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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꽃 필 무렵
08/23/2016 18:08 댓글(0)   |  추천(6)


목련꽃 필 무렵 / 박규환



목련꽃이 필 무렵이면 어렸을때 내가 자랐던 시골집의 뜰에 피던 목련을 생각하게 된다. 병풍처럼 둘러친 대밭을 등진 남향의 우리집 뜰에 황금빛 봄볕이 아늑하면 망형(亡兄)의 병창(病窓)앞, 잎이 피기도 전인 나목(裸木)의 가지 끝 마다에 붓처럼, 가지(茄)처럼 모두 하늘을 우러러 고개를 세운 꽃망울들이 공간이라는 호수에 뜬 연꽃인 듯 피어나기도 하고 봉긋하게 모은 두손인 듯 내일을 기약하는 모습을 생각한다.


내가 특히 목련이 필 무렵이면 옛집을 생각하는데는 슬프게 살다 간 망형의 영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형이 지금 살아 있다면 여든 일곱의 나이인데 그가 돌아 가신건 마흔 여덟의 젊은 나이였으니 그가 죽고나서 오늘로 40년의 세월이 흐른 셈이다. 형은 우리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는데 막내인 내가 태어나고 일년이 되기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우리 8남매는 어머니 없이 올망졸망 자란 것이다. 따라서 우리 8남매는 한몸처럼 결속했고 사랑했다. 특히 동생들에 대한 형의 사랑은 형제 사랑의 일반적인 통념으로는 생각하기 어려운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식보다는 형제가 중요하다는 이야기 끝에 “처자는 의복이요, 형제는 수족이라. 衣服波時엔 更不得이나 手足斷時엔 難不續이라.”는 옛말을 인용한 적이 있다. 말 뿐이 아닌 실제로 그는 그렇게 생각했고 행동했었다. 한 말로 말해 그가 나중에 얻은 자기 자신의 아들 딸들에 대한 사랑이 동생들 사랑보다 더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음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 실증은 갖가지 사례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며 지금 내 자식들이 하는 우애라는 것을 나는 비웃고 싶어진다. 아버지마저 오래 살지 못했으니 나는 형의 보살핌으로 자란 셈이며 나에서 떠난 육친을 생각할 적엔 아버지보다는 형이 앞선다. 그 형이 열넷의 어린 나이로 결혼을 했고 다음에 잘못해서 눈을 다친 것이 화근이 되어 끝내는 화농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항생제가 판을 치는 오늘날이라면 문제가 없었으련만 70년 전의 옛일이니 사정은 다르다. 대도시에만 있었다는 병원을 찾아 부산도 서울도 다녔다지만 오늘날과 같은 안과의나 시설이 있을 리도 없었으므로 끝내 완치하지 못한채 오랜 세월을 투병으로 허송했었다.


그러나 그는 선비의 자식으로 읽혀야 될 한학(漢學)의 수업에 게으르지 않았고 특히 서도(書道)에는 어느 수준에 이르렀던 듯 싶다. 글씨를 잘 썼지만 요즘의 소위 서예한다는 뜻과는 달리 선비로써 당연히 갖추어야될 것을 갖추었을 뿐, 자랑될 것도 없었고 요즘 낙관(落款)먼저 준비하는 서예인과는 달리 그는 낙관 하나 새겨본 적이 없었으며 남기기 위해 써둔 글씨 한폭 없다. 그의 초서(草書)와 간찰(簡札)은 족히 남길만한 것이엇음은 뒷 사람들이 아쉬워함으로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가 청년기에 이르러서는 신학문에 대한 열기와 사조에 따라 상투 자르고 만학도로 서울의 중학생이 된 적도 있고 전문학교의 학생인 적도 있었으며 일본의 도시를 방랑한 적도 없지 않았다. 그가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어렵지 않은 가세였음에도 집에서 돈을 가져다 쓴 적은 없었다. 어려울 땐 그의 글씨를 좋아해서 갖고 싶어했던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았었다고 듣고 있다.


