평화를 가져다 주신 진정한 한국인의 은인이신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공적에 대해서 글을 쓰기로 작정했다. 그분의 많은 공적 가운데 우리 한겨레에게 가장 큰 공적은 뭐니뭐니해도 "한국전의 휴전 성취"라 하겠고 휴전 조인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우리 모두가 이 박사의 반공 포로 석방이 "영웅적 쾌거"로 칭송되고 있으나, 그로 인해 우리 장병 약 3만명이 죽거나 다친 "7.13 공세"를 당했는데, 한국 전쟁 가운데 단일 전투로는 가장큰 인명피해를 입은 사실이 지금까지 뭍혀져 왔다는 엄연한 현실을 발견하고 분노를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계기로 태평양 전쟁 (제2차 세계대전 가운데 미국과 일본이 주로 싸운 전장) 의 종결과 관련한 원폭 투하와 쏘련군 만주 침공, 그리고 조선 독립을 최초로 언급한 카이로 선언의 배경을 다루고, 인천 상륙 뒤에 중국의 외국군 38선 월경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고 압록강으로 신나게 진격하다가, 공용화기로는 겨우박격포에 군인 일인당 소총도 한자루씩 갖추지 못한 소위 "중국 인민 지원군" 에게 평안 북도에서 참패를당해 "걸음아 나 살려라"고 소리치며 미군 역사상 치욕적 패주를 했는데, 지금까지 동부 전선의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는 잘 알려져 있으나, 서부 전선의 초고속 후퇴는  대부분이 모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기는 것만 말하고 지거나 꽁무니 빼는 일은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당시 초등학교 3학년생이었든 필자는 저녁 라디오 뉴스를 들으면, "오늘도 국군과 유엔군은 작전상 후퇴를 거듭했읍니다" 라는 귀절을 매일 들을 수 있었고 그 소리가 아직도 귀에 정정하다.


맥아더 원수가 하자는대로 따라하든 트루만 대통령은 중국군 참전으로 미군이 참패를 당하자 기자회견에서 대응책으로 미국의 병기고에 있는 모든 병기를 다 사용할 수 있다고하자, 재치있는 한 기자가"그럼, 원자탄도 포함되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하자, 유럽이 당장 벌집 쑤셔댄 것 처럼 야단이 났다. 한국전에 원자탄을 사용하면,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는데, 나치 독일을 패망시킨 쏘련이 동독에 있는 그 무시무시한 T-34 탱크를 앞세우고 서구로 진공하면 일 주 이내에 붕괴될텐데, 우리는 어떡하려합니까 하고 즉각적으로 원폭 사용 반대 시위가 맹렬해졌고, 서구를 대표하여 영국 수상 애틀리가 워싱턴으로 날아와,  트루만과 협의한 결과 트루만*애틀리 선언을 발표했는데 (1950년 12월 8일), 주요 내용은; 한국전의 국지화 (중국으로의 전선 확대 반대), 유럽 우선 주의, 한국의 무력 통일 포기, 원자탄 사용자제 및 사용시 영국과 사전 협의 등이며 전쟁을 휴전으로 끝내도록 노력한다고 합의했다. 지금 우리는 이 선언의 틀 속에서 살고 있으므로, 얄타 협정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다.


이때 트루만은 어차피 한국의 무력 통일 목표를 포기했는데, 미국의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피흘리고 죽거나 부상당하는 사례가 점증하자 더 이상 미군의 피를 흘리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 휴전을 추구하도록 방향 전환을하여,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쏘련 측과 접촉해서 휴전을 모색하도록 지시하자 그는 전에 주 쏘련 미국 대사관에서 부대사로 근무한 바 있는 케넌에게 임무를 맡겨서 당시 주 유엔 쏘련 대사 말리크와 두번 비밀리에 접촉하여 (Glen Cove, Long Island, NY 소재 별장) 휴전 협상 방안에 대체적 합의를 이루고, 말리크가 6월 23일 유엔 방송 프로그램 "피의 대가" 를 진행하는 도중에 한국전 당사자간에 휴전 협상을 시도할 것을 제안했다. 이러한 물밑 협의 과정이 발표되지 않아서 모두 쏘련이 "휴전 제안"을 최초로 제기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에 앞서 트루만 대통령이 맥아더에게 휴전 제안에 관한 문안을 검토해 보라고 보내자, 그는 공산권에 자신에게 항복하라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이에 격노한  트루만 대통령은 맥아더가 혹시 해임건을 미리 눈치채고 사임할까봐 한 밤중 (1951년 4월 11일 새벽)에 기자단을 불러 모은 다음에 맥아더 파면을 공표했다. 


맥아더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바쁜 가운데에서도 대만으로 날아가 (1950년 7월 31일) 장개석과 밀담을 했는데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그 후의 언행을 보면 장개석에게 본토 수복에 대한 언질을 준듯하다.  실례로, 그는 동해상에서 작전중이든 미 제 7함대의 제77 타격대를 중국 광동성 썬타오 5 마일 부근의 중국의 영해로 파송해서 중국측 도발을 유도하려 하였는데, 그가 파면 통보 받기 직전에 철수한 사실이 입증한다.


