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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추억 1 농촌봉사경험
04/12/2016 18:04 댓글(0)   |  추천(1)


고등학교시절에 우연하게 서클에 가입을 하여 서클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는 여학생과 말을 할 기회도 거의 없던 시절이고 교회에서나 여학생을 볼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서클이름은 석청인지? 하여간 늘 푸른의 의미를 가진 서클로 경복 경기 서울 경동 보성의 5개 남학교와 경기 이화 숙명 진명여고의 9개교 학생으로 구성된 모임입니다. 주로 봉사활동을 하는  모임으로 공중화장실 청소도 하고 농촌봉사활동도 하는  모임이 있는데...매주 주말에 모임이 있었습니다.  약수동의 어느 교회의 회의실을 빌려서 사용했던 것 같고...


아마 고등하교 1학년때는 공주군 사곡면 월가리란 곳으로 봉사활동을 간 것 같습니다. 1964년때이니 농촌은 엄청 힘들게 살던 시기이고 서울도 역시 살기 힘든 시기였고...하여간 회비도 모으고 모금도 하여 농촌봉사활동을 갔었는데..주로 초등하교 아이들을 가르치고...노력봉사를 하고 일꾼으로 하루 종일 땀을 흘리던 기억이 납니다.

봉사활동 중에 토끼사육도 당시 농촌에서 많이 시도하던 것이라 마을 단위로 수익사업이나 먹거리로 하라고 토끼 사육시설을 만들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또 마을의 길이 울퉁불퉁한 것을 삽으로 흙을 가져다가 매끈하게 수선하던 일도 하고..(엄청 힘든 일이지만)...

당시 그런 농촌운동을 많이 하던 곳이 가나안 농군학교 였고 앞의 선배들은 농촌봉사를 가기전에 그곳에 가서 몇일간 배워서 갔다고 하고..또다른 기관이 있는데 계몽협회에서는 농촌지역에  무료로 도서공급을 하던 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봉사활동에는 1-2학년이 주축이고 3학년은 별로 없었고 졸업생(대학생)들이 몇분 같이 참여 했었고...

가장 기억에 남는 소모임이 하나 있었는데 시식위원회라고 하는 것인데...

3명이서 주도 하던 것인데...3가지 모토가 있었습니다.

1. 남보다 먼저 먹자

2. 많이 먹자

3. 끝까지 먹자 였던 것 같습니다..

당시 지도선생님(내가 고등학교때 군대를 제대한 분으로 이름은 잊었습니다)이 아마 서클을 주도하여 만든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학년이 4기생인가 했으니 아래  1960년에 농촌봉사활동 운동이 일어난 것의 연장 선상에 만들어진 봉사모임으로 보입니다.


고등학교시절 추억을 찾아 글을 쓰려고 하니 당시의 농촌봉사서클이 현대사의 한 장으로 남는 사회운동이 였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어..미소가 그려집니다


이런 농촌봉사활동은 1960년대의 사회운동의 한 부분으로 남은 것입니다.


내가 활동했던 서클활동은 1960년부터 전개된 학생운동 차원의 대국민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생긴 것 같이 생각됩니다. 국민계몽운동 (
4월 혁명을 주도했던 학생들은 동년 5월 한달을 학원 문제 시비로 보냈다. 그러면서 정치변혁은 학원민주화운동만으로 성취될 수 없다고 자각하고 사회운동 차원으로 그들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국민계몽운동으로 나타났다. 학생들의 국민계몽운동은 농촌계몽운동과 신생활운동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운동이 일어난 것은 독재정권의 유지가 국민의 무지 때문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학생들은 국민들을 계몽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1960년 6월 10일 서울대 학생회가 결의한 후 서울 문리대에서 ‘농촌으로 가기운동’을 전개하였다. 7월 6일 서울대에서 국민계몽대를 결성하고 8일부터 11일 사이에 7천여명을 전국 각지로 파견하였다. 연세대에서는 ‘지역사회 개발대’를, 중앙대에서는 ‘농촌생활연구회’ 등을 조직하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전국적인 조직도 결성되었다. 예를 들어 ‘전국사대총연맹’과 ‘전국대학농촌연구연합회’ 등을 들 수 있다.
서울대 국민계몽대는 4월혁명 정신의 보급, 국민정치의식과 주권의식의 고양, 경제복지의 추구, 신생활체제의 수립, 그리고 민족문화의 창조 등을 강령으로 삼고 활동하였다.
주요 활동은 직접 일손돕기, 의대생들은 진료소 설치 운영, 강연회 개최 등이었다. 이들이 농촌계몽운동에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7·29 선거의 중요성과 투표방식, 투표의 판단 기준 등에 대한 선거 계몽이었다.
신생활운동은 서울과 부산 등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가장 활동이 두드러진 단체는 서울대 국민계몽대의 신생활 운동반이었다. 신생활운동반은 ‘사회개혁은 우리 손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캬바레, 빠, 다방 등으로 찾아다니며 외래품 사용 금지를 호소하였다. 또한 관용차 사용(私用)을 단속하며 퇴폐적인 풍조를 고발하였다.

 하여간 당시 우리나라가 살아남기 위하며 엄청 힘든 과정을 거쳤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봉사활동을 준비하면서 우리의 자세로 듣던 것이 치약은 0.5cm이상 쓰지 말것이라던지, 비누는 여자는 2번만 손에 문질러 사용하고 남자는 한번만 문질러 세수하고 손 씻고...살라고 하는 근검절약의 수칙이 였습니다. 가나안 농군학교에서는 아침에 4시간 일하고 밥 먹고 낮에 4시간 일하고 밥먹고 저녁에 4시간 일하고 자라는 정도로 하루 12시간 일하기도 있었던 것 같고,,,봉사활동의 내용은 주로 아동교육, 노력봉사, 부업교육 등이 여던 것 같고 계몽협회인지에서 도서를 받아  농촌마을에 기증하기도 하고 의약품을 모아 기증했던 것도 같습니다. 물도 아끼고 먹을 것도 아끼고


서클은 계속 했으면 많은 추억이 있었을 것이지만 2학년때 중간에 이탈하여..그 후에 잠시 다시 연락도 하였으나...어느 시기부터는 거의 잊혀지고..지금은 간혹 생각이 나는  추억속의 공간이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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