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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가는 길
01/09/2017 16:01 댓글(1)   |  추천(6)


그대에게 가는 길 / 임영조



1. 

 

내 하던 말 마감하면
그대에게 가리라
영화 속을 빠져나온 주인공처럼
영욕과 슬픔과 대사(臺詞)도 버리고
그대 중심으로 들어가 쉬리
89년식 르망 몰고 소백산 넘어
부석사 들려 소조여래와 눈 잠깐 맞추고
풍기 봉화 영양 스쳐 길을 계속 당기면
나 홀로 세 들다 뜨고 싶은 곳
갯마을의 고요가 나를 당기네
침엽수들 냇물에 그림자 씻는
불영계곡 백여 리 길 돌고 돌아
그대 찾아가는 길 내내
뙤약볕에 목 타는 하루를 건너
저물녘 내가 당도한 곳은
그대 자궁 속같이 아늑하고 감감한
오, 아름다운 환멸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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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경부 고속도로 달리다 천안서 들어

저녁놀 쓰고 청양으로 들어가
속살 참 매끈하고 흰 하현과 동침
열에 들떠 흥분한 칠갑산 한 자락
슬그머니 끌어 덮다 화상을 입고
뭉그러진 시행(詩行)처럼 마음을 절며
그대에게 가던 길은 너무 멀었네
장곡사 뒤란 감나무 우듬지 끝에
환하게 내건 시( ) 하나
애틋한 화두처럼 호롱불처럼
농익은 시(詩)한 편 읽다 내려오는 길
문득 만져본 내 머리통은 참 딱딱하였네
설익은 땡감처럼 옹고집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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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주산 물소리에 새벽잠 털고
여관을 빠져나와 혼자 걸었네
난생 처음인데 꼭 와본 것 같은 길
걷다가 너무 뜻밖에 만난
전생에 만났다가 헤어진 여자 같은
씨방을 막 날려버린 민들레와 걸었네
귀 시린 시냇물이 졸랑졸랑 따라나서고
나승개꽃 광대나물꽃 오이풀꽃들
자운영꽃 만개한 논두렁의 염소와
누렁개와 장닭과 푸른 숲이 예사로
나를 받아주는 곳, 내년쯤 수몰된다는
기막힌 사연에 왈칵, 목이 메는 길
이 다음 그대와 묵다 슬몃 눈 감고 싶은
걷다 보면 물소리에 젖은 길 헝클어져서
가던 길을 아주 잊고 싶은 곳
모처럼 찌든 귀 씻고 눈 씻고
온갖 생각까지 헹구는 새벽 산책길
이 길 다 가고 나면 어디로?
그대에게 가는 길은 미로 같아서
가끔씩 몸은 두고 마음만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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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대를 죽어라 사랑하고 싶은데
가장 절실한 말을 몰라 허둥대던 날
글 쓰고 책 읽기도 시큰둥한 날
무작정 차 몰고 서해로 갔네
해 뜨고 진눈깨비 내리는 진창길
그대 만날까 싶어 차를 몰았네
인륜도 아니고 불륜도 아니고
정치도 아니고 치정도 아닌
내 마음이 발 뻗는 외로움의 끝
그 적막한 뒤란 어딘가에는 필경
그대에게 가는 길 열릴까 싶어
마음과 몸이 함께 달렸네
썰물 다음 드러난 대부도 뻘밭
그 허망한 치부 어딘가에서도 혹시
착한 새끼 게 몇쯤 만날까 싶은 날
난바다를 달려온 물너울들이
내게 무슨 말하려 달려들다가 저런!
방파제에 온몸을 찧고 물러서는
물러섰다 또 덤벼드는 눈 시린 투신
물 맑은 치정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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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다 보면 길들은 자구 끊기네

끊어진 길은 때로 아련한 기억 속
메꽃빛 등불로 사운대거나
벼랑 끝에 이르면 언어로 집을 짓네
먼 마을 스치는 구름의 기척에도
마음 벽 쩍쩍 금이 가는 집
온 채가 제 무게로 기우뚱거려도
모든 길은 집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네
가파른 삶은 때로 길을 비뚤게 하고 
고행은 서역처럼 멀고도 쓸쓸하나
더러는 가슴 아린 열락을 덤으로 얻네
이녘은 조용한데 밤낮 치대는 파도
그 소리 좀 엿듣다가 오던 길 놓고
한결 순해진 귀로 그대에게 가는 길
아직도 위험한 불씨를 감춘
그대 뜨거운 언어의 중심으로 들어가
나 화려하게 자폭하리라, 그 후는
바다에 더 출렁이는 그리움 되리
오래된 시집처럼 헤어진, 그래서
눈길보다 추억이 먼저 닿는 섬
허나 제부도는 늘
물때를 알고 가야 길을 내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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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대에게 가는 길을 묻지 않는다

