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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아산
02/11/2016 07:02 댓글(4)   |  추천(6)

“1998년 6월과 10월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1001마리의 소를 트럭에 싣고 북한과 교류의 틀을 바꾼 일이 있었다.  정주영 전 현대회장은 고향에 대한 집착과 가족 친척에 대한 집착이 강한 분이 였던 것 같다. 기업인들의 노력으로 정부간의 교류도 촉진되면서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일행이 북한을 방문하여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와 금강산관광 및 개발사업에 전격적 합의, 11월 관광선 금강호가 이산가족 등 826명을 태우고 동해항을 출항함으로써 금강산관광이 시작되었다.  2005년 8월 말까지 총 1,051,832명이 관광에 참가하여 마침내 “금강산관광객 백만 명 시대”를 돌파하였었다.  그 후에 미사일발사와 핵실험 등으로 우려곡절이 있었고 관광객 피살사건 이후 중단되었다. 금강산 관광이 활발하던 시기 개성이나 평양도 쉽게 관광지로 열리는 수순으로 가기도 했었다.

대학 은사 3분 중 한분은 함경도이고 한분은 평안도출신이 셨다. 대학시절 60세에 가깝던 분들이고 그 중에 한분은 따님이 미국 시민권을 받아 미국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영주권을 받아서 북한을 다녀 오셨다. 이분은 종손으로 죽기 전의 소망이 조상묘에 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였다. 2번의 북한 방문 후에 영주권을 반납하고..한국에 돌아와 사시다가 90세 넘어서 10여년 전에 돌아 가셨다. 금강산 관광을 다녀 오신지는 모르지만..하여간 북한을 다녀 오신 후에 뵙게 되었을때 북한 이야기를 좀 듣게 되었다.  처음 방문 신청을 할 때 무척 힘들게 가고..친척들과 형제들이 만나서 북한 찬양을 많이 하여 은사님이 좀 막았더니...2번째 방문에서는 좀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고...2번째 방문은 좀 다른 지역이라서 허가도 좀 늦게 나서 가보니..길을 포장하여 새로 만들고 한 형제 집은 너무 멀고 길 포장하기 힘드니 아예 집을 새로 지어서 이사를 시켜서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하여간 죽기전의 유일한 소망인 조상묘 성묘를 마치고 영주권을 포기하시고 돌아 오셨다고 한다.

한국에는 정주영씨나 은사분 처럼 북한에서 내려와서 정착하면서 이산가족이 된 분이 1000만이라고 한다. 그동안 가족상봉이나 남북교류가 꾸준하게 추진되어 왔다가 오늘 다시 원 위치로 돌아가게 된 것 같다. 아마 해방되면서도 북한 정권이 화폐개혁을 하고 나서 모은 구폐를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하고 있어 엄청 많은 구폐가 한국으로 유입되었다는 소문도 있었고..또 많은 사람이 38선을 넘나 들다가 점차 강화되고 북의 남침으로 전쟁을 치룬 후에 더 많은 이산가족과 상처가 남게 되고..박정희 전 대통령시대부터 남북교류가 시작된 것 같다. 그 전에는 기억이 안 나고 정보도 없어 모르지만..하여간 이후락 전 중정부장인지 비서실장인지..북한의 김일성을 만나고 왔다고 발표가 된 적이 있는 것 같다. 1972년이니 당시에는 북한과 관련이 되면 간첩으로 무조건 사형이나 무기징역형에 처할 정도로 터부시 되던 부분이던 것 같은데 김일성과 회담을 하고 왔다고..하니...


하여간  현대아산은  정주영회장의 소때방문으로 금강산 관광이나 대북 투자에  키를 가지고 되고 개성공단도 고 정주영회장의 추진 사업이다. 일부 보수진영에서는 김대중-노무현의 작품으로 알고 공격을 하고 있지만 실제는 개성공단은 고(故)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대북 역점사업으로 구상한 서해안공단개발계획이 구체화된 사업이다.

이번 개성공단 페쇄에서 가장 손해를 본 기업 중 하나도 현대아산이다. 현대아산은 개성공단내에 호텔과 면세점을 운영하고 400억 가까운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금강산호텔에 이어 개성호텔과 면세점을 날리게 된 것 같다. 또 김대중-노무현 이전에도 대북교류는 꾸준하게 진행되어 남북 교류 방문이나 교류가 있었다.

하여간 이번 핵실험과 미사일발사로 촉발된 대치국면으로  고 정주영 현대명예회장의 꿈을 많은 상처를 남기고 중단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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