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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여정(山村餘情)
05/22/2012 16:05 댓글(0)   |  추천(1)

산촌여정(山村餘情)



이상은 다방 ‘제비’, 카페 ‘학’, 다방 ‘69’ 등의 경영에 연이어 실패하고, 금홍에 이어 두 번째로 사귄 순옥이 친구와 결혼하자 서울을 탈출, 무작정 가서 머무른 곳이 바로 평안남도 ‘성천’이다. 여기에서 그는 한국문학사상 가장 빛나는 수필 ‘산촌여정’을 쓰게 되었다. 



'산촌여정‘에 대한 이어령 교수의 평가


구호와 같은 관념적인 한국의 산문에 처음으로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불어넣은 사람, 감성과 이성이 한데 어울린 은유의 축제를 통해서 생각하는 즐거움과 느끼는 쾌감을 동시에 창조해 준 사람, 그리고 뱀같이 땅바닥에 붙어 다니는 우둔한 산문을 코브라처럼 머리를 치켜세우게 하고 음악에 맞춰 춤추게 한 사람 - 그것이 바로 이상(李箱)이다.


그리고 그의 시, 소설 그리고 수필을 모두 통합해 놓은 글이 그의 ‘산촌여정(山村餘情)’이다. 실제로 ‘산촌여정’은 시와 일기와 편지글로 되어 있어 마치 그의 글 솜씨를 총체적으로 보여 준 전시장이라 할 수 있다. 글의 양식만이 아니라 글의 내용에 있어서도 도시적 체험과 전원의 자연 체험이 통합적으로 담겨져 있다. 그래서 ‘도시와 자연’, ‘근대와 전통’을 이종배합(異種配合)‘시킨 포스트모던적인 감각마저 느끼게 된다.


청둥호박이 열린 것을 보면서 한식날 호박꼬자리의 무시루떡 냄새를 맡고 좇아오는 증조할아버지의 시골뜨기 망령과, 럭비공을 받고 뛰는 젊은 용사의 굵직한 팔뚝을 동시에 연상하는 특이한 은유들이다. 모든 비유가 그와 똑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그 자신이 성천의 자연을 묘사한 그 글을 더블렌즈의 카메라로 촬영한 스틸이며 영사(映寫)라고 말하고 있다.


이 글은 묘사문이면서도 그 전체의 구성이 밤에서 시작하여 다음 날 밤으로 끝나는 원형의 서사 구조로 되어 있다. 시작과 끝이 없이 순환하고 있는 비선형적인 글이라는 것도 그의 유니크한 구성력이다. 외래어와 토착어의 자연스러운 배합, 장식이 아니라 이질적인 것을 통합하는 기능적인 비유, 그리고 문장을 꿰매 가는 구성력이 모두 남이 모방할 수 없는 섬세한 감성과 풍부한 상상력에 의해서 표상된다.


한마디로 ‘산촌여정’은 20세기 한국의 수많은 묘사 가운데 가장 높은 마루를 차지하고 있는 명문 중의 명문이라고 할 것이다.




산촌여정 / 이상


1.


향기로운 MJB의 미각을 잊어버린 지도 이십여 일이나 됩니다. 이곳에는 신문도 잘 안 오고 체신부는 이따금 ‘하도롱(연두)’ 빛 소식을 가져옵니다. 거기는 누에고치와 옥수수의 사연이 적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사는 일가 때문에 수심이 생겼나 봅니다. 나도 도회에 남기고 온 일이 걱정이 됩니다.


건너편 팔봉산에는 노루와 멧돼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우제 지내던 개골창까지 내려와서 가재를 잡아먹는 곰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동물원에서 밖에 볼 수 없는 짐승, 산에 있는 짐승들을 동물원에 갖다 가둔 것이 아니라, 동물원에 있는 짐승들을 이런 산에다 내어 놓아준 것만 같은 착각을 자꾸만 느낍니다. 밤이 되면, 달도 없는 그믐칠야에 팔봉산도 사람이 침소로 들어가듯이 어둠 속으로 아주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공기는 수정처럼 맑아서 별빛 만으로라도 넉넉히 좋아하는 ‘누가복음’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참 별이 도회에서보다 갑절이나 더 많이 나옵니다. 하도 조용한 것이 처음으로 별들의 운행하는 기척이 들리는 것도 같습니다.