지금 내 생각 내 몸을 끌고
홀로 걷는 이 길이 나의 길이다
아무도 밟지 않는 첫 눈길 같은
그 깨끗한 여백 위에 시 쓰듯
밤낮 온몸으로 긴 자국
이 세상 모든 길은 자기가 낸 업보다
내가 언제 어느 길을 택하든
내 그림자가 한평생을 통행하리라
외롬나무 한 주가 내 뒤를 따르고
내 발자국에 음각되는 불립문자가
구천까지 나를 밀고 가리라
그대에게 언제쯤 당도할까
스스로도 묻지 않고 나선 길인데
물 위를 달리는 배도 정박하려면
진창에 닻을 박아야 한다, 허나
생의 닻은 때때로 제 발등도 찍는다
잠시 마음의 돛 내리고 방파제에 올라
저린 발 주무르며 쉬려니 멀리
줄포 앞바다가 허연 혓바닥을 낼름거린다
저 바다 한 페이지를 넘기면 과연
깊고 푸른 중심으로 드는 길이 보일까
해도, 나 함부로 따라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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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섭씨 삼십사 도 팔 분

불쾌지수 팔십오 프로
누가 십오 프로만 건드리면
금세 펑! 요절낼 찜통더위다
이른 저녁 먹고 내복 몇 벌 챙겨 넣고
무작정 강남 고속터미널로 나간다
두 시간을 기다려 10시 10분발
광주행 우등 고속버스를 탄다
무념무상 비몽사몽 흔들거리며
어둠을 밀고 가는 꽃상여 한 패로 떠
캄캄한 바다를 고속으로 달린다
앞만 보고 달려온 내 생도 새삼
가파르고 아찔한 커브길이 많았다
새벽 두 시, 광주 공용터미널에 내리니
불시에 유배된 듯 도시 온통 낯설다
온천표지 네온등 붉게 색 쓰는 여관
낡은 에어컨 소리 퀴퀴한 방에
혼자 누워 잠을 청한다, 언뜻
잠결에 누가 와서 묻는다
너는 지금 어디 가는 길이냐?
내가 왔던 중심으로 돌아가는 길
아직은 밤이라 일러줘도 모를테니
내일 날 밝거든 답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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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


구례 화엄사 원통전 앞
석탑을 머리에 인 네 마리 사자
앞에서 본 두 마리는 입 크게 벌려 웃고
뒤에서 본 두 마리는 이 악물고 낑낑거린다
너무 딱해 대신 거들어주고 싶은
저 상반된 노역이 내 마음을 붙든다
즐거운 자와 괴로운 자의 명암은
화엄의 세상에도 존재한다고 몸소
시범을 보여주는 불당 앞 네 사자
저 위치를 슬쩍 돌려놓으면
이 세상 음양도 일순 딴판으로 바뀔까?
내내 웃던 놈들은 울상이 되고
인상 쓰며 불평하던 놈들은 낄낄 웃을까?

 

2)


어느 집 앞에서 본 명문(銘文)이었나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허나 나는 극우도 아니고 극좌도 아닌
남이 보면 우습고 내가 보면 엄숙한
사잇길을 혼자서 걸어왔을 뿐이다
남에게 손가락질 받는 자는 대개
우는 자 뒤에서 함부로 웃은 죄였다
사자 네 놈 중 한 놈이 더는 못하겟다고
반야봉 숲속으로 어슬렁 사라진다면
탑은 와르르 당도 절도 깨질 것
깨진 탑 뒤에서 웃는 자도 있을 것
염려 마시라! 저 모순의 천년 노역이
온 산의 자비를 더 넉넉케 하고
매미 소리 마냥 푸르게 하고
물소리도 제멋대로 흐르게 하니


3)


