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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강의 (1)
02/01/2012 17:02 댓글(0)   |  추천(3)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강의 (1) 

불교의 五重 關門에 대하여


불교는 어렵다. 왜 그렇게 어려운가. 다섯 가지가 어렵다.


1. 시각


근본적인 이유는 그 발상과 시각 때문이다. 불교는 상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본다. 그래서 창시자 붓다는 깨달음을 얻고 난 뒤, 법의 바퀴를 굴리기를 망설였고, 선사들 또한 진실의 조갯살을 함부로 열어 보이지 않으려 한다. 불교는 상식과 진리 사이에 아주 깊은 심연을 설정해 놓았다. 상식은 욕망의 세계를 떠나지 않는다.


우리네 속인들은 “삶이란 인간의 욕망을 존중하고 그것을 최대한 만족시키고자 노력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지상의 원리에 비추어보면, 저 편의 언덕을 그리워하는 불교의 가르침은 지극히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불교에 접근하기 어렵고, 그것을 이해하기는 더욱 어렵다.


2. 다양성


산은 산이 아니라 했던가, 세상이 달리 보이게 된 사람들이 불교를 찾는다. 계기는 여럿일 것이다. 지상적 삶이 시시해졌을 수도 있고, 현실의 고통과 부조리에 깊이 좌절했을 수도 있다. 이런저런 계기로 불교에 눈을 돌릴 때, 두 번째 어려움에 직면한다.


불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변화해온 생명체라는 것이 그것이다. 불교는 고타마 붓다 이후 2,500년에 걸쳐 아시아 전역에 걸쳐 발전되어 왔고, 최근에는 서양에까지 그 가르침을 전파시켜 왔다.


처음 인도 북동부 갠지스 강가 반경 200킬로미터 정도에서 출발한 불교는 기원을 전후해서 대승불교로 발전했고, 반야(般若) 유식(唯識) 화엄(華嚴) 천태(天台) 정토(淨土) 선(禪) 등등의 갈래를 낳았다. 인도의 대승은 나중 브라만교와 베단타 철학에 흡수되었고, 법의 등불은 남북으로 갈려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그 안에 한국불교도 있다. 그 위용은 개략을 말하고자 해도 아찔할 정도이다. 이 앞에서 사람들은 묻는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 불교인가.”


3. 언어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경전에 눈을 돌릴 때 세 번째 어려움에 봉착한다. 우선 양에 질린다. 경전만 해도 13세기 팔만대장경이 목판 8만1천장, 20세기 초 일본에서 펴낸 불교전집인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은 천여 페이지짜리 55권에 2000여 작품이 실려 있다. 그리고 이들을 담고 있는 언어의 난해함이 버티고 있다. 이들 작품들은 지금은 쓰이지 않은 한문인데다, 더구나 불교 한문은 중국 고유의 한문과는 용어나 어법, 체제가 전혀 다르다.


거기다 이 번역은 팔리어나 산스크리트의 맥락을 충분히, 그리고 의미를 정확하게 전해주지 못한다. 복잡하고 치밀한 사유를 담고 있을수록 그렇다. 이를테면 유식(唯識)의 교설은 한역(漢譯)으로 읽기가 매우 까다롭고 애매하다. 현장이 굳이 인도로 떠난 것도 그 때문이고, 원효가 중국에 유학하고자 한 것도 그 현장의 신역(新譯)을 통해 불교를 더욱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불교를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팔리어, 산스크리트, 불교한문, 티베트어를 익혀야 하고, 거기에 근대 일본의 방대하고 치밀한 훈고적 성과와 구미의 불교연구까지 습득해야 한다. 세상에, 그러자면 한 생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그 앞에서 누가 아득하고 막막해지지 않겠는가.


