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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포도와 분노의 월스트릿
11/11/2011 08:11 댓글(3)   |  추천(9)

‘분노의 포도’와 분노의 월스트릿


들어가는 말

 

미국의 오늘은 여전히 우울하다. 모든 매체와 언론들은 수렁에 빠진 경제와 암울한 국가의 장래에 대해 다투어 보도하고 있다. 최소한의 품위와 건강도 유지하지 못하는 절대빈곤에 속하는 인구가 5천만에 육박하고 있다. 청년층의 실업률은 20%에 이르고, 대부분의 노인층은 의료비의 상승으로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있다. 대다수의 중산층은 주택가격의 하락과 소득의 감소로 소비를 줄이며 근검절약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정도와 성격의 차이는 있겠으나 미국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경제의 불황은 1930년대의 대공황 때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1929년 10월의 주가폭락을 출발점으로 초유의 투자와 소비의 감소, 물가의 하락, 실업률 상승 등의 현상이 연쇄적으로 초래되면서 대공황의 상태가 수년간 지속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가 실업자가 되어 길거리로 내몰리고 농민들은 은행 빚을 갚지 못해 땅을 빼앗기고 유랑민이 되었다. 1차 대전의 특수에 따라 부를 쌓은 부유층과의 소득격차가 크게 확대된 것은 물론이었다.

2008년의 금융위기와 경제침체는 투자처를 찾지 못한 금융기관이 신용등급이 낮은 자들에게 마구잡이로 주택융자해 주고, 이를 담보로 수많은 형태의 파생 금융상품을 남발했던 것에 직접적인 원인이 있다. 천정부지로 올라가던 주택가격이 일시에 폭락하면서 주택차압(Foreclosure)의 율이 높아지고, 자산가치의 하락으로 소비와 투자가 감소하면서 경제는 곤두박질 한 것이다. 실업률이 대공황 때에 버금가는 두 자리 숫자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미국의 경제가 국제화, 개방화되면서 수많은 제조업체가 국내의 높은 임금을 피해 해외로 이전함으로서 많은 일자리가 없어진 것도 경제침체를 심화시키는 요인이다. 국민간의 소득격차가 감정적으로 묵과할 수 없는 수준으로 벌어져 국가에 대한 일체감이 희박해 진 것은 또 다른 과제이다. 상위 1%의 부유층이 국민소득의 21%, 부의 35%를 차지할 정도이다.

분노의 월스트릿

주식과 주식시장은 자본주의의 핵심이자 꽃이다. 주식시장을 통해 기업은 자본을 동원하여 투자하고 생산활동에 임하게 된다. 일반국민은 주식에 투자함으로서 경제성장의 성과를 함께 분배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식관련 투자기관들은 느슨한 금융규제를 십분 활용하여, 탐욕적이고 무모한 투자관행을 거듭함으로서 공정한 게임을 전제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원리를 무너뜨리고 있다. 아담 스미스가 이야기했던 ‘모든 경제주체는 선하게 평가받으려 하는 욕구가 있다’라는 도덕감정론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금융기관의 '대마는 불사(Too big to fail)'라는 ‘도덕적 해이’ 현상도 큰 문제이다.

현재 경제침체의 과정에서 피해를 보는 수많은 노동자, 대학생, 주택차압자들이 전국의 도심을 점거하여 불특정한 소수의 부유층과 월스트릿을 향해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소위 1%의 부유층에 대한 99% 일반국민의 항거이다. 그것의 근저에는 부유층의 부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심리도 있다.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국민의 세금으로 구제금융을 받았던 금융기관의 직원들이 엄청난 액수의 상여금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기본체제를 분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

대공황으로 농산물 가격의 폭락과 은행 빚을 못 이겨 경작하던 땅을 빼앗기고 전국으로 유랑하던 농민들이 속출하였다. 당시 농업기술의 개발과 영농의 기계화, 대규모화로 인하여 소규모 농가는 급속하게 무너지는 상황이기도 했다. 때마침 미국의 중서부에서는 극심한 한발이 닥쳐 설상가상이었다.

오클라호마의 황진지대(Dust Bowl)에서 유태인들이 애급을 탈출하듯 66번 국도를 통해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는 난민 아닌 농민들의 어려움과 애환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소설이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이다.

주인공 가족인 ‘조드’ 가족을 위시한 난민들이 캘리포니아에서 발견한 것은 찬란한 태양,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농장주들의 착취와 기아, 질병, 그리고 절망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홍수처럼 밀려드는 노동력의 과잉공급과 농장주들의 담합으로 그들의 임금은 최저 생계수준을 이어가기에도 부족하였다. 그들에게는 축복처럼 쏟아지는 햇빛 속에 탐스럽게 익어가는 포도는 접근이 도저히 불가능한 분노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분노의 포도’라는 제목은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애국가였던 ‘공화국 찬가(The Battle Hymn of the Republic)'의 가사로부터 상징적으로 인용된 것이라 한다. 스타인벡 부인의 제안에 따른 것이다. 가사의 첫 두 구절은 다음과 같다.

나는 주님이 강림하시는 영광을 내 눈으로 보았네/주님은 분노의 포로로 만들어진 포도주 저장고를 짓밟고 계시네

Mine eyes have seen the glory of the coming of the Lord/He is trampling out the vintage where the grapes of wrath are stored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싸우는 대의명분은 남부의 온갖 죄악과 일반국민의 분노를 주님의 뜻을 받들고 대신하여 말끔히 씻어 주겠다는 것이다. 소설 ‘분노의 포도’에서는 설령 현세가 참담한 질곡의 세상이지만, 언젠가는 정의와 평화와 사랑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상징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 톰 조오드의 장녀 ‘샤론의 장미’는 아기를 사산 한 후 자기 몸도 추스르지 못하는 상태에서 기아와 피로에 지쳐 빈사상태에 놓인 낯선 50대의 사나이에게 가슴을 풀어 젖을 먹인다. 그녀의 사랑이 하느님이 주신 것이던, 인간 스스로의 휴머니즘에 입각된 것이든 인간은 바다와 같은 자정능력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나가는 말

자본주의가 주기적으로 맞는 경기순환에 따라 미국은 현재 대공황에 버금가는 시련에 봉착해 있다. 단지 분노의 대상이 ‘포도’에서 ‘월스트릿’으로 바뀌어 표출될 뿐이다.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위기이기도 하다. 

사회의 각계각층이 ‘샤론의 장미’가 될 수 없더라도, 미국의 건국정신인 청교도정신으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근면하고 청렴하며 꾸미지 않는 기독교정신의 부활이 아쉬운 것이다. 낮은 임금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생산성을 높여 열심히 일하지 않는 한 99%를 대변하며 월스트릿을 점거하고 있는 데모대의 희망찬 앞날은 없을 것이다. 미국 국민들은 스스로 민도가 높아져 거짓말을 일삼고 특정 이익집단만을 옹호하는 정치인들을 걸러내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 한다. 소수의 1%가 온갖 로비를 통해 경제적 부를 소유하는 동시에 국가시스템 모두도 그들의 의향대로 좌지우지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조만간, 조오드의 가족이 정든 땅을 뒤로 하고 유랑민이 되어 걸어왔던 역사적인 길, 66번 국도에 가서 월스트릿과 포도에 대한 분노를 되새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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