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캉 할머니
06/12/2015 17:06 댓글(0)   |  추천(11)



캉 할머니 / 박규환



오래 전 이야기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룸펜이다. 때가 되어 직장에서 물러나고 할 일 없이 세월 흐르는 것을 아쉬워하는 터였지만 그땐 그래도 어쩌다 아내를 따라 시장 길에 수행해서 무거운 것이면 같이 들어 주기도 하고 이야기 상대가 되어 주기도 해서 아직은 쓸모 있었던 셈인데 이젠 나이도 더 많아지고 아내마저 죽고 없으니 나는 또 하나의 직장에서 쫓겨난 꼴이 되고 말았다.


나는 자식들도 있고 손자 애들도 없지 않아 아직은 집안 어른의 꼴이지만 자식들이 듣지 않을 것임을 기화로 은밀히 이야기하자면 집을 다스리는 권리라거나 권위를 잃고 보니 효도를 다하는 자식들에겐 심히 민망한 이야기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물 위에 뜬 기름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나의 애정과 노력으로 이룩된 이 단란한 가정이 때로는 양로원 같은 느낌을 체험하기도 한다.


그게 내가 자식들에게서 받는 대우가 소홀해서도 아니고 애정의 결핍에서 오는 것도 아닌 늙음과 고독에서 스스로 생겨나는 애상哀傷일 뿐임을 어찌 내가 모르겠는가. 오히려 내가 지난 날 자식들을 길렀던 노력이나 정성은 지금 내가 자식들에게서 받는 효성에 비하면 그 반에도 미치지 못했음을 생각하면 부끄러움을 견디기 어렵다. 내가 자식들을 낳아 기르던 시절은 돌연히 맞는 해방으로 정신 차릴 여가도 없이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내란이나 전쟁을 치러야했고 쥐꼬리만 한 월급으론 애들 과자하나 사줄 여유도 없었을 때였으니 나의 무능의 탓만은 아닐 것도 같다.


딴 이야기였지만 나의 이 무료한 말년의 심상心傷이 어찌 나만이 체험하는 일이겠는가. 어떤 행복한 노인일지라도 그 점에서 만은 다 같이 행복할 수 없고 부득이 겪지 않을 수 없는 과정이고 보면 앞으로 내 자식들도 겪어야 될 사실임을 생각하면 정치인들이 어떤 불행에 처했을 때 한말로 처리하는 관례慣例보다도 월등히 더 가슴이 아프다.


아내가 살았을 때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이랄까 그런 걸 그다지 절실히 느낀 적이 별로 없었고 아내가 어려운 일을 참고 해냈을 때도 그건 자기의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거니 결론지어 별로 대견할 것도 없었고, 아내란 언제나 다정하기만한 것도 아니어서 잘도 다투면서 살아왔는데 그 가엾은 아내가 가버린 지금은 앞에서 말한 나의 가정에서의 위치와 시장 길에 동행할 수 없는 아쉬움의 크기로 아내의 위치를 생각하는 철이 드는 것 같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이야기를 쓰기 위한 서론으론 너무 너저분했으나 앞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실은 시장에서 김칫거리를 사고 생선을 사고 과일을 사서 그 무거운 걸 들어 나르던 가엾은 아내의 추모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이 자주 다니던 시장 입구엔 양약국이 하나 있고 그 약국 한 옆에 한 평쯤 되는 공지가 있는데 그 공지가 약국 소관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그 좁은 땅은 경사진 바닥이 고르지 못한, 비가 올 때면 빗물이 그 곳으로 모여 흐르는 곳이 되고 보니 거기다 노점을 차리기엔 적당치 못한 곳이었다. 물론 포장마차처럼 바퀴달린 수레에다 천막이라도 치고 높직한 판매대가 있다면 견딜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약국을 가려버리는 일이라 그럴 처지도 못된다.


