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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피속에 흐르는 아리안의 유전자
10/27/2016 23:10 댓글(12)   |  추천(15)


아래 스키타이민족에 관한 내용은 11년전 조선일보 인터넷판 JR의 유목민 이야기에

연재했든 내용의 일부다, 이포스팅에서  시작되는 내용중 차별받는 중국동포들은

그후에 쓴 내용을 추가하고 또 본문도 오늘 인데넷을 검색해서 신라인의 유전자

내용은 최근의 내용으로 업데이트를 햇다.


필자는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 사가에 지나지 않아 본 내용에 책임이 없슴을 알립니다.

틀린내용이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재미있게 일고 잊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차별받는 중국동포
 
지난 금요일날 신청한 거소증(재외동포 국내거주 허가증)을 받기
위해 양천구에 있는 출입국관리소를 찾아갔다. 몇년전 2층에서
신청을 할때는 창구가 너무 복잡해 의정부에 있는 경기도 출입국관리소
를 이용했었다. 그러나 새로 단장한 양천구에 있는 출입국관리소는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로 수속이 빨라졌다. 3년의 기한인 새거소증
은 출입국관리소에 들어가자마자 찾았다.
 
의정부나 양천구에있는 출입국관리소를 갈때마다 느끼는 것은
다른나라 해외동포들과는 달리 중국동포들에 대한 차별에 출입국
관리소에서 만나는 중국돌포들에게 같은 해외동포 입장에서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초록은 동색이니 안그럴수가 없는것이다.
 
중국동포들이 누구인가, 일제에 항거와 독립투쟁을 위해 만주로 이주한
독립투사들의 후손이거나, 아니면 일제에 의해 토지를 빼앗긴 갈곳 없는
농민들이 만주로 이주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닥고 살든 농민들의 후예가
대부분이다.
 
김대중정권이 중국에 한국의 동포법을 알리자 중국정부가 반대해서
중국동포들에게는 타국동포들과는 대조적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게되였
다.  중국정부는 중국에 입국해서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밝히는 자들에게는
중국에서 비자에 억매이지 않고 중국내에서 살수 있다는 사실을 한국정부가
모를리 없었지만 저자세 외교의 결과 중국동포만 불이익을 당하는
차별적인 동포법이 되였다. 이악법을 당장 뜯어 고칠수는 없을까?
 
그리고 출입국관리소를 갈때마다 을씨년스런 기분이 되는것은 내가 나서
자라고 또 배곱음과 몽둥이 세례를 받으며 30여개월의 신성한
국민의 의무(그건 정부에서 젊은이를 군대에 가라고 해대는 빛좋은 개살구
같은 소리에 불과하고 젊은이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 자신들을 위해서
군대에 갔고 또 가고 있다)  병역을 마친 내가 외국인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몽둥이 맞으며 배곯으며 30여개월의 군복무를 마친 동포들에게 2중국적을
허용하자!!!! 해외서 동포를 상대로 사기친 놈들, 이중국적을 이용해
사기칠 놈들은 빼고!!!

선지 해장국
 
새로운 거소증을 받아들고 오목교 전철역으로 가는길에 청진동
선지 해장국 선전 간판이 보였다. 반가웠다, 무조건 식당으로 들어가 선지
해장국을 시켜 먹어보니 옛날에 먹었든 청진동 선지 해장국은 야채를 푹삶아
별로 씹을것도 없었으나 이식당에서 먹는 선지국은 야채가 너무 질겨
서 옛날 청진국 선지 해장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맛집을 가봐도 옛날
맛이 아닌 음식들이 대부분이라 고향에온 나는 옛것을 우적우적 씹으며
비교를 하는 버룻이 생겼다.
 
전철에서
 
선지해장국을 먹고 오목교에서 5호선 전철을 탓다. 자리에 앉아
건너편에 시선이가자 긴오각형의 얼굴을 가진 중년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광대뼈가 툭튀어나온 그여인을 보는순간 2차대전때 스탈린 그라드에 참전한
소련군병사의 전쟁체험기가 불쑥 떠올랐다. 몽골계와 슬라브족의
피가 석인 동료병사의 4각형 얼굴에 툭튀어나온 광대뼈를 보면서 그는

"먼곳에서온 저병사의 선조" 인 몽골인들의 특징인 광대뼈를 들먹였다.
 
