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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인정(人情)이라
12/03/2012 12:12 댓글(0)   |  추천(0)

술은 인정(人情)이라 / 조지훈



제 돈 써 가면서 제 술 안 먹어 준다고 화내는 것이 술뿐이요, 아무리 과장하고 거짓말해도 밉지 않은 것은 술 마시는 자랑뿐이다. 인정으로 주고 인정으로 받는 거라, 주고받는 사람이 함께 인정에 희생이 된다. 흥으로 얘기하고 흥으로 듣기 때문에 얘기하고 듣는 사람이 모두 흥 때문에 진위를 개의하지 않는다.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인정을 마시고, 술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흥에 취하는 것”이 오도(吾道)의 자랑이거니와 그 많은 인정 속에 술로 해서 잊지 못하는 인정가화(人情佳話) 두 가지를 지니고 있다.


17, 8년 전 얘기다. 친구 한 사람이 관철동에 주인을 정하고 있어서 통행금지 시간이 없는 그때에도 우리를 가끔 붙잡아 재워주곤 했다. 그 해 겨울 어느 날 몇 사람이 어울려 동아부인상회(東亞婦人商會) 맞은편 선술집으로부터 시작해서 ‘백수(白水)’니 ‘미도리’니 하는 우미관 골목을 휩쓸고 내쳐 ‘백마’니 ‘다이아몬드’니 하는 카페로 돌아다니며 밤 깊도록 마시고 나서 어찌된 셈인지 뿔뿔이 다 흩어지고 말았다.


대취한 나는 발걸음이 자연 관철동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 친구 집 대문을 흔들고 들어가 그 친구가 쓰는 문간방에서 방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그냥 잠이 들었다. 새벽에 눈을 떠보니 이건 어찌된 셈인가. 옆에 자는 사람은 친구가 아니라 반백이 넘은 노인이었다. 방안을 살펴보니 내가 노상 자곤 하던 친구의 방이 아니었다. 나는 쑥스럽고 놀랍고 해서 슬그머니 일어나 뺑소니를 치려던 참이었다. 늙은이라 나보다 먼저 잠이 깨어 있던 그는 완강히 나를 붙잡았다.


“여보 노형, 해장이나 하고 가야 피차 인사가 되지 않소?”


나는 그때만 해도 아직 소심과 수줍음이 심할 때라 이 말 한 마디에 그만 취했을 때의 야성은 간 곳 없고 망연자실하여, 한참을 서 있다가 그냥 주저앉았다. 그 노인은 내가 앉는 것을 보고는 일어나 주전자와 냄비를 들고 골목 밖으로 사라졌다. 조금 뒤에 따끈하게 데운 술과 뜨거운 해장국상을 앞에 놓고 이 노소 두 세대는 이내 담론이 풍발(風發)했다. 다시 술이 취한 뒤에사 알았거니와 내가 친구 집인 줄 알고 문을 흔들 때 열어 준 사람도 자기였다는 것이다. 밤은 깊고 날은 몹시 추운데 낯모를 젊은이지만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서슴지 않고 방문을 열고 들어와 앉혀 놓고 잠이 드는 내 꼴이 재미가 있더라는 것이다. 백발의 위의(威儀)에다가 무디지 않은 그의 인품이 엿보이는 이 노인은 자기도 젊었을 땐 그런 경험이 있다는 것을 따뜻한 표정으로 말해 주었다. 그가 장성한 아들을 꺾었다는 것도 알았다. 무척 애주가이기 때문에 젊은 술꾼인 나의 행장을 미소로 들으며 흥겨워했다.


사실은 날 재운 것이 길가에 쓰러져 자다가 어떻게 될까 하는 어버이 같은 염려도 있었지만 해장술을 한 번 같이 나누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나는 그분의 성함도 모른다. 그 노인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술을 아는 이만이 서로 알아주는 그것이 바로 따뜻한 정임을 이 일로써 깨달았다.


