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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네게 길을 묻거든
12/08/2011 22:12 댓글(0)   |  추천(0)

누가 네게 길을 묻거든 / 이양희



노인의 기역자 등이 걷는 듯 기는 듯 내 앞에서 움직이고 있다. 아무래도 저 이마가 땅에 닿고 말지 - 그 찰라, 굽은 등위를 ㅤㅉㅗㅈ던 나의 시선이 그만 촛점을 잃었다. 그러자 노인의 형상은 하나가 아니라 골목 안에 가득했고, 그것은 마치 사막의 낙타 무리를 연상케 했다. 골목 끝이 보이는데도 더딘 걸음은 계속되었다. 나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 때, 녹슨 대문 틈으로 죽자고 짖어대는 발바리 한 마리가 보였다. 노인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휜 엿가락 펴듯 당신의 허리를 펴 놓았다. 주인을 보고 날뛰는 발바리의 배와 넓적다리는 똥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 모양으로도 정신없이 뺑뺑이를 돌며 제자리 뛰기를 했고, 노인도 달려드는 첫 손주를 받아 안듯 어우러졌다. 그래도 끝까지 따라오길 잘했구나. 노인이 어찌나 호탕하게 웃는지 나도 그 앞에서 발바리만큼이나 까불고 싶어졌다.


내가 집에서 나와 한 오 분쯤 걸었을 때,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청년 셋이 지나갔다. 그리고 잠시 "느이도 대그빡에 댐풍들고 늙어봐라, 생전 푸른 소냉구로 살것 같어" 노인의 한탄이 들려 왔다. 그냥 지나쳤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되돌아왔을 때, 노인은 지팡이를 걸쳐놓고 아파트 담 밑에 앉아 있었다. 옷차림은 그만했으나 손등과 얼굴에는 상처가 많았다. 옆에는 어느 한의원의 이름이 새겨진 장바구니에 무언가가 담겨있었다. 노인의 옷가지려니 했다.


노인이 나를 보자 대뜸 부산의 어느 지명을 대며 아느냐고 물었다. 큰아들이 그곳에 살고, 세상에서 당신을 제일 좋아하며 공부 잘 하는 예쁜 손녀딸도 있다고 자랑했다. 늘 일등만 하는 손녀딸이 보고 싶다며, 양말목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그곳에 가고 싶단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노인을 부축했다. 모셔다 드리겠다며 무작정 따라 걸었다. 그런데 엉뚱한 길을 한참 돌아 다시 온 이 골목은, 뜻밖에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노인은 아파트와 다세대가 들어서고 몇 안 남은 낡은 한옥에서 살고 있었다.


하도 날씨가 좋아 인근 산엘 다녀오던 길이라 했다. 반은 걷고 반은 뒹굴었다는 노인은, 몸보다 앞선 마음에 무리를 했던 것이다. 집 근처에서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고 방향을 잃고 말았다. 지나가는 청년들에게 떠듬떠듬 길을 물었으나, 그냥 지나쳐 버린 것이 못내 서럽다고 했다. "이놈들아 늙은이가 저승가는 질이라도 묻디냐, 하기사 즈들눈엔 나가 저승사자 였을껴" 깊은 한숨이 폐부로부터 치받쳐 오르다가 목젖에서 아프게 꼬부라졌다. 설움과 원망의 대상이 어디 그 아이들뿐이겠는가.


열리다만 철 대문을 등지고 옆자리를 만들며 내게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발바리를 무릎사이에 끼고, 그야말로 절간 같은 빈집과 녹슨 대문을 배경으로 노인이 앉았다. 나도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한 무더기의 싸리꽃이 장바구니에서 쏟아져 나와 한 폭의 그림을 완성시켰다. 이 도시에서 영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풍경화를.


마디 굵은 노인의 손아귀에 잡힌 여린 싸리꽃이 더 기가 죽어 보인다. 마지못해 선잠을 깨고, 후두둑 몸을 떨며 분신같은 꽃망울들을 떨구었다. 기다렸던 발바리가 그것들을 질겅질겅 씹어댔다.


"근디 저승가도 싸리꽃이 있으까이?" 느닷없는 노인의 말과 함께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자 노인의 눈이 거짓말도 잘허네 하며 나를 흘겨지나갔다.


"샥시 가만 봉께 지법 참허네, 안직 소냉구만치 정꼬 월매나 좋어" 이번엔 내가 도리질을 해보였다. 노인도 따라했지만, 그것은 서로에게 긍정과 부정의 의미로 남겨놓았다. 노인에게 있어 젊음의 기준은 다름 아닌 소나무였다. 우리는 한 그루의 소나무와 단풍나무로 한참을 그렇게 마주 앉아 있었다.


아까부터 일어 설 궁리만 하던 나는, 발바리가 다르륵 제 몸을 터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순간 무릎이 시큰거리며 발이 저려 왔다. 얼른 손끝에 침을 발라 콧등에 슬쩍 문질렀다. 딴엔 아직도 푸른 소나무이고 싶어서.


"징포요" 노인이 싸리꽃을 내게 안겨 주었다. 꼭 놀러오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주름진 얼굴 위로, 손등 위로, 다시 굽은 등 위로 노인의 애끓는 시간들은 그 순간에도 마지막 황혼의 흔적을 남기며 지나가고 있었다. 걷는 듯 기는 듯, 그렇게라도 가고 싶은 노인의 길은 정녕 얼마나 남았을까.


저린 발바닥에 막 피가 돌아 몽롱한 걸음을 옮길 때, 등 뒤에서 아직은 쩌렁쩌렁한 노인의 목소리가 한발 앞섰다.

"샥시, 부탁인디 요담 또 누가 질을 묻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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