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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악 시선(詩選)
10/10/2011 03:10 댓글(0)   |  추천(0)

이용악 시선(詩選)



‘전라도 가시내’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드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거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초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 아닌 봄을 불러줄게

손때 수집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그리움’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우에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낡은 집’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굴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무도 모른다


찻길이 놓이기 전

노루 멧돼지 쪽제비 이런 것들이

앞뒤 산을 마음놓고 뛰어다니던 시절

털보네 셋째아들은

나의 싸리말 동무는

이 집 안방 짓두광주리 옆에서

첫울음을 울었다고 한다


‘털보네는 또 아들을 봤다우,

송아지래두 불었으면 팔아나 먹지‘

마을 아낙네들은 무심코

차거운 이야기를 가을 냇물에 실어보냈다는

그날 밤

저릎등이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소주에 취한 털보의 눈도 일층 붉더란다


갓주지 이야기와

무서운 전설 가운데서 가난 속에서

나의 동무는

늘 마음 졸이며 자랐다

당나귀 몰고 간 애비 돌아오지 않는 밤

노랑고양이 울어 울어

종시 잠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어미 분주히 일하는 방앗간 한구석에서

나의 동무는

도토리의 꿈을 키웠다


그의 아홉 살 되던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데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국만 눈 우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열던 살구

살구나무도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북쪽’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감을 줄 모르다



‘오랑캐 꽃’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채를 드리운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년이 몇 백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보렴 목 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달 있는 제사’  


달빛 받고 머나먼 길 오시리

두 손 합쳐 세 번 절하면 돌아오시리

어머닌 우시어

밤내 우시어

하이얀 박꽃 속에 이슬이 두어 방울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나는 죄인처럼 수그리고

너는 코끼리처럼 말이 없다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너의 언덕을 달리는 찻간에

조고마한 자랑도 자유도 없이 앉았다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다만

너의 가슴은 얼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안다

다른 한 줄 너의 흐름이 쉬지 않고

바다로 가야 할 곳으로 흘러내리고 있음을


지금 

차는 차대로 달리고

바람이 이리처럼 날뛰는 강 건너 벌판엔

나의 젊은 넋이

무언인가 기다리는 듯 얼어붙은 듯 섰으니

욕된 운명은 밤 우에 밤을 마련할 뿐


잠들지 말라 우리의 강아

오늘 밤도

너의 가슴을 밟는 뭇 슬픔이 목마르고

얼음길은 거칠다 길은 멀다


길이 마음의 눈을 덮어줄

검은 날개는 없느냐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북간도로 간다는 강원도치와 마주앉은

나는 울 줄을 몰라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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