양볼위에 툭튀어 나온 광대뼈는 바이칼호에서 동진해 한반도에 정착한
한국인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철을 타고 승객들의 얼굴을
매일 유심히 살피는 내눈에 툭튀어나온 광대뼈를 가진 사람들 보다 얼굴이
긴 한국인들이 훨씬 더많다는 사실을 매일 확인하고 있다. 이게 무슨말인가 하면
얼굴박사 조용진교수의 학설은 한국인의 70%가 북방계로 얼굴이 긴편이고  나머지

30%가 남방계라고 주장한다 조용진 박사와 다른 학자들의 공통적인  주장은 거기

까지이고 70% 북방계 한국인이 북방계 어느 민족의  긴얼굴이 한국인에게 유전적인

영향을 주었는지는  밝히지 못하고 다만 북방계로만 단정을 짓고 있다.북방계 민족이

하나가 아니고  10여개가 넘는데도 말이다.
 
지난 목요일 인천시 투어를 가기위해 서울역에 도착해 역으로 들어가려고
역사 앞문을 미는 순간 근처에 앉아 있든 노숙자가 나를 보고 헤이, 유 컴온
이라고 영어로 나를 불렀다. 영어를 하는 노숙자가 있어서 놀랐으나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얼굴이 길죽한 북방계인 나를 외국인으로 오인을
한것이었다. 한국인은 더이상 단일민족이 아니라는 얘기이고 그래서
한국 고대사가 재미있다. 구수한 옛것을 씹어 맛을 보기로  했으니 한국의
얼굴박사 조용진 박사가 밝히지 않은 한국인이 가지고 있다는 유럽계 종족의
유전자가 어느종족인지를 밝힌 KBS 역사스페셜 다큐멘타리를 본대로
써보자(미국동포 케이불 방송에서 2009년 9월 고향으로 떠나기전 방영).
 
한국에서 경주김씨가 흉노의 후예라는 설은 황당하다는 주장들을 하고 있었으나

KBS 역사 스페셜에서 경주김씨의 조상이 흉노의왕 휴도의 아들인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추적해서 밝혀지자 경주김씨가 흉노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이제 가설이 아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 위방송내용이 신라 경주김씨들이  사대주의의 결과 자신들의 조상을
미화하기 위해 중국에서 몇대를 산 흉노의 왕 아들인 김일제의 후손으로 세탁을 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한술 더떠서 신라의 골품제는  신라로 이주한 스키타이인이 자신들의

종족을 보존하고 원주민과 혼혈을 막기 위한 제도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도 나타났다.


이들의 주장하는 근거는 이렇다.2013년 중앙대 생명과학과 이광호 교수는

아시아 각지역 고분에서 발굴한 2,000여개의  고인골과 몽골 중부와 북부

서부지역에서 발견되는 고대 인골의 유전자를 추출해 분석한 결과 고신라인

모계 DNA는 신라북부 유목민과 스키타이 서흉노, 부계 유전자 구릅도

이와 비슷한 결과였다(끝에 동영상 참고).


신라인들이 이들과 인적교류 관계가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그래서 대구에서

미인이 많아 나오는 이유가 바로 이지역 주민 0.2펜센트 인구가 스키타이인의

아리안 유전자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10년전까지

만해도 신라 왕족과 경주김씨를 흉노라고 했을때는 악풀로 달려들든 경주김씨

후손들이 변해도 너무 변했다. 아리안의 유전자를 가졌다니 백인앞에서는 주눅이

들어 기를 못펴는 한국인들에게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면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간사할 줄이야!를 연발하게 된다.

 

흉노는 기원전 3세기 부터 5세기까지 중국북부지역 몽골지역과 서부몽골, 중아시

아지역등 광대한 초원지대에 살든 제민족의 연합체가 흉노제국이다.

참고로 중국의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부여와 신라 사람들이 장신의 체격을
가졋다고 했다. 아래 사진에 보면 하얀바지를 입은 신라의 사신들이 장신의
체격을 가졋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1.jpg