객주집 방에는 석유등잔을 켜 놓습니다. 그 도회지의 석간과 같은 그윽한 내음새가 소년시대의 꿈을 부릅니다. 정형! 그런 석유등잔 밑에서 밤이 이슥하도록 ‘호까(연초갑지)’ 붙이던 생각이 납니다. 베짱이가 한 마리 등잔에 올라앉더니 그 연두 빛 색채로 혼곤한 내 꿈에 마치 영어 ‘티’자를 쓰고 건너긋듯이 유다른 기억에다는 군데군데 ‘언더라인’을 하여 놓습니다. 슬퍼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도회의 여차장이 차표 찍는 소리 같은 그 성악을 가만히 듣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또 이발소 가위 소리와도 같아집니다. 나는 눈까지 감고 가만히 또 자세히 들어봅니다. 그리고 비망록을 꺼내어 머루 빛 잉크로 산촌의 시정을 기초합니다.


그저깨신문을찢어버린

때묻은흰나비

봉선화는아름다운애인의귀처럼생기고

귀에보이는지난날의기사


얼마 있으면 목이 마릅니다. 자리물 - 심해처럼 가라앉은 냉수를 마십니다. 석영질 광석 내음새가 나면서 폐부에 한난계 같은 길을 느낍니다. 나는 백지 위에 싸늘한 곡선을 그리라면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청석(靑石) 얹은 지붕에 별빛이 나려쪼이면 한겨울에 장독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납니다. 벌레 소리가 요란합니다. 가을이 이런 시간에 엽서 한 장에 적을 만큼씩 오는 까닭입니다. 이런 때 참 무슨 재주로 광음을 헤아리겠습니까? 맥박소리가 이 방안을 방채 시계로 만들어버리고 장침과 단침의 나사못이 돌아가느라고 양쪽 눈이 번갈아 간질간질합니다. 코로 기계기름 내음새가 드나듭니다. 석유등잔 밑에서 졸음이 오는 기분입니다.


‘파라마운트’회사 상표처럼 생긴 도회 소녀가 나오는 꿈을 조금 꿉니다. 그러다가 어느 사이에 도회에 남겨 두고 온 가난한 식구들을 꿈에 봅니다. 그들은 포로들의 사진처럼 나란히 늘어섭니다. 그리고 내게 걱정을 시킵니다. 그러면 그만 잠이 깨어 버립니다. 죽어 버릴까 그런 생각을 하여 봅니다. 벽 못에 걸린 다 해어진 내 저고리를 쳐다봅니다. 서도천리를 나를 따라 여기 와 있습니다 그려!


2.


등잔 심지를 돋우고 불을 켠 다음 비망록에 철필로 군청 빛 ‘모’를 심어갑니다. 불행한 인구가 그 위에 하나하나 탄생합니다. 조밀한 인구가 - .


내일은 진종일 화초만 보고 탈지면에다 ‘알콜’을 묻혀서 온갖 근심을 문지르리라, 이런 생각을 먹습니다. 너무나 꿈자리가 뒤숭숭하여서 그러는 것입니다. 화초가 피어 만발하는 꿈, ‘그라비아’ 원색판 꿈, 그림책을 보듯이 즐겁게 꿈을 꾸고 싶습니다. 그러면 간단한 설명을 위하여 상쾌한 시를 지어서 7포인트 활자로 배치하는 것도 좋습니다.


도회에 화려한 고향이 있습니다. 활엽수만으로 된 산이 고향의 시각을 가려 버린 이 산촌에 팔봉산 허리를 넘는 철골전신주가 소식의 제목만을 부호로 전하는 것 같습니다.