이 박사는 휴전 조인 다음해 (1954년) 7월에 워싱턴에 가서 한미 정상회담 때 다시 "조그만 전쟁을 시작하자고 떼를 부렸으나, 아이크는 그 조그만 전쟁이 쏘련의 개입을 불러 일으켜 제3차 대전으로 발전해 핵전쟁을 유발하면 온 인류 문명이 파과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고 "핵 전쟁의 가공"함을 주지시켰다.


아이크는 이 박사가 다시 일방적인 "북진"을 감행할까봐 항상 염려했는데, 기록상으로 보면, 휴전 조인 후약 6년이 지난 1959년 6월 25일에 열린 제 411차 안보 회의 (NSC) 석상에서 만일 이박사가 "북진"할 낌새만 보여도 즉시 미군을 한국에서 철수시키고 한미 방위 조약 철폐 선언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한미 상호 위 조약 너무 믿지 마십시요!)


이 박사는 다음 대선에서 자신의 유력한 야당 후보자로 지목되는 조봉암 선생을 미국 대사 다울링이 적극적으로 구명운동을 했지만 법살하고, 야당을 탄압하기위해 국가 보안법을 개악하며, 경향신문을 폐간하여 언론을 통제 탄압하는등 민주 정치에 역행을 하든차에 CIA 한국지부가 이박사가 그해 (1959년) 5월 하순부터 정신이 혼미하여 정사를 볼 수 없어서 30대 초반의 비서 (박찬일) 가 프란체스카와 협의해서 국정을 다스린다는 보고를 받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다우링 주한 대사에게 훈령을 보내 다시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 대한민국의 국가 원수가 사실상 유고 상태라는 사실에 심대한 우려를 표하고 이 박사와 아주 친근한 월트 져드 하원의원을 비밀 특사로 이 박사에게 보내서 후계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현직에서 사퇴하도록 종용하였으나 웃고 넘겼다한다. (1959년 10월 하순)  이 때 져드 의원의 우정어린 충고를 따랐드라면, 4.19의 유혈 사태를 막고 편히 은퇴 생활을 보낼 수 있었을텐데 안타깝기 짝이 없다. 져드 의원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이 박사 면담후 보고서 (필자 단독 입수) 를 보면, 후계자를 물을 때,이 박사는 자신도 불구자인 이기붕이라고 끄내기가 쑥스러웠는지, 언뜻 답변을 못하다 마지못해 이기붕을 언급하면서도 그의 다리에 약간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간단히 얼버무렸다. (비일 특사 건은 외교 문서에 한줄도 오르지 않아서 비밀 해제된 기밀 문서에만 목을 댄 소위 학자들은 전혀 모르신다.)


져드 특사가 다녀간지 약 6개월 뒤에 4.19 학생 시위가 일어나고,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이 박사의 퇴진을 강권해서 그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이화장에 있든 이 박사에게 전정권인 자신의 추종자들이 몰리자 이 박사가 재집권을 노리는 것을 차단하는 예방적 차원에서 당시 미 대사관 부대사인 마샬 그린이 주동이 되어 이 박사를 하와이 교포들이 성금을 모아 전세기로 하와이로 휴양차 단기간 모시는 형식을 취했으나, 그와 프란체스카 여사가 타고간 CAT 항공사의 내막을 알게 되면, 그의 망명설은 허구임이 만 천하에 밝혀 진다.


앞으로 대략 한주에 한편씩 실릴 기사는 주요한 이슈/ 사건 (Issue and/or Event) 중심으로 엮어 나가려 합니다. 앞으로 실릴 글들은 필자가 뉴욕 중심의 한인 매체인 Newsroh.com 의 노 창현 대표와 전화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해서 Newsroh.com 에도 실리고 당시 한국 통신사 Newsis.com 의 특파원이어서 통신 기사로 특보로 올렸다. 이에 따라, 뉴시스 통신사와 계약 관계에 있든 많은 매체들이 인용 전재하였고, 특히 본국 중앙일보 (news.joins.com) 에서 제 글 모두 전재해주셔서 감사드리고, 미주 동포님들께도 이 모든 사실을 전해드리도록 여기 자리를 마련해주신 임광호 사장과 김 완신 편집국장께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며, 이 글들을 게재하도록 허용해주신 노창현 대표께 무한한 사의를 표합니다.


끝으로 이 글을 실리는 이유는 부끄럽게도 한국은 아직까지 언론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아서 가짜 뉴스가 사실인양 판치고 있기 때문에 제목 (True History) 처럼 왜곡되었거나, 숨겨진 역사적 사실을 일차 자료 (Primary Sources) 에 근거하여 발굴한 내용을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널리 알려 드리려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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