둔황마고굴 제61굴의 오대신도에 들어있는 신라송공사의 전체모습.중앙에

신라에서 온 사신 행렬이 보이고 오른쪽에 두명의 작은 중국 관원이 이들을

맞고있다-동국대 경주박물관 제공
 
필자의 사견은 고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경주에 대릉군을 조성하고 또 무덤에 부장된 수많은 황금부장품을 만들수 있는 인력을 계산해보면 수백명의 흉노가 아닌 수만명의 스키타이인이 신라에 거주했어야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예를 들면 칼리포니아주 LA 공동묘지에 한국식 둥근봉분 묘지가 나타난 기간이 비행기로 10여시간이면 태평양을 건너는 20세기에도 이민 백년만에 이민인구 100만이 넘어서야 이루어졋다. 천4-5백년전 경주에 대릉군을 건설하고 수많은 황금유물을 만들어 부장품으로 적석목괵분에 묻으려면 흉노인 스키타이민족 수만명이 신라에 정착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그당시 북방민족은 인종의 구분없이 야만족의 대명사인 흉노로 불렀다)
 
한국고대사 최고의 미스테리는 흉노라고 알려진 스키타이민족이 어떻게 고구려
영토를 통과해 한국의 동남부 지역으로 이동 해서 신라의 지배층이 될수 있었고 또 대가야를 세울수가  있었느냐다.
 
이미스테리도 KBS 역사 스페셜에서 밝혀냈다. 고구려 대무신왕이 낙낭국을 정벌하면서 그지역에 거주하든 흉노집단과 요동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며 번성했든 흉노의 집단이  한반도 남단으로 이주해 신라의 지배층을 이루고 가야를 건국했다.중국 오호16국시절 카작스탄에서 이주한 페르시아계 갈족 흉노가 산동지방에 후조를 세웠다. 3세기에 한족에 밀려 그들이 몰살당할때 화를 피해 만주지역과 한반도로 이주한 이들이 신라로 대거 유입 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아리안은 Arya, 뜻은 "noble," 로 귀인이라는 뜻의 이단어는 복수로(Aryas="nobles") 많은 인도 유럽게 언어에서 나타나고 있다. 나치독일이 이리안족은 타종족에 비해 우수하다고 주장하며 아리안족의 천년제국을 건설하려든 꿈은 독일의 패전과 함께 사라졌다.
 
아리안족은 흑해와 카스피안해 중간에 위치한 코카서스 지방에서 북아프리카와 유럽및 중부 아시아로 이동한 종족이다. 
 
 
오늘날 한민족이 신라를 통해 물려받은 아리안의 유전자는 바로 페르시아계 아리안족인 스키타이민족의 유전자다. 기원전 7세기부터 막강한 세력을 펼처나간 스키타이인들은 융성기에 알타이 지방을 정복했다. 그들의 문화는 적석목곽분으로 경주에 대왕릉군을 이루고 있을 정도로 그영향역은 컷다.

아리안족의 일파인 스키티이민족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한국인들은 그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별로 많지 않다.  필자가 훈족의 미스테리를 2005년 조선일보 인터넷에 연재할때만 해도 온라인에서 한글검색으로 얻을수 있는 스키타이민족에 관한 자료는 거의 없었다. 이와함께 신라의 왕족들이 흉노인 스키타이인이라고 주장하자 신라왕족들의 후예인 경주김씨들이 조상을 욕보였다면서 악풀을 너무 달아 제대로 글을 연재하기도 힘들정도였다. 외국인 학자들이 쓴 스키타이민족의 자료를  검색으로 얻어 번역해서 훈족의 미스테리에 올린 내용을 아래 소개한다
 
1,  스키타이 민족과 역사
 
스키타이 병사들은 죽은 적병의 두피를 벗겨 양손으로 비벼서 부드럽게 만들어서 필요할때 마다 수건처럼 사용했다. 그들 사이에서 두피를 많이 가진자가 존경을 받고 두피조각을 여러개 꾀매서 큰 두피수건을 만들기도했다. 적병의 머리를 잘라 두개골 윘쪽부분 안쪽을 금판으로 입히고 가죽으로 밖을 씨워 컵으로 사용했다. 집안에 수많은 두개골을 금장식품과 함께 진열해서 찾아오는 손님에게 집주인은 자신의 용맹을 과시했다.
 
스키타이민족의 신화는 제우스의(Zeus) 아들 타기타우스(Targitaus)가 그들의 조상이라고 전해져오지만, 문자가 없는 그들의 역사를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 기원전 6세기경부터 우리가 알고있는 독특한 스키타이 양식의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알려졌다. 멜유코바(A.I.Melukiova) 는 스키타이 인들이 기원전 2천년부터 기원전 7세기 사이에 몇차례에 걸처서 볼가강-우랄 초원을 거처서 흑해연안까지 진출했다고 추정하고있다.
 
