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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강의 (22)-(23)
11/11/2012 09:11 댓글(0)   |  추천(0)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강의 (22)


사상(四相), 혹은 인간의 '우상'의 콩깍지


어쩌나, 다들 눈에 두터운 콩깍지가 씌었으니


속 담에 “제 눈에 안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별로 매력도 없는 사람을 멀쩡한(?) 사람이 죽자고 쫓아다니지요. 이런 사람을 두고,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고 말하는데, 이 표현은 불교적 진실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자기 나름의 안목을 통해’ 특정한 대상에게서 ‘아름다움’을 확인합니다. 그것은 객관적이고 투명한 시선이라기보다, 매우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이미지에 홀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어에도 같은 통찰이 있지요. “아름다움은 바라보는 사람의 눈 속에 있다(Beauty lies in the eye of beholder).”


무주위체(無住爲體)


주 관적 안목이 그 사람의 토대(住)입니다. <금강경>은 이 토대를 경계하라고 되풀이 되풀이 타이르고 있습니다. 혜능도 <금강경 구결>의 서문 첫머리에서 “무주위체(無住爲體)”라고 했습니다. 번역하자면, 즉 “네 토대를 허무는 것이 불도의 관건”이란 선언입니다.


자 아의 토대(住)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는 앞에서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세 필드에 열여덟 요소가 있습니다. 감각과 인식의 ‘기관’, ‘대상’, ‘내용’이 그것인데, 불교는 이들을 각각 육근(六根), 육진(六塵), 육식(六識), 그리고 이들을 뭉뚱그려 18계(界)라 부릅니다. 사물이나 사건의 자극에 의해 감각 기관은 이를 수용하고 또 거기 감정적 의지적으로 반응합니다. 이것이 반복되고 패턴화 되면서 견해(見解)라 부르는 편견이 형성됩니다. 성격 혹은 인격은 이 과정을 통한 강화의 결과인데, 이 자아는 다시 외계에 대한 자극을 선택하고, 거기 반응하는 양상을 결정합니다. 각자는 이렇게 만들어진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불교는 상(相)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이 상이 만든 마음속의 흔적과 찌꺼기를 업(業)이라고 합니다.


상 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앞에서 이성계와 무학의 사례를 들면서,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인다.”고 했습니다. 돼지 눈, 부처님 눈이 상의 주관적 ‘동인’이라면, 그 눈에 보이는 돼지와 부처님은 그 상관물로서의 ‘이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서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임제(臨濟)는 이 둘을 인(人)과 경(境)의 연관 도식으로 진실을 밝히고자 한 적이 있고, <대승기신론> 또한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의 상호 의존과 동시 성립을 말하고 있다는 것만 우선 귀띔해 둡니다.


물고기 집, 지옥의 고름, 천상의 감로수


우 리가 보는 세계는 자아의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관심과 시선이 다르다면 세계는 전혀 다르게 보이겠지요. <법화경>은 이런 예를 들고 있습니다. “여기 물이 있다. 이 물은 모든 사람에게, 나아가 모든 지각 있는 생명체에게 꼭 같이 보일 것인가. 아니다. 물고기에게는 ‘집’으로 보일 것이고, 지옥에서는 ‘고름’으로 보일 것이며, 천상에서는 ‘감로수’로 보일 것이다.” 물은 목마른 사람에게는 마실 것으로 보이겠지만, 화학자에게는 ‘H2O’로 보일 것이고, 경제학자에게는 공짜라는 뜻에서 ‘비경제재’의 이름을 붙일 것입니다.


우 리는 각자 ‘환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환상의 콩깍지는 사랑에 빠진 연인들 사이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빠져 있는 공통의 늪입니다. 우리는 늘 돈이 되는지만 살피고, 제가 좋아하는 것만 쫓아다니며, 저 유리한 대로 세상을 해석하며, 그밖에 관심이 없는 것은 돌아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 속의 ‘우상’에 따라 사물을 바라봅니다. 이 문제를 본격 다루고 있는 사람이 철학자 베이컨입니다. 그는 인간에게 있는 우상을 네 가지로 들었습니다.


베이컨의 네 가지 우상


가 장 알기 쉬운 것이 1) 동굴의 우상(the idol of cave)입니다. 인간은 자기 가 만든 주관적 환상의 세계 속에 갇혀 산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자신의 기호나 관점이 보편적이고 건강하며 합리적이고 전체적이라는 무의식적 착각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자기가 옳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동굴에 빛이 들어오지 않는 중증인 경우가 많지요. 기이한 것은 다른 사람 속에서 이 특징을 발견하기는 쉬운데 자신에게서 그것을 깨닫기는 어렵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늘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다 음은 2) 종족의 우상(the idol of tribe)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차원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인간’이기 때문에, 그 공통된 생물학적 특성으로 하여 갖게 된 우상을 가리킵니다. 지금 말한 대로, 세계가 인간이 보는 대로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도 여기서 생겼습니다. 이 점은 알기 어렵습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환경이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턱없는 인류의 오만도 그런 예에 속합니다.


