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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곳 스와니
06/14/2015 12:06 댓글(0)   |  추천(11)



‘머나먼 곳 스와니’  김명인


1.


어머니 장사 떠나시고 다시 맡겨진 송천동

봄날은 골짜기마다 유난히 햇볕 밝게 내려서

날이 풀리면, 배고파지면 아이들 따라

바위틈에 숨은 게들 잡으러 개펄로 갔다


게들은 바위 모서리나 청태 낀 비탈에

제 몸 가득 흰 거품 부풀려 먼 수평선 바라보아도

해종일 바람 불고 파도 그치지 않아서

송천동, 선뜻 발자국 지워지며 끝없던 모래벌


어느새 그해 여름 지나고 막막한 가을도 가서

물결은 더욱 차갑게 출렁거리고 인적조차 끊어지면

송천동, 아득한 방죽 따라 구름 몰려와

눈 내려 또 한 해 겨울 돌아오던 곳


누구는 어느 집 양자 되고 다시 몇 명은

낯선 사람 따라서 바다 건너 떠나갔지만

모른다, 내게 와 부딪친 그리움도 부질없이

아직도 그 물결에 젖고 있을지

송천동 송천동 바람 불어 게들 바위틈에 숨던 곳


2.


어둠은 작은 불빛도 내몰면서 언덕에서

하늘 끝에서 추위를 몰고 왔다

긴 밤은 언제나 그 한가운데를

기적을 울면서 천천히 끊고 가서

잠깨면 배고파지고 다시 드는 잠 깊어지지 않고


새벽까지는 수많은 먹을 것들과 이름도 모를

음식들이 생각났다, 나는 커서 식당을 차리리라

풍성한 눈들이 어둠 속에서도 유리창 가득

서걱거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때로 그 겨울 끝까지 허기져서 끌려다녔던 막막한

어느 하루 어머니께서 찾아오셨다


나는 동네에도 따라 나가 어느 집 문간방에서

부끄러운 젖무덤에 파묻혀 한 밤을 지내게 되자

세상은 내 힘으로도 넉넉히 살아갈

자신이 있는 듯하였다 밤새도록

우리 식구 모여 살 일에 골똘해졌던

그 기쁨 채 끝나기도 전에 날 밝아와


어머니는 내게 새 옷을 갈아입히시고 조금만 더

기다리라 하시고 다짐도 받아내시고

또다시 대구로 부산으로 떠나가셨다

어리석게도 믿고 싶었던 마음이여 몇 번 더

어머니는 그렇게 왔다 가시고 나도 떠났지만


누구도 지켜주지 못한 약속들 아직도 그곳에 남아

더러는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잎들도 줍게 하는가

나 또한 스스로 저버린 기다림과 약속들을

그 배고픔에도 섞어 증오처럼

오래 씹었을 것이니

남은 날들은 살아서 치러야 할 죄값으로

속죄하며 슬픈 춤으로 빈 데를 골라 디뎌가야지


3.


낮게 깔리며 찬송가 소리가 번져갔다, 십일월

새벽 한기가 유리창 틈새로 손 디밀면

아직도 찾아오지 않은 시간 속을 헤매다, 야곱

섬찟한 마룻바닥에서 잠깨고


눈 비비면 창문 가득 아침놀에도 새기며

방죽 너머 철새들 날은다

구름 떠가는 허공도 끝없는

허기처럼 새파랗게 비워지기만 하던 시절에


나는 그곳에서 너를 만났다, 야곱

구부린 곱사등으로 기계충 뒤에 숨어서

좀처럼 가까이 갈 수 없던 아이

이름조차 희미한


우리 모두를 지치게 하고 아득한

가지 끝 늘 그만큼 높이의 빈 까치집

어느새 겨울도 가고 눈 녹아 새 봄 다시 와

아침마다 한 줄씩 돌려 읽던 출애굽 더듬거리며

따라나서던 가나안을 향해


하나씩 떠나는 이별에도 언제나 뒤처져서

달콤하게 여름 내내 학질을 앓던 아이

잠들지 마, 잠들면 안 돼, 그 누구도 곁에서 깨워주지 않고

흔들어도 깨어날 것 같지 않던 야곱

너 또한 이제는 메마른 기억이 되어


4.


봄날 아지랑이 피어올라 먼 곳

이명처럼 기적이 울면

종달새는 진종일 하늘 밖으로 종종치고 그 날갯짓에도

앞산 참꽃들 자지러지게 깨어나


양지쪽에선 움켜쥐어도 손 시렵지 않던 고드름

툭툭 햇살도 어느새 지붕 위의 눈 녹이던 날

논바닥에 나가보면 개울물 졸졸거리고 겨우내

숨었던 방개며 물장군들이

물 밑, 아련한 기억을 더듬어 그려내는 동심원 가까이


그리하여 예서 우리가 더불어 보낸 어떤 시절도

거기 가 닿지 못하고 다만 날마다의 물살에

속절없이 흐려져 갔을지라도


헐벗던 시절의 약속이여, 저 기다림의 깃대마저 꺾어져

다시 만날 기약조차 번번이

빈 가슴 모래 바람에 허술히 날리는 그리움뿐이어도

오늘 가라앉지 않고 떠오르는 둥근 해, 둥근

내일을 향해


나는 가리라, 남겨진 모든 시간도 더는

위안 없는 마음 밭 눈물 얼룩진다 해도

많은 물음 내게 와 닿고 또 끝끝내 남겨진 의문으로

저 수많은 자책의 비탈 많은 세월을 향해


5.


햇볕 좋은 양지쪽에서 졸다 깨면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으스스 몸 떠는 능선들이

허기 속 성큼 다가선 겨울로 저물어

그리움도 불현 밀물지듯

이따금 안개비에도 젖어 무적이 우는

기다림의 날들은 길고 길었다


꿈결 깊숙이 구겨 박힌 얼굴들 아침마다

느닷없어 종소리 부서지면

찬 마룻바닥 위 눈 비비며 부르던 찬송가도 미루나무 끝

늦잠 자던 구름에 실려 어디론가

저렇게 떠가는 것이었을까


끝내 찢어발기던 미움조차 찬바람 속

저 세월 물굽이 위로 떠 흘렀다 해도

우리는 안다, 한 시절 난만히 휘접힌 마음 안쓰러이

오래 기다림으로 남아

아직도 그 굴뚝 곁에 쭈그려 앉았을 것을


고통의 날들이여, 날마다 우리 시린 맨발로

세상 막막한 네 길거리에 선다 해도

우리가 위안 없이 걸어갈

남은 길조차 지금 멀다고 하겠느냐

미처 다 씻어내지 못한 그리움도 방죽너머로

은박의 물살 흩으며 흘러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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