또 하나는 바로 1·4 후퇴 때 일이다. 1월 3일 밤 여덟 시에 마포를 건너 수원에서 자고 거기서 기차를 탄 것이 7일 아침에야 대구에 내렸다. 그 동안 사흘 밤을 우리는 기차 안에서 잤거니와 이 이야기는 어느 작은 역을 이른 아침에 기차가 닿았을 때 일어난 이야기다. 지붕에까지 만원이 된 피난열차가 플랫폼에 멈추자 재빠른 사람들은 모두 내려와 불을 피우고 밥 짓느라고 부산하였다. 비꼬인 몸과 답답한 가슴을 풀어 보려고 비비면서 뛰어내린 나는 아주 희한히 반가운 일을 보았다.


어떤 여인이 플랫폼 한쪽 귀퉁이에 불을 피워 놓고 약주를 팔고 있지 않겠는가? 벌써 어떤 중년신사가 한 잔 들이키고 있었다. 나는 얼른 뛰어가서 그저 덮어놓고 한 사발 달래서 쭉 들이켰다.(그 술맛의 쾌적했음은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하리라.) 안주로 찌개 두어 숟갈도 들었다. 아무래도 미진해서 한 사발만 더 달랬더니 어쩐 일인지 술 파는 부인은 웃기만 하고 술도 대답도 주지를 않았다. 그때 둘째 잔을 마시고 있던 중년신사는 술잔을 놓고 유심히 눈웃음을 지으며,


“선생도 술은 무던히 좋아하시는구료. 목마르신 것 같애서 한 잔 권했지만 이 술은 파는 게 아니요, 부산까지 가는 동안에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한두 잔씩 하려고 가져온 것입니다.”


하면서 술을 더 못 주는 이유는 말하지 않고 손수건을 꺼내어 입을 닦으면서 일어서는 것이었다.


“글쎄 자기 피난 짐은 아무것도 꾸릴 필요가 없다면서 약주 여섯 병만 묶어 들고 나섰잖아요, 호호호.”


입을 가리고 조용히 웃는 그 여인, 돈 안 받고 술을 팔던 그 여인은 물론 그 신사의 부인이었다.


술로써 오달(悟達)한 그 체관(諦觀)과 유유함이 이 혼란 중에 한층 의젓하고 멋이 있어서 부러웠다. 그는 기차가 이렇게 천천히 간다면 부산까지 가는 동안에 술이 모자랄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둘이 마주 쳐다보고 함께 웃었다. 그렇게 아끼는 술을 말없이 주는 인정, 이것이 술을 아는 마음이요 인생을 아는 마음이 아니냐. 파는 술인 줄 알고 당당히 손을 내민 내 행색은 지금도 고소를 불금하거니와 낯모르는 사람에게 흔연히 한 잔 따루어 주던 그 부인도 인생의 진미를 체득한 것 같았다. 이것이 모두 술의 감화라고 생각하면 약간의 허물이 있다 해서 덮어놓고 술을 폄(貶)하는 폭력 의지는 아직 술을 모르는 탓이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다.




주도유단(酒道有段) / 조지훈


술을 마시면 누구나 다 기고만장(氣高萬丈)하여 영웅호걸이 되고 위인현사(偉人賢士)도 안중에 없는 법이다. 그래서 주정만 하면 다 주정이 되는 줄 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주정을 보고 그사람의 인품과 직업은 물론 그 사람의 주력(酒歷)과 주력(酒力)을 당장 알아낼 수 있다. 주정도 교양이다. 많이 안다고 해서 다 교양이 높은 것이 아니듯이 많이 마시고 많이 떠드는 것만으로 주격(酒格)은 높아지지 않는다. 주도에도 엄연히 단(段)이 있다는 말이다.


첫째 술을 마신 연륜이 문제요,

둘째 같이 술을 마신 친구가 문제요,

셋째는 마신 기회가 문제며,

넷째 술을 마신 동기,

다섯째 술버릇,

이런 것을 종합해 보면 그 단의 높이가 어떤 것인가를 알수 있다.


음주에는 무릇18의 계단이 있다.