아침에 볕에 시달려서 마당이 부스럭거리면 그 소리에 잠을 깨입니다. 하루라는 ‘짐’이 마당에 가득한 가운데 새빨간 잠자리가 병균처럼 활동합니다. 끄지 않고 잔 석유등잔에 불이 그저 켜진 채 소실된 밤의 흔적이 낡은 조끼 단추처럼 남아 있습니다. 작야(昨夜)를 방문할 수 있는 요비링입니다. 지난밤의 체온을 방 안에 내어 던진 채 마당에 나서면 마당 한 모퉁이에는 화단이 있습니다. 불타오르는 듯한 맨드라미꽃, 그리고 봉선화.


지하에서 빨아올리는 이 화초들의 정열에 호흡이 더워오는 것 같습니다. 여기 처녀 손톱 끝에 물들을 봉선화 중에는 흰 것도 섞였습니다. 흰 봉선화도 붉게 물들까 - 조금도 이상스러울 것 없이 흰 봉선화는 꼭두서니 빛으로 곱게 물듭니다.


수수깡 울타리에 오렌지 빛 여주가 열렸습니다. 당콩넝쿨과 어우러져서 세피아 빛을 배경으로 하는 일폭의 병풍입니다. 이 끝으로는 호박넝쿨 그 소박하면서도 대담한 호박꽃에 스파르타 식 꿀벌이 한 마리 앉아 있습니다. 농황색에 반영되어 ‘세실.B.데밀’의 영화처럼 화려하며 황금색으로 치사(侈奢)합니다. 귀를 기울이면 ‘르네상스’ 응접실에서 들리는 선풍기 소리가 납니다.


야채 사라다에 놓이는 아스파라거스 입사귀 같은 또 무슨 화초가 있습니다. 객주집 아해에게 물어봅니다. 기상꽃, 기생화란 말입니다. 무슨 꽃이 피나, 진홍 비단꽃이 핀답니다. 선조가 지정하지 아니한 조셋트 치마에 웨스트민스터 궐련(卷煙)권연을 감아놓은 것 같은 도회의 기생의 아름다움을 연상하여 봅니다. 박하보다도 훈훈한 리그레추잉껌 내음새, 두꺼운 장부를 넘기는 듯한 입맛 다시는 소리, 그러나 아마 여기 필 기생꽃은 분명히 혜원 그림에서 보는 것 같은, 혹은 우리가 소년시대에 보던 떨떨이 인력거에서 홍일산(紅日傘) 받은 지금은 지난날의 삽화인 기생일 것 같습니다.


청둥호박이 열렸습니다. 호박꼬자리에 무시루떡, 그 훅훅 끼치는 구수한 김에 좇아서 증조할아버지의 시골뜨기 망령들은 정원초하룻날, 한식날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 국가 백년의 기반을 생각게 하는 넓적하고도 묵직한 안정감과 침착한 색채는 ‘럭비’구를 안고 뛰는 이 ‘제너레이션’의 젊은 용사의 굵직한 팔뚝을 기다리는 것도 같습니다.


유자가 익으면 껍질이 벌어지면서 속이 삐쳐 나온답니다. 하나를 따서 실 끝에 매어서 방에다가 걸어둡니다. 물방울져 떨어지는 풍염(豊艶)한 미각 밑에서 연필같이 수척하여가는 이 몸에 조금씩 조금씩 살이 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야채도 과실도 아닌 ‘유모러스’한 용적에 향기가 없습니다. 다만 세수비누에 한 겹씩 한 겹씩 해소되는 내 도회의 육향(肉香)이 방 안에 배회할 뿐입니다.


3.


팔봉산 올라가는 초경(草徑) 입구 모퉁이에 최XX 송덕비와 또 XXX 아무개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항공우편 ‘포스터’처럼 서 있습니다. 듣자니 그들은 다 아직도 생존하여 계시다 합니다. 우습지 않습니까.


교회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역을 수만리 떨어져 있는 이 마을의 농민들까지도 사랑하는 신 앞에서 회개하고 싶었습니다. 발길이 찬송가소리 나는 곳으로 갑니다. 포플러나무 밑에 염소 한 마리를 매어 놓았습니다. 구식으로 수염이 났습니다. 나는 그 앞에 가서 그 총명한 동공을 들여다봅니다. ‘세루로이드’로 만든 정교한 구슬을 ‘오브라드’로 싼 것 같이 맑고 투명하고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 도색(桃色) 눈자위가 움직이면서 내 삼정(三停)과 오악(五岳)이 고르지 못한 빈상(貧相)을 업수여기는 중입니다.