스키타이인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7세기에 앗씨리아와 키메르인(Cimerians)에 대항한 동맹국으로 알려져있고, 그결과 키메르인들은 살든영토를 잃고 스키타이인들에게 남쪽으로 쫓겨갔다. 기원전 674년 스키타이 파타투아왕은(Partatua)아씨리아 공주와 결혼으로 아씨리아와 동맹관계를 굳히며 그들과 함께 카스피해의 메도스(Medos)지역을 정복했다. 메도스인들은 후에 스키타이인들을 서아시아지역에서 격퇴해 이들은 다시 폰티악(Pontiac) 초원으로쫏겨났다.
 
스키타이민족이 어느인종에 기원을 두고있는지, 그들의 문화를 추적한 결과 그들의 문화는 인도북부[현북부 파키스탄 스르브나야(Srubnaya)]지방과 연계 되였다는 사실과 해르도투스가 남긴 스키타이인의 언어 기록중 'pata" 죽이다, 'spou' 눈,arima' 하나, 'oior' 남자 등이 남아있어  언어학자들은 스키타이인들이 사용한 언어를  인도-유럽어 어군 이전의 고대 언어로 분류하고 있어 이들의 출발지가 어디인지를 거의 정확하게 규명 할 수 있다.또다른 가설은 스키타이인들의 조상은 북부 페르시아지방에 거주하든 일파가 북쪽으로 이동해 스키타인족을 형성했다는 설이 있다.

말과 스키타이인은 불가분의 관계가있다. 이들은 말을 타기 위해서 바지를 고안해 입은 최초의 인류라는 기록을 남겼으며(유럽인의 시각), 이들이 인류역사상 최초로 말을 길들여 타고 다닌 민족으로 추정되며, 말등에 안장없이 천을 깔고 달리는 말위에서 등자도 없이 몸의 중심을 잡으며 전투를 벌이는 광경은 적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유럽과 중동에서 말을 전투에 사용할 수있는 말타는 기술을 전파시킨 민족은 스키타인들이며 유럽과 중동제국에서 말탄 사람이 몸의 중심을 잡아주는 등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훈족이 유럽에서 몰락한 6세기 부터였다. 6세기 이전 영화에서 등자가 있는 말을 타고 유럽인들이 싸우는 장면은 역사를 무시하는 허구라는 사실을 알수있다.


이들이 남부 소련 시베리아 지방과 알타이 지역에 남긴 수많은 고분들이 발굴되면서 이들에 대한 많은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며,  초원에서  역동적으로 살았든 이들이 남긴 짐승을 대상으로한 예술과 말에 대한 사랑을 알수있게 되였다. 야만족으로 무시했든 특이한 이민족에게서 문명인인 우리는 바지와 승마기술을 전수 받았다.
 
BC 514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은 7십만의 대군으로 다뉴브강을 건너 소련의 남부초원으로 진격해 스키타이 정복길에 나섰다. 이때 다리우스 대왕이 관찰한  일화는 스키타이인의 한 단면을 볼수 있다. 페르시아 대군과 한참 전쟁을 하는 중, 스키타이 병사들은 전쟁터 근처에서 풀을 뜯고 있는 토기를 가끔씩 훔처보기 시작하다가 스키타이 병사들은 잽싸게  전쟁터를 벗어나 토끼사냥을 했다.다리우스대왕이 스키타이 전사들의 행위를 이해 할 수 없는것 처럼, 현대문명인인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눈에도 스키타이인들의 그런 행위는 이해 하기가 힘들다.다리우스 대왕과 대적한 스키타이인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작전을 사용하며 페르시아군과 직접적인 전투를 회피하면서 계속 후퇴하는 이들에게 다리우스대왕이 전투를 독촉하자 이들은 이렇게 회답했다, 우리가 후퇴를하며 전투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평화시의 평상적인 생활 방식을  따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집과 재산이 있는 마을도 없고 또 경작할 농지도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그런것들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전쟁으로 모두 잃을 것이라는  공포에 대왕의 군대와 대항해 싸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잃을것이 없는 우리는 대왕의 군대와 전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치만, 대왕이 우리와 진정 한판의 전투를 즉시 하고 십으시다면 우리조상들의 무덤을 한번 건드려 보십시요, 그때 대왕은 우리가 싸울지 않싸울지를 알게 되실것입니다.
 