1. 부주(不酒) 술을 아주 못 먹진 않으나 안먹는 사람 --9급

2. 외주(畏酒) 술을 마시긴 마시나 술을 겁내는 사람 --8급

3. 민주(憫酒)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 --7급

4. 은주(隱酒)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고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쉬워서 혼자 숨어 마시는 사람 --6급

5. 상주(商酒) 마실 줄 알고 좋아도 하면서 무슨 잇(利)속이 있을때만 술을 내는 사람 -- 5급

6. 색주(色酒) 성생활을 위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 --4급

7. 반주(飯酒) 밥맛을 돕기 위해서 마시는 사람 --3급

8. 학주(學酒) 술의 진경(眞境)을 배우는 사람(酒卒) --2급

9. 수주(睡酒) 잠이 안와서 술을 먹는 사람 --1급

10. 애주(愛酒) 술의 취미를 맛보는 사람 --初단

11. 기주(嗜酒) 술의 진미에 반한 사람(酒客) -- 二단

12. 탐주(耽酒) 술의 진경(眞境)을 체득한 사람(酒境) --三단

13. 폭주(暴酒) 주도(酒道)를 수련(修練)하는 사람 --四단

14. 장주(長酒) 주도 삼매(三昧)에 든 사람(酒仙) -- 五단

15. 석주(惜酒)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酒賢) -- 六단

16. 낙주(樂酒)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酒聖) -- 七단

17. 관주(觀酒) 술을 보고 즐거워 하되 이미 마실 수는 없는 사람(酒宗) -- 八단

18. 폐주(廢酒) 열반주(涅槃酒), 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 九단


부주, 외주, 민주, 은주는 술의 진경, 진미를 모르는 사람들이요,

상주, 색주, 수주, 반주는 목적을 위하여 마시는 술이니 술의 진체(眞諦)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학주의 자리에 이르러 비로소 주도 초급을 주고, 주졸(酒卒)이란 칭호를 줄 수 있다.

반주는 2급이요, 차례로 내려가서 부주가 9급이니 그 이하는 척주(斥酒), 반(反)주당들이다.

대주, 기주, 탐주, 폭주는 술의 진미, 진경을 통달한 사람이요,

장주, 석주, 낙주, 관주는 술의 진미를 체득하고 다시 한번 넘어서 임운자적(任運自適)하는 사람들이다.

애주의 자리에 이르러 비로소 주도의 초단을 주고, 주도(酒徒)란 칭호를 줄 수 있다.

기주가 2단이요, 차례로 올라가서 열반주가 9단으로 명인급이다.

그 이상은 이미 이승 사람이 아니니 단을 매길 수 없다.


그러나 주도의 단은 때와 곳에 따라, 그 질량의 조건에 따라 비약이 심하고 강등이 심하다. 다만 이 대강령만은 확고한 것이니 유단의 실력을 얻자면 수업료가 기백만금이 들것이요, 수행연한(修行年限)이 또한 기십 년이 필요할 것이다.(단 천재는 차한에 부재(不在)이다.)


요즘 바둑 열이 왕성하여 도처에 기원(棋院)이다. 주도열(酒道熱)은 그보담 훨씬 먼저인 태초 이래로 지금까지 쇠미(衰微)한 적이 없지만 난세(亂世)는 사도(斯道)마저 타락케 하여 질적 저하가 심하다. 내 비록 학주(學酒)의 소졸(小卒)이지만 아마투어 주원(酒院)의 사절(師節)쯤은 능히 감당할 수 있건만 20年 정진에 겨우 초급으로 이미 몸은 관주(觀酒)의 경(境)에 있으니 돌돌 인생사(人生事) 한(恨)도 많음이여!


술 이야기를 써서 생기는 고료는 술마시기 위한 주전(酒錢)을 삼는 것이 제격이다. 글쓰기보다는 술 마시는 것이 훨씬 쉽고 글 쓰는 재미보다도 술 마시는 재미가 더 깊은 것을 깨달은 사람은 글이고 무엇이고 만사휴의(萬事休矣)다.


술 좋아하는 사람 쳐놓고 악인이 없다는 것은 그만치 술꾼이란 만사에 악착같이 달라붙지 않고 흔들거리기 때문이요, 그 때문에 모든 일에 야무지지 못하다. 음주유단(飮酒有段)! 고단(高段)도 많지만 학주(學酒)의 경(境)이 최고경지(最高境地)라고 보는 나의 졸견(拙見)은 내가 아직 세속의 망념을 다 씻어 버리지 못한 탓이다. 주도(酒道)의 정견(正見)에서 보면 공리론적(功利論的) 경향이라 하리라, 천하의 호주(好酒) 동호자(同好者) 제씨의 의견은 약하(若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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