옥수수 밭은 일대 관병식(觀兵式)입니다. 바람이 불면 갑주(甲冑) 부딪치는 소리가 우수수 납니다. 카마인 빛 꼬꼬마(실 끝에 종이오리나 새털을 붙여 날리는 어린이 장난감)가 뒤로 휘면서 너울거립니다. 팔봉산에서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장엄한 예포소리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곁에서 소조(小鳥)의 간을 떨어뜨린 공기총 소리였습니다. 그러면 옥수수 밭에서 백, 황, 흑, 회, 또 백, 가지각색의 개가 퍽 여러 마리 열을 지어서 걸어 나옵니다. 센슈얼 한 계절의 흥분이 이 ‘코작’ 관병식을 한층 더 화려하게 합니다.


산삼이 풀어져 흐르는 시내 징검다리 위에는 백채(白菜) 씻은 자취가 있습니다. 풋김치의 청신한 미각이 안약 ‘스마일’을 연상시킵니다. 나는 그 화성암으로 반들반들한 징검다리 위에 삐뚜러진 N자로 쪼그리고 앉았노라면 시야에 물동이를 이고 주저하는 두 젊은 새악씨가 있습니다. 나는 미안해서 일어나기는 났으면서도 일부러 마주 보면서 그리로 걸어갑니다. 스칩니다. ‘하도롱’ 빛 피부에서 푸성귀 내음새가 납니다. ‘코코아’ 빛 입술은 머루와 다래로 젖었습니다. 나를 아니 보는 동공에는 정제된 창공이 ‘간스메(통조림)’가 되어 있습니다.


M백화점 ‘미소노’ 화장품 ‘스위트 걸’이 신은 양말은 이 새악씨들의 피부색과 똑같은 소맥 빛이었습니다. 빼뜨름이 붙인 초유선형 모자, 고양이 배에 ‘화스너(지퍼)’를 장치한 가붓한 핸드백, 이렇게 도회의 참신하다는 여성들을 연상하여 봅니다. 그리고 새벽 아스팔트를 구르는 창백한 공장 소녀들의 회충과 같은 손가락을 연상하여 봅니다. 그 온갖 계급의 도회 여인들, 연약한 피부 위에는 그네들의 빈부를 묻지 않고 온갖 육중한 지문을 느끼지 않습니까.


4.


그러나 가난하나마 무명같이 튼튼한 피부 위에 오점이 없고 추잉검, 초콜릿 대신에 응어리는 빼어먹고 달짝지근한 꼬아리를 불며 숭굴숭굴한 이 시골 새악씨들을 더 나는 끔찍이 알고 싶습니다. 축복하여 주고 싶습니다. 교회는 보이지 않습니다. 도회인의 교활한 시선이 수줍어서 수풀 사이로 숨어버리고 종소리의 여운만이 근처에 내음새처럼 남아서 배회하고 있습니다. 혹 그것은 안식을 잃은 내 영혼이 들은 바 환청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조밭 한복판에 높은 뽕나무가 있습니다. 뽕 따는 새악씨가 전공부(電工夫)처럼 높이 나무 위에 올랐습니다. 순백의 가장 탐스러운 과실이 열렸습니다. 둘이서는 나무에 오르고 하나이 나무 밑에서 다랭이를 채우고 있습니다. 한두 잎만 따도 다랭이가 철철 넘는 민요의 무대면(舞臺面)입니다.


조 이삭은 다 말라 죽었습니다. 콜크처럼 가벼운 이삭이 근심스럽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오, 비야 좀 오려무나. 해면처럼 물을 빨아들이고 싶어 죽겠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금한 듯이 구름이 없고 푸르고 맑고, 또 부숭부숭하니 깊지 못한 뿌리의 SOS가 암반 아래를 흐르는 지하수에 다다르겠습니다.