다리우스대왕에게는 이상한 전쟁이었다. 생각해보니 스키타이인과 전쟁으로 적에게서 얻을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점령할 도시도, 건물도, 약탈할 아무것도 없었고 그곳에는 끝없이 넓은 지평선만 보이는 초원밖에 없었다. 다리우스대왕은 철군외에 다른 선택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철군하는 대왕의 군대에 스키타이군대는 다뉴브강까지 따라 가면서 대왕을 괴롭혔다. 그일이 있은후 다리우스 대왕은 다시는 다뉴브강을 건너 북쪽 초원으로 스키타이 정벌을 포기해 결국 승리는 스키타이인들에게로 돌아갔다.
 
"성을 쌓고 도시를 건설하는 자는 망하고, 초원에서 끝없이 이동하는 자가 승리 한다는 몽골 초원의 유목민들의 믿음은 스키타이민족에서 유래한 말이 틀림 없을 것이다"
 
기원전 7세기부터 3세기까지 스키타이민족은 흑해초원 북쪽부터  흑해, 돈강(Azov해로 흘러 들어가는 러시아 중부의 강)동쪽 부터 서쪽 다뉴부강까지 차지했다. 스키타이 부족중 최고의 위치는 지배층에 속하는 부족이며, 다음이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부족, 최하위층이 농경생활을 하는 부족으로 이들은 지배부족과 유목민의 지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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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노란색은 융성기 알타이지역까지 진출한 스키타이제국영토

 

스키타이민족의 융성기는 기원전 4세기~3세기초에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발전에 최전성기였다. 수많은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인들이 정치 경제 상업의 중심지인 흑해연안 카맨스코 고로다스케 (Kamenskoe Gorodishche) 지역에 정책해 살기 시작했다.
 

또한 이시기인 기원원 339년 스키타이왕 아테아스(Athesas)는 스키타이 제부족을 통합해서 영토를 확장해 트레시안(Tracian)국경인 다뉴브강까지 진출했다. 아태아스왕은 나이 90에 마케도니아의 필립왕(Philip, 그리스의 정복자 알랙산더 대왕의 부친)과의 전투에서 전사했으나 스키타이 왕국은 그의 죽음에도 부강한 국가 형태를 유지하다가 기원전 3세기 말 서쪽으로 부터 처들어오는 켈트(Celt)족과  트레시안(Tracian)족, 동쪽에서 처들어오는 사마시안(Samathians)족에게 밀려 스키타이인들은 이들에게 흡수되며 역사의 장에서 사라졌다.
 
2, 스키타이 민족의 생활과 풍습
 
스키타이인의 가족구성은 1부 다처제로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리스인들은 이들이 모계사회였다고 보고 있으나 고고학자들이 남부소련 지방에서 발굴한 그들의 묘는 그리스인들의 주장이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은 몇명의 처를 거느리며 사후에는 그의 형제나 아들이 그의 처를 소유 할 수 있었다.
 
스키타이 여자들은 별다은 권한없이 집에서 자녀들을 돌보며 사는 존재에 불과했다. 스키타이인의 이웃인 사마시안(Smartian) 여자들이 말을 타며, 남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쟁에도 참여하는 활동적인 생활과  비교해 볼때 스키타이인 여자들은 마차를 이용해서 자식들과 함께 이동을 하는 정도의 능동적인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있다.
 
물고기와 야생의 짐승이 풍부한 이들에게 양식은 항상 풍부했다.이들의 기본식품으로는 현재도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중요한 식품인  발효한 말우유, 치즈, 파 마늘 콩등이 이들의 주식이었다.
 
해르도투스가 본 스키타이인들은 열정적인 모습으로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수염을 기른 얼굴에 깁숙하게 패인 눈에 검은 눈동자와 바림결치는 긴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新羅의_신화·알타이의_눈보라·.jpg





필자주1, 1929년 알타이 파지리크 고분에서 발굴한 위사진의 벽걸이 양탄자의 인물중 말탄 사람을 김병모교수님은 아랍인으로 추정을 했는데 필자가 보는 말탄 인물은 그리스의 역사학자 해르도투스가 설명한 곱슬머리를 가진 스키타이인 상이다.아랍인과 페르시아계 스키타이인은 완전히 다른 두 인종이다. 앉아있는 사람은 스키타이인 전통의 무당으로 이들은 여장한 남자무당(한국의 남자박수 무당)을 만나고 있는 장면이다.말에 달려있는 곡옥은 신라의 곡옥과 같은 형태로 다산을 뜻하며 그리스에서 스키타이인들이 몽골초원 유목민에게 전해진 스키타이 문화가 신라경주 까지 전파되였음을 알수있다.
 