4. 경험


혹, 몇 생을 거치며 이들 언어를 습득해 나가면 불교를 알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불교 언어의 사다리를 어렵사리 올라간 사람에게, 이번에는 불교가 여기 있지 않다고 말한다. 경전은 진실의 그림자, 즉 경험을 지시(指示)해 주기는 하나, 정작 그 경험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황벽의 비유를 들자면, 말씀은 “우는 아이 달래는 종이돈”일 뿐, 그것으로는 눈깔사탕 하나 사먹을 수 없다. 지식은 경험으로 확인되어야 생명력을 얻는다. 보지도 않고 믿는 것은 앵무새거나 마군이다. 경험을 떠난 소외된 지식은 도그마가 되고 권력이 되어 나와 남을 망친다. 그 비극은 종교의 역사가 보편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혜능이 <육조단경>과 <금강경 구결>에서 줄기차게 강조하는 것이 있다. “입으로만 경전을 외지 말고 마음으로 믿고, 몸으로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자성(自性)을 직접 보고, 그 금강(金剛)의 반야(般若)로 생사의 바다를 건너 저 너머 영원한 평화와 안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때가 바로 경전을 ‘이해’하는 때이고, 불교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후퇴없이 가지는 때이다. 그때 불교는 구구절절 살아있는 말씀으로 가슴을 울린다. 아니, 우리 자신이 곧 말씀이 된다. 이와 더불어 불교의 지식은 단순하고 간명하게 정돈되어 간다. 복잡성이 줄어들고, 산만한 것이 중심을 얻어 정돈되며, 거기서 깊이가 자라난다.


그렇게 기쁜 나머지 이렇게 말하게 된다. “소문과는 달리, 불교가 그다지 어렵지는 않군!” 그 자신감이 깊어지면, “붓다가 쓸데없이 긴 혀를 늘여 48년간 수고를 했네”라며 콧바람을 뿜기도 한다.


5. 표현


그러나, 아직도 어려움은 남아 있다. 불교는 구경(究竟)이 아니라 방편(方便)이다. 뗏목은 강을 건너는데 쓰지만, 이제 그것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금강경>이 구구절절 토로하듯이 불교를 버리지 않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여기가 불교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이다. 불교를 떠나 자신에게로, 삶 속으로 돌아오기!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우선 불교인 것과 불교 아닌 것이 경계를 허물고 모호해지기 시작한다. 때로 불교 밖의 소식이 더욱 불교적이다. 경허 대사가 일찍이 말했다.


“그 뜻을 얻으면 거리의 잡담도 다 진리의 가르침이요, 말에서 헤매면 용궁의 보배곳간도 한바탕 잠꼬대일 뿐이다(得其志也, 街中閑談 常轉法輪, 失於言也, 龍宮寶藏 一場寐語).”


나는 그래서 불교가 좋다. 비억압과 관용 속에서 불교의 가르침은 더 이상 근엄하거나 딱딱하지 않다. 이와 더불어 수행자는 이제 비로소 불교를, 구체적으로, 자신의 ‘사투리’로 말하기 시작한다. 역사상 뛰어난 선지식들은 바로 그렇게 자신만의 언어를 독창적이고 개성적으로 발휘해 나갔다. 교화는 그렇게 ‘당대의 언어’를 통해 대화하고 소통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요컨대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아직 불교가 아니다. 대신에, “내가 본 진실은 이렇다”라고 말하는 곳에 불교가 있다.


이 첩첩 난관 가운데 어느 것 하나 만만하지 않다. 돌아갈 길도 없고, 지름길도 없다. 불교를 살리려면 이 중중(重重)의 관문들을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 이들 관문들은 서로 서로 물려 있기에 어느 하나에만 집중할 수도 없다. 문들은 서로 물려 있기 때문에, 요컨대 불교는 결코 그것을 말하는 사람의 삶의 바깥이나 인격의 높이 이상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 구체성에 정직해야 희망이 있다.


우리는 늘 물어야 한다. 경전의 말씀이 나의 이해와 체험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연관되고 있는지를. 이 구체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나 자신 불교와 소외되는 것은 물론, 거시적으로 한국 불교 전체가 생명력을 잃고, 이방의 불교 혹은 다른 영적 대안에 점점 자리를 내주게 될 것이다.


지금 하바드의 선사와 베트남의 포교사, 그리고 티베트 망명객의 목소리가 한국불교의 하늘을 덮고 있다. 고마운 일이지만 또한 슬프다. 불교마저 수입품으로 채우고 말 것인가.


한국불교가 그 살아있는 정신과 제도를 이 궁핍한 시대에 인류의 영적 유산으로 되살려 세계에 수출을 하는 것이 도리어 마땅하지 않은가.


지금은 전 세계의 불교 자원이 수입되어 있고, 나아가 다른 정신적 종교적 수련까지 국경이나 문화적 제약 없이 실험되는 ‘자유경쟁’시대이다. 이런 종교의 글로벌시대에, 원효나 지눌처럼, 저 중중 첩첩의 관문들을 깊이 열어젖히고 불교를 새로 쓸 그 사람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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