생을 길게 보려는 욕망이 탑을 세운다
표정 각자 다르고 생각 달라도
너무 높아 무겁고 불안한 탑은
합동으로 온전히 해당하는 네 사자
절대로 내려놓거나 흔들지 않고
천년 넘게 떠받드는 저 합종(合從)
이 세상 중심을 본다
임제는 말한다
"사자가 한번 울부짖으면
여우의 머리통이 빠개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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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운주사행 첫 버스를 타고
안개 속 길 없는 길 달린다
능주 지나 도곡 들녘 참깨 밭 머리
호박꽃 장관 환한 들길 달리니
마음 온통 저절로 부유해진다
바람이 다림질한 푸른 도암 들
담배 밭이 질펀하게 뒤따라온다
끊었던 담배 다시 피운 듯
생각이 자꾸만 메슥거리고
가는 길이 갑자기 구부러진다
나의 도착이 늦은 것일까
구름이 주인인 운주사
구름은 모두 어디로 외출하고
천불천탑이 천년 고요를 지키고 있다
이제 막 뱃머리를 하늘로 대고
닻을 올리려는 구름배 한 척
구름배에 무슨 임자 있을까 싶어
운주사([雲舟寺) 끌고 그만 하산하는데
이런! 바다를 저어갈 노가 없다니!
나 아직 세상에 그리운 사람 있어
가장 슬픈 사원 하나 짓고 싶은데
말을 종종 엎질러 갈 길을 지우다니!
운주사 처마 끝 풍경이 뒤통수친다
네가 곧 사원이다 뎅그렁!
네가 곧 주인이다 뎅그렁!
내려와도 연신 뒤통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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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조양강을 지나며

 

42번 국도 타고 평창 막 지나

정선읍 못 미쳐 우회전하면
조양강이 길 하나 느리게 끌고 가지
시멘트로 포장하다 말다 한, 흡사
낡은 댕기같이 끊어질 듯 이어진
길 가노라면 마음 절로 느슨해지지
강 건너 아찔한 절벽들 각각
겸제풍 산수화가 생생한 병풍바위들
밤꽃 냄새 질탕한 산허리 돌면
도라지꽃 천궁향에 다시 취해서
아무데나 털썩 몸 부려놓고
발 뻗고 마냥 쉬고 싶은 곳
곤고한 생의 허리띠 풀고
혼절하듯 깜박 졸다 뜨고 싶은 곳
보라 꽃등 환한 감자밭 머리 어느 숲속
뻐꾹새 피울음에 오다가 익는데
아무도 없다! 문득 적요하고 외로워
거기 누구 없어요? 속으로 외쳐본다
산그늘에 눌린 인가 몇 채가
시큰둥 바라보다 도로 엎드려 졸 뿐
가도 가도 인적조차 뜸한 길
강물은 가수리 지나 운치리쯤에서
내내 옆구리에 끼고 오던 길 놓고
저 혼자 영월로 흘러가고
나는 이제 어디로 가나?
나 혼자 슬몃 당겨보는 길
너무 멀다,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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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힘에 대하여

가파르고 먼 길 저쪽은 왜

늘 궁금하고 애틋한 그리움일까
그리움도 굴리면 짐이 되는지
저단 기어로 길길길 추풍령 넘자
멀리 잔설 쓴 황악산이 우향우!
산그늘 길게 늘여 거수례한다
왠지 황송해 눈길 돌리니
볕 바른 포도밭이 모로 누워 맞는다
민숭한 포도나무들이 좌우로 정렬
전지당한 팔 뻗어 서로 당겨보려는
저 아픈 혈연의 팽팽한 조짐
힘이 보인다!
내 핏줄이 땡긴다!
절망은 때로 생을 완성하는가
벼락 맞고 쓰러진 고목의 가지에서
홀연 새 움이 돋고 마침내
꽃을 피워 올리는 생생한 말씀
그 부신 옹고집이 힘이다!
생각을 굴리면서, 하행선 타고
달린다, 김천 구미 지나 대구서 틀어
현풍 창녕 지나 봄으로 간다
나 아직 이승에 잔정이 많아
더 큰 외로움을 사러 가는 길
남녘 끝 바닷가에 따로 핀
동백꽃 보러 가는 길
마음이 지레 후근거린다
잔정도 키우면 짐이 될까?
아니면 힘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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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남해금산