말타고 있는 사람이 스키타이인이라는 확증은 그가 입고 있는 하의가 바지이고 또 그의 곱슬머리가 알타이지방까지 진출한 스키타인이라고 고증할수 있는 중요한 사료다. 스키타이인들이 세계최초로 말을타기 위해서 바지를 고안해 입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1947년 알타이지역에서 발굴한 2,000년전의 적석목곽묘에서 발굴된 흉노의 시신에서 굽이 달린 부드러운 장화와 함께 이들이 문신을 한사실도 밝혀졌다. 그들의 신앙은 무속신앙으로 미신을 믿으며 귀신을 쫏는 부적을 사용하기도 했다. 귀신을 쫏아내고 길흉을 점치는 무당은 특별한 집안에서 배출되며 최고의 무속인은 에나리스(enarees) 라고 불려진 남자 무당이다. 남자와 여자의 중간 즉 반남밤녀로 불려진 이남자 무당은 여자의 목소리를 내며 항상 여자 옷을 입고 생활했다.
 
스키타이인들은 왕이 사망햇을때 시위적인 애도의 슬픈행위가 장기긴 계속되였다. 모든부족이 모여 40일동안 장례의식이 거대하게 치러지며, 슬픔을 표시했다. 왕의 직계 가족들은 머리를 몽땅 자르거나, 귀와 앞이마나 코와 팔에 칼로 그어 상처를 내어 슬픔을 표시했다. 왕의 장례식때 그가 생전에 애용하든 무기와 모든 집기를 함께 묻은후 장례를 주관하는 집단은 왕의 처중에서 한사람과, 술시중인, 하인과 전령을 목졸라 죽이고 그가 생전에 애용하든 말을 죽여 왕의 주위에 함께 묻었다. 무덤은 적석목곽분으로 60 휘트 높이로 봉분을 만들었다.
 
이것으로 왕의 장례식이  끝난것이 아니다. 왕이 죽은지 일년후에 왕을 가까이서 모시던  최고 50여명의 젊은사람들을 목졸라죽여 왕의 무덤 주위에 뭍어 사후왕의 시중을 들게 했다.

헤르도투수가 기록에 남기지 않은 부분은 스키타이 전사들이 남긴 힘차고 생동감 넘치는 예술품들이 있다. 기원전 6세기경 스키타이 인들은 동물을 주제로 자연적인 모티프의 장신구를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스키타이인들이 선호하는 동물은 첫째 사슴을 시작으로 말, 야생염소, 산돼지, 곰, 늑대, 고양이과 짐승,독수리 물고기등이었다.
 
스키타이인의 문화는 기원전 1,000 년전에 이미 중국의 북쪽 유목민에게까지 
전파되었다.
지난 2백년간, 알타이 파직과  중앙아시아 남부시베리아에서 스키타이 고분의 발굴로  수많은 부장품이 출토되면서 스키타이민족의 예술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분에서 출토된 부장품중에서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수많은 황금으로 제작된 장신구이다.
 
스키타이인들이 번성기에 알타이지방까지 진출해서 황금광이 많았든 그지역에서 황금을 채굴해 사용했을것이라고 추정하는 이유는 알타이 지방에서 금의 산출이 많았기 때문이다.
 
금으로 만든 혁대와 장식품 및 수많은 금장신구, 금관 같은 장식품은 스키타이 문화가 한반도 남단까지 영향을 미처 스키타이 문화가 꽃을 피웠다는 사실을 신라의 문화가 이들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
 
 


기원전 1세기 경 아프가니스탄에 진출한
스키타이인들이 제작한 황금관으로 아프가니스탄
황금의 계곡에서 발굴된 금관


               
 
신라금관은 스키타이 민족이 한반도 남단 신라로 이주해 제작한 스키타이문화의 정수인 황금관.

전세계에 있는 10여개 금관중 6개가 신라에서 출토된 금관이다.


스키아인의 상상도다. 들고 있는 활이 스키타이인의 복합궁이다. 몇개의 재료를 이용해

붙여 만든 그들의 활은 한국이 자랑하는 국궁의 원조다. 한국의 유명한 복합궁이 스키타이인

의 활에서 유래했다. 한국인들이 믿고 싶지 않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아래 주소에 13편의 "훈족의 미스테리"가 있습니다. 비공개를 오늘 공개로 설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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