세 번째는 3) 시장의 우상(the idol of market)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쓰는 언어가 대상과 일치할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언어는 우리가 ‘사실’에서 읽은 ‘이미지’에 붙인 ‘이름표’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언어는 실재를 드러내기보다 감추며, 비추기보다 왜곡시킵니다. 불교는 이 측면을 극단적으로 몰고 갑니다. 그래서 언어에 대한 불신과 위험을 선명히 드러냅니다. 어떤 불교학자는 불교의 이 같은 인식을 언어혐오증(lingua-phobia)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이 세상을 혼란시키고 비참을 증폭시키는 원흉인데, 그 첨병이 바로 언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아는 집단적 개인적 우상들 타파하는 노력


마 지막으로 4) 극장의 우상(the idol of theater)이 있습니다. 이것은 타자의 권위를 승인하는 맹목성을 가리킵니다. 아마도, 극장 무대에 왕이나 제사장이 홀을 들고 오가는 장면에서 연상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재래의 문화적 습관이나 전통에 의해 대상에 대한 일정한 태도와 가치관념을 주입받습니다. 이 훈육은 아주 어릴 때부터 이루어집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와 교사의 가치관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곧 제재가 따르고 충실히 지키면 적절한 보상을 받는데, 이런 과정을 거치며 그는 한 사회의 이념을 자신 속에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그의 ‘세계’의 집단적 토대가 됩니다. 그 집단 속의 개인은 이 기반에서 너무 멀리 떨어질 수 없습니다. 개성에는 분명한 한계가 주어집니다.


이 우상은 집단과 종족의 오랜 지혜의 소산이지만, 그것을 진리라고 고집해서는 안 되지요. 그랬다간 다른 문화와 문명과의 충돌과 갈등을 피할 수 없습니다. 베이컨은 개인이나 그가 속한 집단의 가치관, 문화, 이념, 종교를 배타적으로 고집하는 것을 극장의 우상이라고 불렀습니다.


불 교는 이 모든 종류의 ‘우상’을 깨뜨리고 걷어내도록 권합니다. 이들이 똬리 틀고 있는 한, 우리는 차가운 <사실>과 만날 수 없고,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영원의 고요와 평안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우리가 주관적 환상과 우상에 고착되어 있다면, 타자를 용인할 수 없고, 그것은 치유할 수 없는 갈등과 혼란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강의 (23)


소승 아비달마의 지혜, 오온(五蘊)


라 쇼오몽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앞의 살인 사건 현장의 세 주인공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 역시 자신의 ‘관심’에 따라 사태를 왜곡하고, 사람을 의심하면서 그것을 객관이며 진실이라고 믿으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왜곡과 의심은 뿌리 깊습니다. 어떤 점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이 환망(幻妄)의 오염을 피할 수 없기에, 무시이래의 근본무명(根本無明)이라고 부릅니다.


세계에 개입하는 자아의 활동을 줄여야


이 말을 듣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아하, 그렇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인간의 근본 진실과 불교의 핵심적 가르침을 반 너머 캐치한 것입니다. “나는 그동안 모든 것을 내 식으로 판단해왔다. 그 바탕에는 나의 존재를 보존 확장시키려는 무의식적 동기가 깊이 작용한 듯하다. 이제부터 나도 모르게 밴 나의 편견과 습관, 관심과 이해관계 등의 개입을 반성하고, 사태를 공적 지평에서, 전체의 관점에서 읽는 훈련을 해 나가야겠다.” 이렇게 작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붓다의 제자입니다.


그 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분명합니다. 세계에 개입하는 자아의 활동을 제어하고 통제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바깥의 영향력을 줄이고, 내적 자유의 폭을 확대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전통적으로 팔정도(八正道)로 알려져 있고, 또는 이를 계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으로 정돈하기도 합니다.


여 기서는 그 각각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혜’에 대해서만 논의하기로 합니다. 불교의 ‘지혜’는 가령 노장이나 유교의 그것과는 매우 다르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각 전통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 성격(problematic)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불 교의 경우, 계율이나 선정이 지혜의 바탕이기는 하나, 지혜가 없이는 바라밀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 점을 소승의 아비달마, 그리고 대승의 반야중관은 한 목소리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는 분명한 연계가 있습니다. 콘즈는 그래서 아비달마를 ‘옛 지혜학파(Old Wisdom School)’, 반야중관을 ‘새 지혜학파(New Wisdom School)’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아비달마의 오래된 지혜