두 소년이 고무신을 벗어들고 시냇물에 발을 잠가 고기를 잡습니다. 지상의 원한이 스며 흐르는 정맥, 그 불길하고 독한 물에 어떤 어족이 살고 있는지, 시내는 대지의 신열을 뚫고 벌판이 기울어진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을의 풍설(風說)입니다.


가을이 올 터인데 와도 좋으냐고 쏘근쏘근 하지 않습니까. 조 이삭이 초례청 신부가 절할 때 나는 소리같이 부수수 구깁니다. 노회(老獪)한 바람이 조 잎새에게 난숙(爛熟)을 최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의 마음은 푸르고 초조하고 어립니다. 조밭을 어지러뜨린 자는 누구냐, 기왕 안 될 조여든, 그런 마음으로 그랬나요 몹시 어지러뜨려 놓았습니다.


누에, 호호에 누에가 있습니다. 조이삭보다도 굵직한 누에가 삽시간에 뽕잎을 먹습니다. 이 건강한 미각은 왕후와 같이 지존스러우며 치사(侈奢)스럽습니다. 새악시들은 뽕심부름하는 것으로 몸의 마지막 영광을 삼습니다. 그러나 뽕이 떨어졌습니다. 온갖 폐백이 동이 난 것과 같이 새악시들의 정열은 허둥지둥하는 것입니다.


야음을 타서 새악시들은 경장으로 나섭니다. 얼굴의 홍조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뽕나무에 우승배가 놓여 있습니다. 그리로만 가면 되는 것입니다. 조밭을 짓밟습니다. 자외선에 맛있게 끄실린 새악시들의 발이 그대로 조이삭을 무찌르고 스크럼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에 닿을 지성이 천고마비 잠실 안에 있는 성스러운 귀족 가축들을 살찌게 하는 것입니다. 콜렛트의 빈묘(牝猫)를 생각게 하는 말캉말캉한 로맨스입니다.


5.


간이학교 곁집 길가에서 들여다보이는 방에 틀이 떠돌고 있습니다. 편발 처자가 맨발로 기계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계는 허리를 스치는 가느다란 실이 간지럽다는 듯이 깔깔깔깔 대소하는 것입니다. 웃으며 지근대이며 명산 XX명주가 짜여 나오니 열댓 자 수건이 성묘 갈 때 입을 때때를 만들고, 시집살이 설음을 씻어주고, 또 꿈과 꿈을 말소하는 쓰레받기도 되고, 이렇게 실없는 내 환희입니다.


담배가게 곁방 안에는 오늘 황혼을 미리 가져다 놓았습니다. 침침한 몇 갤런의 공기 속에 생생한 침엽수가 울창합니다. 황혼에만 사는 이민 같은 이국초목에는 순백의 갸름한 열매가 무수히 열렸습니다. 고치, 귀화한 마리아들이 최신지혜의 과실을 단려(端麗)한 맵시로 따고 있습니다. 그 아들의 최후를 슬퍼하며 크리스마스 트리를 헐어 들어가는 피에타(Pieta) 화폭 전도(全圖)입니다.


학교 마당에는 코스모스가 피어있고 생도들은 글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간단한 산술을 놓아 그들의 정직과 순박을 지혜와 교활로 환산하고 있습니다. 탄식할 이식산(利息算: 이자 계산)이 아니겠습니까? 족보를 찢어버린 것과 같은 흰나비가 두어 마리 백묵 내음새 나는 화단 위에서 번복(飜覆)이 무상합니다. 또 연식 테니스공의 마개 뽑는 소리가 음향의 흔적이 되어서는 등고선의 각점 모양으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마당에서 오늘 밤에 금융조합 선전 활동사진회가 열립니다. 활동사진? 세기의 총아, 온갖 예술 위에 군림하는 제8예술의 승리. 그 고답적이고도 탕아적인 매력을 무엇에다 비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활동사진에 대하여 한낱 동화적인 꿈을 가진 채 있습니다. 그림이 움직일 수 있는 이것은 참 홍모(紅毛) 오랑캐의 요술을 배워가지고 온 것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동포의 부러운 재간입니다.