길의 끝 남해금산에 오른다

나사못 같은 숲길을 가쁘게 돌아
정상까지 오르면 땀에 전 시간이
몸에 척척 감기고 해는 벌써 반나절
봉수대에 올라 그만 오던 길을 놓는다
그대는 물론 나도 깜박 잊는다
저 멀리 내색 감춘 난바다가
억겁의 파도소리 거칠게 말아
아제아제 바라아제 추켜올린 산
온 산이 햇볕 받아 섬섬하고 푸르다
혼자 높고 별나서 심심했던지
볕 바른 이마 위에 보리암을 앉히고
앞바다엔 크고 작은 섬을 뿌렸다
그중 제일 쓸쓸해 뵈는 섬 하나
내게 오기를 은근히 기다리다 못해
내가 먼저 달려가 섬이 되어 떠돈다
비로소 세상과 멀어졌다는 안도감
이젠 보리암이 어디냐고 묻지 않는다
잠시 오던 길을 지우고 무위에 드니
그대에게 가는 길도 묻지 않는다
아득한 북녘 향해 안녕! 안녕!
마음속 봉화 들고 내려오는데 
내 머리 위를 맴도는 까마귀 일가
검은 상장처럼 무겁게 난다, 혹여
오래 전에 오염된 고향을 버리고 뜬
그 일가가 아니냐고 넌짓 묻는다
까흑! 까흑! 까흐흑
갑자기 남해대교가 크게 출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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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고압선


오늘도 그대에게 가리라

가장 뜨겁고 위험한 욕정으로
팽팽하게 내뻗는 그리움으로
감쪽같이 단숨에 달려가리라
산 넘고 물 건너 인가를 피해
외진 숲 능선을 질러 바람소리 거슬러
고압적인 사랑으로 질주하리라
해 저문 거리에서 뉘엿뉘엿 돌아와
고단한 무게로 꺼져 가는 그대여
화끈한 통정을 꿈꾸듯 나는 노상
눈부신 반역을 도모해왔다
혁명은 늘 쓸쓸하고 두려운 암행
몸은 두고 안 보이는 파워만
발정 난 무소처럼 그대에게 가리니
아무도 막지 마라! 손대지 마라!
지금 그대에게 가는 이 길은
돌아올 수 없는 일방통행이니
어디쯤에 이르면 막힌다는 어림도
언젠가는 끝난다는 생각도 하지 않겠다
속울음 감춘 마른 번개로
겁도 없이 내닫는 나의 사랑은
그대와 혼절하는 감전사
황홀한 꽃불로 소멸하는 것이다
어둠 속에 갇힌 그대 생을 온전히
천하에 드러내는 일이다
저무는 세상에 외등 하나 내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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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태안 마애삼존불

  태안읍 병풍 백화산에 오르면

  마애삼존 불상이 반갑게 맞아줘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진다
  아담한 키에 두 손 얌전히 모은
  볼우물 예쁜 보살을 가운데 두고
  우람한 체구의 두 부처가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떠억 버티고 서 있는 
  표정 참 알듯 모를 듯 삼각관계다


  보살은 아마 인근 고을에서 가장 심성이 착하고 얼굴 예쁜 처녀였겠지 두 부처는 용모가 걸출한 총각 동갑내기 절친한 친구 사이였겠지 한 총각은 핸섬하고 노래 잘하고 한 총각은 머리 좋고 투망 잘하는 둘 다 볼수록 매력적인 신랑감인데 두 총각은 내심 그녀를 사랑했는데 우정을 핑계로 기회만 엿보았겠지 그녀도 둘 다 좋아 번갈아 만나면서 누구를 고를까 고민고민하다가 어느 달 밝은 밤 가위 바위 보로 이기는 신랑감을 택하기로 하고 두 총각을 백화산 마루로 불러냈겠지 두 총각은 막상 무엇을 낼까 숙고를 거듭하다 그만 날 새고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세월이 흘러 두 총각은 손동작 야릇한 부처가 되고 처녀는 샌드위치 보살이 된 모양인데 천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두 부처는 무엇을 낼까 골똘히 생각하고 보살은 행복하고 난처한 모양인데


  연포 앞바다 노을 젖는 물소리에
  두 부처 잠시 넋 놓고 깜빡 졸 때쯤
  저 작고 눈웃음 착한 보살만
  슬그머니 빼돌려 옆자리 태우고
  부르릉! 줄행랑을 쳐버려?
  삼각이 사각관계로 안정된다면
  나도 행여 부처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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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 즐거운 유배

1)