 그런데 여기다 노점을 차린 노파가 있었다. 고르지 못한 땅바닥이라 낮은 곳엔 벽돌을 더 높이 쌓고 높은 곳엔 벽돌 높이를 낮춰서 기우는 곳이 없도록 한 뒤에 거기다 네모난 판자를 올려놓는 것으로 판매대를 이룬 노점인데 거기 진열된 상품은 주로 부엌용품이라 부엌칼, 뜨거운 튀김 같은 걸 건져내는 자루달린 철사 망, 나무주걱, 양은 국자며 크고 작은 주전자, 이쑤시개, 귀를 청소하는 솜방망이, 전라도 영암산 참빗, 거기 늘여놓은 자질구레한 걸 다 기억할 순 없지만, 판매대 맨 앞에 놓여 있는 비닐자루 속에 가득 담겨져 있고 관官이란 도장이 찍혀 있지도 않은 엷은 판자로 만든 아무래도 관제官製크기를 따르지 못한 작은 홉合되에다 쏟아지지 않도록 높이 기술적으로 쌓아올린 나프탈렌에는 천 원이란 가격이 붙여져 있는데 제사상으로 치면 지방을 세울 곳인 한 중앙에 그 당시 70도 넘었을 대추씨만한 노파가 제사상에 경건히 올려놓은 망인의 영정影幀처럼 앉아 있었다.


실지로 이 노파의 얼굴은 한약국에서 첩약에 넣어 주는 빨간 대추처럼 주름살투성인데다 원체 작은 체구인데도 건강하고 야무져서 망치로 때려도 깨지지 않을 성 부른 대추씨를 연상케 하는 노파였다.


여름이 가까워지면 아내는 거기서 홉되로 파는 나프탈렌을 사기도 하고 구멍 뚫린 플라스틱 곽 속에 들어 있는 덩어리진 나프탈렌을 사서 옷장에 걸기도 하고 이쑤시개, 귀 청소용 솜방망이 같은걸 사는 걸 몇 차례 본 적이 있는데 나는 그 노파를 볼 적마다 그 나이에 겨울이고 여름이고 하루 종일 그 자리에 앉아서 뭣이 됐건 팔고 있는 것이 신통했으나 거기서 물건을 사는 사람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하니까 자기 장사는 제쳐 두고 틈만 나면 옆에 콩나물 장수의 콩나물을 다듬어 주거나 더덕 장수의 더덕껍질을 칼로 긁어 벗겨 주는 것이 그의 본업처럼 보였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상관없지만 갑자기 비가 온다든지 날씨가 궂은 날 그리고 추운 밤이 깊도록 연탄화로 하나를 끼고 앉았는데 장사를 걷어치울 시간이 되면 대관절 저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어떻게 하나가 궁금했다. 그러던 하루는 비오는 날 거길 지나다 보니 자동차를 덮는 커버 같은 걸로 그 제사상을 덮고 그 위의 적당한 장소에 벽돌을 얹어서 바람이나 비에 대비하는 걸 보았고 한 번은 새벽 미사 때 교회를 가다보니 밤에도 걷어치우는 것이 아니라 비에 대비할 때나 마찬가지로 그냥 그대로 덮어둔 채 아무도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상품의 종류가 노인의 등긁기 용 대나무로 만든 조막손 따위라 도둑맞을 염려가 없겠으므로 구태여 거두어드릴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 같았고 또 그 중노동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


각설하고 그 뒤 몇 해가 지난 뒤 아내가 죽고 보니 나는 시장에 따라가는 직업마저 잃고, 참 말이 쉽지 노인이 하루 종일 말벗 하나 없이 어서 해가 저물기나 기다린다는 건 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외로움이요, 설움이요, 차라리 아픔이다.


그 뒤 몇 해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시장에 접근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에 오래 띄지 않는 노파도 노점도 기억에서 사라진 지 오래인 어느 날 우연한 용무로 그 곳을 지나다 아직도 그 자리에 그 노파가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름없이 건재하고 좌판위에 쌓아 놓은 상품도 더 불지도 줄지도 않은 것을 보았다.


나는 옛날 그대로인 노파를 다시 만나게 된 게 여간 신기했고 반가운건 고사하고 놀라움이 앞섰다. 아직도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그도 건강히 지난날의 생업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은 진정 놀라움이었다. 나는 불현듯 아내가 생각났고 지금 살아 있대도 70이 채 되지 못했을 그의 죽음이 억울했다.


그 좌판 앞을 떠나지 못하고 회상에 잠긴 내가 그 노파의 눈에 띄자 그 노파 역시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기색이 완연했다. 그 놀램은 내가 그 노파를 보고 놀랜 것이나 다름없는, 진즉 죽었을 노인을 다시 만난 놀램이었다. 모두가 죽음을 앞둔 두 노인이 뜻밖에 만나 상대가 아직도 죽지 않았음을 기이하게 생각하는 이 해후邂逅는 생각하면 슬픈 현실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그 노파와 대화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때는 아내가 뭐거나 알아서 처리했기 때문에 나까지 끼어들 일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노인 날 알아보시겠소? 오래 사셔서 다시 만나니 여간 반갑지가 않소.”

