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 구슬 놀이
  • 구슬 놀이 (jaeok9876)

나는 걸어서 바다에 간다
11/07/2011 14:11 댓글(0)   |  추천(0)

‘나는 걸어서 바다에 간다.’ 성전 스님


나는 하루 두 번 바다에 간다. 새벽 예불을 마치고 어두운 새벽길을 걸어 바다에 가고 다시 저녁 예불을 마치고 저문 산길을 걸어 바다에 간다. 절에서 바다까지 소요 시간은 40분, 왕복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 산길 돌아 마을을 지나 다시 황금 들녘을 지나 바다에 이른다. 새벽에는 별을 이고 가고 저녁에는 별을 거느리고 절에 돌아온다.


길을 걸으며 나는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만약 걸을 수 없다면 이 지척의 바다는 너무 먼 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지척에 있으나 가서 만날 수 없다면 그것은 곧 절망이 아니겠는가. 내게 가장 큰 슬픔은 아마 걸을 수 없게 되는 순간일 것이다. 나이가 들고 병들어 걸을 수 없게 된다면 그것은 얼마나 슬픈 일일까. 손에 잡힐 것만 같은 저 풍경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봐야만 한다면 그것은 서글픈 일임이 틀림없다.


내게 소원 하나가 있다면 죽는 그 순간까지 걷다가 산사로 돌아가는 산길에서 죽는 것이다. 늙어 병들어 자리보전하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길을 걷다가 산사로 돌아가는 산길에서 죽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멋진 일일까. 그것은 운수납자(雲水衲子)라는 그 이름에도 어울릴 것만 같다. 구름처럼 물처럼 다 떨어진 옷 하나 걸치고 걷다 죽어야겠다는 치기 하나 없다면 우리 출가자들의 삶의 멋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요즘은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를 실감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나의 걷기도 꽤나 이력이 붙었다. 벌써 햇수로 3년이 다 되어 간다. 처음에는 그냥 운동 삼아 걸었다. 살도 좀 빼고 건강도 좀 살펴야겠다는 생각에서 시작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 나의 바다까지 걷기는 건강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걷는 것이 즐거움이고 그것이 순례의 의미까지 지니게 되었다. 걸으면 나는 맑아지고 경건해지기 때문이다. 걸음은 삶의 오만을 버리는 기도이고, 번뇌를 지우는 죽비이고, 평화를 건네는 풍경소리가 된다.

길 위에서 나는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닫는다. 걸으며 내가 만나는 모든 것들이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다. 나무나 새나 풀벌레, 그리고 하늘의 별과 바람이 모두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가슴으로 느끼고 있다. 그것들은 마치 식구처럼 나의 일상이 되고, 또 나의 마음에 식구처럼 자리하고 있다. 만약 걸어서 이 세상을 주유한다면 나는 감히 세상의 모든 존재를 나의 식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걷는다는 것은 다만 다리로 하는 공간 이동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닫힌 마음에서 열린 마음으로의 이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걸으면서 풍경은 대상이 아니라 마음이 된다. 빠른 속도로 지나치면 풍경은 사라지는 대상이 되지만 느린 걸음으로 걸어가면 풍경은 마치 꽃송이처럼 가슴에 내려와 새롭게 피어나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다.

산굽이를 돌 때마다 바다는 점점 넓게 드러난다. 바다가 길을 품었는지 아니면 길이 바다를 품었는지 이 길 위에서는 알 수가 없게 된다. 크고 작음에 대한 구별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고정되어 바라보면 바다는 넓은 것이고 길은 좁은 것이 되지만 길을 걸으며 바라보면 바다도 길도 더 이상 넓고 좁음을 드러내지 않게 된다. 바다로 내려가는 산길에서 나는 날마다 분별을 떠나는 자유를 만난다. 그러나 내 삶은 걷기를 멈추면 다시 분별에 속박당한다.

산길을 내려와 마을을 지나 더 낮은 곳으로 가야 바다를 만날 수가 있다. 바다는 이렇게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한다. 그러고 보면 나는 날마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향해 걸어오는 셈이다. 바다는 스스로 가장 낮은 곳에 자리해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스스로 깊어져 넘치지 않는다. 강이 제행(諸行)의 무상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면 바다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의 모습을 내보인다. 바다에 서면 가슴이 트이는 시원함을 느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모든 물길이 이름을 버려 하나가 되는 곳에 더 이상 벽은 없기 때문이다. 삶이 괴롭고 답답한 것은 수많은 이름을 가진 서로 다른 내가 서로 부딪히기 때문 아닌가.

바다에 서면 나는 발원한다. "바다처럼 낮아져 모든 것을 섬기며 살겠습니다. 바다처럼 넓어져 모든 것을 이해하며 살겠습니다. 바다처럼 깊어져 모든 것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스스로 발원을 배반하며 살아도 나는 바다에 서면 날마다 이렇게 발원을 한다. 그것은 바다가 내게 올바른 삶의 길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바다에 서는 순간마다 바다는 나의 부처가 되고 법당이 된다. 그 앞에서 어떻게 삶의 진리를 외면할 수 있으며 삶의 진실에 눈 감을 수 있겠는가.

어두운 밤바다에 별이 돋듯 나는 바다에서 진리와 진실을 향해 감았던 눈을 뜬다. 설혹 진리가 저 밤하늘의 별처럼 아득히 먼 것일지라도 그 별빛을 바라보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설혹 진실이 저 바다 속처럼 깊어 이르기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바다의 물결 소리로 자신을 씻는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삶은 그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다를 뒤로하고 산사로 걸어서 돌아오는 길에 별빛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빛난다.

수필 카테고리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