활동사진을 보고 난 다음에 맛보는 담백한 허무, 장주(壯周)의 호접몽(胡蝶夢)이 이러하였을 것입니다. 나의 동글납짝한 머리가 그대로 카메라가 되어 피곤한 더블렌즈로나마 몇 번이나 이 옥수수 무르익어가는 초추(初秋)의 정경을 촬영하였으며 영사하였는가, 플래시백으로 흐르는 엷은 애수, 도회에 남아있는 몇 고독한 팬에게 보내는 단장(斷腸)의 스틸이외다.


6.


밤이 되었습니다. 초열흘 가까운 달이 초저녁이 조금 지나면 나옵니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전설 같은 시민이 모여듭니다. 축음기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북극 펭귄 새들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짧고도 기다란 인생을 적어 내려갈 편전지(便箋紙: 편지지), 스크린이 박모(薄暮: 땅거미) 속에서 바이어그래피(Biography)의 예비표정입니다. 내가 있는 건너편 객주집에 든 도회풍 여인도 왔나봅니다. 사투리의 합창이 마당 안에서 들립니다.


시작입니다. 부산 잔교(棧橋)가 나타납니다. 평양 모란봉입니다. 압록강 철교가 역사적으로 돌아갑니다. 박수와 갈채, 태서(泰西: 서양)의 명감독이 바야흐로 안색이 없습니다. 십분 휴식시간에 조합 이사의 통역부(통역이 딸린) 연설이 있었습니다.


달은 구름 속에 있습니다. 금연이라는 느낌이라는 느낌입니다. 연설하는 이사 얼굴에 전등의 스포트(Spotlight)도 비쳤습니다. 산천초목이 다 경동할 일입니다. 전등, 이곳 촌민들은 XX행 자동차 헤드라이트 외에 전등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 눈이 부시게 밝은 광선 속에서 창백한 이사는 강단(降壇)하였습니다. 우매한 백성들은 이 이사의 웅변에 한 사람도 박수치지 않았습니다. 물론 나도 그 우매한 백성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밤 열한시나 지나서 영화감상의 밤은 해피엔드였습니다. 조합원들과 영사기사는 이 촌 유일의 음식점에서 위로회를 열었습니다. 나는 객사로 돌아와서 죽어가는 등잔심지를 돋우고 독서를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웃방에 묵고 계신 노신사께서 내 나타(懶惰: 게으름)와 우울을 훈게하는 뜻으로 빌려주신 고우다 로한(辛田露伴) 박사의 지은 바 ‘人의 道’라는 진서(珍書: 귀중한 책)입니다. 개가 멀리서 끊일 사이 없이 이어 짖어댑니다. 그윽한 하이칼라 방향(芳香)을 못 잊어 군중은 아직도 헤어지지 않았나 봅니다.


구름이 걷히고 달이 나왔습니다. 벌레가 무도회의 창문을 열어놓은 것처럼 와작 요란스럽습니다. 알지 못하는 노방(路傍: 길가)의 사람을 사색하는 도회인적인 향수가 있습니다. 신간잡지의 표지와 같이 신선한 여인들, 넥타이와 동갑인 신사들, 그리고 창백한 여러 동무들, 나를 기다리지 않는 고향, 도회에 내 자체의 말씀을 번안하여 보내주고 싶습니다. 성경을 채자(採字)하다가 엎질러 버린 인쇄직공이 아무렇게나 주워 담은 지리멸렬한 활자의 꿈, 나도 갈갈이 찢어진 사도가 되어서 세 번 아니라 열 번이라도 굶는 가족을 모른다고 그럽니다.


근심이 나를 제한 세상보다 큽니다. 내가 갑문을 열면 폐허가 된 이 육신으로 근심의 조수가 스며들어 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메소이스트 병마개를 아직 뽑지는 않습니다. 근심은 나를 돌며 그러는 동안에 이 육신은 풍마우세(풍마우세: 바람에 닦이고 비에 씻겨나감)로 저절로 다 말라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밤의 슬픈 공기를 원고지 위에 깔고 창백한 동무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 속에는 자신의 부고도 동봉하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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