시도 안 되고 책 읽기도 따분해
어디론가 나 홀로 유배 가고 싶은 날
생각의 실마리가 길 하나를 잡는다
오늘 운세는 동쪽이 길하다 하였으나
나의 길은 대개 가쁘고 험난했으니
좌우지간 서쪽 향해 시동을 건다
오래전에 등을 돌린 첫사랑, 못내
뒷소식이 궁금해 수소문하듯
묻고 또 물어 안면도를 찾는다

 

2)


비봉에서 진입한 서해안 고속도로
포클레인에 잘려나간 산허리마다
아직 덜 아문 상처로 날 흙내 붉다
시멘트 포장 길 내내 툴툴거리는
차장 밖 풍경이 쉰 나물처럼 으깨져
속이 자주 메슥거리는 길, 내처
뻗다 말고 남양만 포승에서 그만 끝
충청도 가는 길 길은 왜 고사조차 굼뜬가?
잠시 38번 국도 타다 안중서 틀어
다시 39번 국도를 타면 곧 대형 물거울
아산호를 까맣게 덮은 철새 떼, 흡사
광활한 자갈밭 같아 생각이 자주 덜컹거린다
방조제 좌우로 단물과 짠물이 여야로 놀고
지금 막 놀던 물을 박차고 날아가는
저 알록달록한 철새 이름 뭐더라?

 

4)


밀레의 그림 속 풍경처럼 평온한
공세리 성당 끼고 우회전하면서 잠시 후
삽교천 방조제가 팽팽한 줄자처럼 떠 있고
그 길 다 가고 나서 만나는 길이라야
서산식 발음처럼 느슨하고 정겹다
차창을 내린다 바람도 달다

 

5)


여말에 공민왕 업고 까불던
요승의 전횡을 간했다가 도리어
괘씸죄 쓰고 남포 앞 죽도로 귀양 간
나의 이십대 선조 향(珦)이란 분도 혹
이 길을 장죽에 감발하고 걸어갔을까?
왕조가 바뀌어 다시 불러도 가지 않고
왜 산골로 숨어들어 농사 짓고 글이나 읽는
고집 센 서생으로 궁하게 살았을까?
오늘은 내가 그 길을 간다
누가 불러도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듯
나 홀로 떠나는 즐거운 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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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안면도 사랑

이별은 때로 사랑을 완성하는가

황해 먼 바다로 고기잡이 갔다가
풍랑에 배 뒤집혀 익사했다던
그 젊은 어부가 살아왔는가
두고 온 사람 하나 너무 그리워
억겁을 헤엄쳐 오다오다 지쳐서 그만
태안 발치에 머리 두고 잠들었는가
우화등선 꿈꾸는 봄누에처럼
참았던 속엣말을 모두 풀어서
갸름하게 고치 틀고 기다리는 섬
파도소리 자장자장 다독거려도
잠 깊이 못 들고 뒤척이는 섬
영목 선창에 고깃배들 찰찰찰
날마다 헤딩하며 밀어올려도 이젠
뭍으로 가지 않는 안면도
이별도 때로는 사랑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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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바람아래 해수욕장

아무도 없이 고요만 눈부시다

추근대던 파도소리 멀리 내쫓고

흐벅진 누드로 길게 누운 해안선

하얗게 쓸린 둔부가 에로틱하다

방금 뒷산을 빗질하던 솜씨로

슬슬 모래톱을 더듬는 솔바람소리

건건하고 눅눅한 페로몬 내 진하다

저 건너 마주 뜬 장고섬이 취한 듯

어깨를 들먹들먹 장고를 치자

갈매기 몇 점이 수평선 감고 간다

나는 지금 바람 아래 해변에

내 몫의 외로움을 엎질러놓고

익명의 그림자와 함께 걷는다

허파 속 탱탱하던 바람도 빼고

걷다 보면 나도 한낱 모래가 된다

덧없는 멀미로 마모된 모래알

이런, 길을 잘못 들었나?

갑자기 신발 속 모래알이 발바닥을 찌른다

무작정 가지 말고 잠시 쉬라고?

안식 뒤에 걷는 몸이 더 가볍다고?

모래꽃 법문 하나 새로 깨친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세상이 도대체 내 맘 같지 않은 날

무인지경 바람 아래 해변에 와서

바람 없이 넋 놓고 어슬렁거려 본다

또 무슨 몸짓으로 살아야 하나

어디서 날아온 바다오리 한 마리

여봐란 듯 갯물에 머리 처박고

열심히 발을 굴린다, 어느새 나도

마음속 물갈퀴를 흔들기 시작

그대에게 가는 길도 보이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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