그러나 그의 안질을 치료하기 위한 아버지의 피나는 노력이 오히려 그를 실명의 불행으로 이끌고 말았던 것이다. 그 당시 몽매했던 의료지식이 빚은 과다한 수은의 남용으로 결국 그의 말년(장년)에 이르러 수은 남용의 후유증이 나타나면서 실명의 불행을 겪어야 되었고 그로 인해 요즘으로야 청년일 수 밖에 없는 그런 나이에 밝음을 다시 되찾지 못한채 영원한 어둠으로 떠나고 말았었다.


가련한 나의 형의 병창 앞에 지금 나의 회억속에 한그루 자목련이 심겨져 있었다. 그 목련은 형이 아직 눈이 밝았을 적에 가져다 심어 놓은 것이었는데 내가 알기론 하동의 쌍계사 쯤에서 얻어다 심어 놓은 것에 틀림없을 것이다. 쌍계사는 그가 좋아하던 사찰이었다. 그가 건강이 악화되기 전엔 자주 그곳에 드나들던 일은 나도 알고 있다. 지금도 그곳 어느 친구 집에 낙관도 없는 그의 유묵(遺墨)이 남겨져 있다는 이야기는 듣고 있다.


다사로운 봄볕이 남향한 마루 끝에 금빛 영토를 넓혀오면 그 앞에 서있는 자목련의 굵다란 목필(木筆)하고 가지 끝에 나비되어 앉아 미풍에 하늘대는 꽃나래가 그림자를 떨구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마루끝에 나와 그걸 바라다보며 망연히 앉아있던 형, 그 형이 하루 아침에 끝내 실명하여 영원한 어둠을 안고 마지막 날까지 몇해를 보내야 했다.


형은 지옥과 같은 나날을 보내면서도 어둠과 설음과 아픔을 호소한 적이 없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던 해, 전쟁중의 영양실조로 막대기처럼 말라든 형의 입에 미군이 풀어놓은 사탕을 구해다 넣어 드리면 황홀하게 당분을 탐하며 고마워하던 형은 끝내 그해 늦가을, 당시엔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던 영광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한많은 짧은 생애를 마치고 말았다. 그가 품고간 한에 못지않게 우리들의 한이 또한 크다.


눈이 어두운 몇 번의 봄을 나면서 형은 나에게 뜰아래 목련꽃이 피었느냐고 묻곤했다. 그럼 나는 울음섞인 목소리로 이미 피었다고도, 아직은 이르다고도 혹은 이미 낙화해 져버렸다고도 알려드리면 형은 자기가 묻고 있는 목련의 현황보다는 떨리는 나의 목소리만 듣고도 울긴 왜 우느냐고 달래곤 했었다.


그러던 형이 끝내 돌아가시고 지금은 그 시골집도 누구의 소유로 넘어갔는지 알길 없으며 거기서 있던 목련꽃 나무에 이르러서야 더구나 알 바가 없다. 그 뒤 나는 고향을 멀리하고 객지로 전전하며 생애의 대부분을 살아온 동안 4월이 오면 형의 슬픈 모습과 목련을 생각하는 버릇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어느날 밤, 꿈속에 형이 나타났는데 그 깨끗하고 다정하고 재기에 넘친 건강했던 시절의 그의 모습이 아니라 꿈속에서도 생각하기 싫은 병상에서의 형의 모습이었다. 형은 “목련이 지금 피었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꿈속에서도 그 옛집이 이미 우리집이 아니고 그 목련 또한 어찌되었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네, 한창 피었네요.“하고 대답했더니 형은 금세 건강한 모습으로 바뀌면서 너는 왜 거짓말을 하느냐며, 그러나 네가 한 거짓말의 뜻이야 모르겠느냐고 생시처럼 너그러웠다. 형을 속인 죄책감응 어쩌지 못하다가 눈을 뜨고나니 등엔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이래서 나는 목련이 필 무렵이면 고향의 옛집을 생각하고 망형의 병창앞에 서있던 한그루 자목련을 회상한다.


지금 지난해 이사온 우리집 뜰에 옛주인이 심었을 백복련꽃이 만개해 있다. 비록 나의 기억속의 자목련은 아니지마는 나의 옛집의 회상을 부르기에 충분하고 슬픈 나의 형의 명부(冥府)의 뜰 앞에도 피었을지 모를 목련과 그걸 바라다보고 있을 지도 모를 형을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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