하면서 필요치도 않았지만 인사치레로 전에 아내가 잘 사던 이쑤시개며 귀청소용 솜 방망이 등을 골랐다.

“오래 사는 게 이 고생인데 오래 살고 싶어 사는 것이 아니라 죽지 않으니 살 수밖에…”

“영감님이랑 아드님이랑 계시지 않으신가요? 노인이 이 고생을 하시니 원.”

“영감 자식 다 있으면 미쳤다고 이 지랄 하겠소. 벌써 다 까먹고 나 혼자 뿐이니 이 꼴이지… ”

나는 그 이상 자세한 것을 더 물을 용기가 없었다. 그 이상 물어서 얻는 대답이란 견디기 어려운 비극임에 틀림없겠기 때문이다.


“할머니 고향은 어디신지요?”

“몰라서 물으시요? 말소리들으면 다 알제.”

이런 류의 대화가 오고가는 동안 이 노파는 해진 바지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집어내서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먹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할머니 무엇을 그리 맛있게 잡수신가요?”

“내게 뭔(무슨) 맛있는 것이 있겠오. ‘캉’이오 ‘캉’.”

“캉? 캉이 뭔데요?”

“캉을 모르는 걸 보니 서울사람인가 보네.”

“서울사람은 아니고 전라도 사람이오.”

“전라도라니 반갑소. 하지만 고향이 전라도란 말은 하지 마세요. 대통령 한 번도 못해 본 전라도 사람이 사람 축에 끼기나 하게요. 우리 전라도서는 ‘팥’을 ‘폿’이라 하고 ‘파리를 ’포리‘라 하잖소. 그래 30년도 전에 서울에 처음 왔을 때 쌀집에 가서 ‘폿‘을 달라니까 ’폿‘이 뭐냐는 거예요. 그래 거기 있는 ’팥‘을 가리키면서 저 것이라 했더니 자지러지게 웃으면서 그게 ’팥‘이지 어째 ’폿‘이냐는 것이어서 무안을 당하고 나니 그 뒤론 그 쌀집엔 가고 싶지가 않아서 딴 쌀집에 다니게 됐는데 한 번은 콩을 사려고 그 새로 간 쌀집에 가서 서울 사람은 ’폿‘을 ’팥‘이라 했으니 ’콩‘은 ’캉‘이라 함직해서 서울사람답게 ’캉‘을 달라니까 여기선 또 ’캉‘을 모르데요.”

그래 거기 있는 콩을 가리키면서 이게 ‘캉’ 아니냐니까 이번엔 포복절도抱腹絶倒, 그게 어느 지방 말이냐는 것이었다. 콩은 서울서도 콩인 것을, 자라보고 놀란 놈이 소두방 보고도 놀라더라고 ‘폿’에서 놀란 놈이 ‘캉’에서도 놀랬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의 요지였다.


덩달아 나도 웃다말고 그럼 왜 지금도 캉이냐니까

“어떤 고을 사람은 ‘쌀’을 ‘살’이라 해도 웃지 않는데 우리들은 ‘콩’을 ‘캉’이라 했대서 웃어대니 나라고 밸이 뒤틀려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래 딴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언제나 ‘콩’을 ‘캉’이라 하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요. 할아버지도 이제부터 ‘콩’을 ‘캉’이라 하시고 고향이 어디냐거든 멀직이 함경도라고나 해 두세요. 함경도서는 ‘콩’을 ‘캉’이라 한다면 그러느냐며 값을 깎아 주거나 콩을 한 주먹 더 얹어 줄 거요.“

“그럼 딴 사람이 알아듣지 못할 것 아니오?”

“못 알아들으면 귀먹은 놈이 답답하지 나야 손가락이 있으니까 가리키면 돼요.”

나는 그 정도에서 이야길 끝내고 지난 날 아내가 살았을 때 이 노파의 이야길 같이 듣지 못한 게 아쉬웠다.


‘쌀’을 ‘살’이라 해도 웃지 않고, 설혹 ‘콩’을 ‘캉’이라 해도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고장에서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조국의 영광된 통일의 그 날이 왔을 때 불행히도 합종合縱에서 탈락되고 연횡에서도 사안시斜眼時 당하는 아픔을 지레 두려워해야 할는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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