소 승 아비달마의 지혜부터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아비달마는 “나의 것, 나에게 속한 것”이라는 ‘소유’의 환상부터 깨기 시작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속한다’가 객관 세계의 자연스런 속성이라고 했습니다만, 불교는 이런 말에 터무니없어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닭이나 소는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지요. 그리고 국가를 지배하는 군주가 있다고 해서, 우주를 지배하는 특정한 인격이 꼭 있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스피노자는 만일 삼각형이 생각할 줄 안다면, 그는 틀림없이 신을 삼각형으로 그릴 것이라고 시니컬하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소 유’는 세계 자체가 가진 속성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밀어붙인 강제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강제로 하여 본래 평화롭던 세계의 평화와 질서가 위협받고 깨어졌습니다. 이 오래된 습성을 고쳐야만 본래의 고요, 즉 열반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그 런데 우리가 쓰는 문장들은 전부 다 ‘소유’의 양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술부는 주부를 수식하거나 한정하는 것으로 모두 소유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비달마는 ‘나’로 시작되는 문장과 어법들을 오류투성이의 작문으로 단정하고, 그것들을 ‘나’를 뺀, 순수 객관적 서술로 바꾸어 나갑니다! 이 전략은 나(我)의 개입이나 오염이 배제된, 순수 객관적 사태들, 즉 제법(諸法)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우리는 가령, “나는 오늘 그토록 사랑하는 그녀를 떠나보냈다”는 문장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아비달마는 이것을 매우 부정확하고, 들뜬 문장이라고 생각하여, 이렇게 고쳐줍니다.


1) 두 ‘물체(色)’가 있다. 그리고 2) 사랑한다는 감정과 슬프고 아쉬운 ‘감정(受)’이 있다. 3) 눈물을 흘리는 한 물체가 다른 손 흔드는 물체를 ‘지각(想)’한다. 4) 떠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싶은 ‘충동(行)’이 있다.” 5) 이 사건을 <의식(識)>하는 과정이 있다.


아비달마, 사태를 객관적으로 적어나가는 기술


이렇게 아비달마는 자아에 의해 오염된 인식을 정화하여 객관적 사실만으로 분해 정리해 나갑니다. 앞의 글에서는 그 객관적 사실 가운데 ‘다섯 무더기’, 즉 오온(五蘊)만을 보여주었습니다.


아 비달마는 모든 주관적 ‘판단’과 ‘상념’들을 이렇게 객관적으로 분석해나가는 훈련을 시킵니다. 그건 흡사 ‘나’를 ‘타자’처럼 말하고 적는 기술(技術)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을 보고 웃는 사람도 있고, 참 드라이하다고 느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 보았자, 내 가슴의 아픈 상처가 어디 가냐고 비관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렇지만 분명 효과가 있습니다. 각자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픈 상처는 문득, 시간이 흘러,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떠나보낼 때는 눈물이 강을 이루다가도, 곧 죽을 것 같다가도, 시간이 가면, 그 무모한 정열이 우스워 보이기도 합니다.


아 비달마의 분석은 적어도 그 치유의 시간을 단축시키고, 실의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이 훈련이 깊이지면, 회복의 시간은 점점 짧아지다가, 나중에는 사태가 생김과 동시에 즉각적으로 해방을 얻습니다. 아비달마의 이 오래된 분석은 <무아(無我)>를 각인시키고, 그것을 삶 속에서 구현하기 위한 ‘지혜’의 방편입니다.


이 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문제를 ‘자기 밖에 두는’ 훈련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사물의 점착성으로부터, 그리고 자아의 과도한 준동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내적 평화와 유대를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실제 우리가 고민하고 안타까와하는 문제들의 상당 부분은 내 손을 떠나 있거나, 사소한 문제들이기 십상이지요. 문제의 7할은 쓸데없는 걱정이고, 나머지 2할은 내 손을 떠나 있고, 직접 핸들할 수 있는 일은 채 1할이 안된다지 않습니까. 거기 집중해서 할 바를 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기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잘 안 된다고요. 실제 고승들은 어떤 일의 충격이 잔류하는 기간이 아주 짧고 후유증은 거의 증폭이 안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 훈련이 효과가 있음을 증거하는 실례가 아니겠습니까.


처칠의 독백


어 떤 문제에 부닥칠 때, 자아의 과도한 개입이 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빤히 보이는 적절한 길을 놓치고 사태를 걷잡을 수 없는 불행으로 몰아넣는 경우가 어디 한 두 번입니까. 특히나 정치를 맡은 사람들, 무겁고 중대한 결정을 책임진 사람들에게 있어, 이같은 ‘자기 비우기’는 결정적인 덕목입니다. 처칠은 <폭풍의 한가운데>에서 아일랜드와의 조약을 마무리한 다음,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적 과의 투쟁은 끝이 났다. 이제 남아있는 문제는 자신과의 투쟁뿐이다. 그러나 자신과의 투쟁만큼 어려운 싸움도 없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역사는 때때로 엄청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이 바로 눈앞에 열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훨씬 나아 보이는 해결책은 그대로 내버려둔 채 그토록 느린 속도로 수많은 좌절을 겪어 가면서 한 걸음 한 걸음 힘들게 전진해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그는 “국가에 최선이라고 믿는 바를 위해서는 자신이 신봉하던 원칙까지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못을 박습니다.


이 충고를 남 위에 선자, 특히 정치하는 자들은 가슴 깊이, 언제나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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