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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바다
09/13/2011 11:09 댓글(0)   |  추천(0)

7월의 바다 / 심훈


흰 구름이 벽공에다 만물상을 초 잡는 그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맥파만경(麥波萬頃)에 굼실거리는 청청한 들판을 내려다보아도 백주의 우울을 참기 어려운 어느 날 오후였다.


나는 조그만 범선 한 척을 바다 위에 띄웠다. 붉은 돛을 달고 바다 한복판까지 와서는 노도 젓지 않고 키도 잡지 않았다. 다만 바람에 맡겨 떠내려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나는 뱃전에 턱을 괴고 앉아서 부유와 같은 인생의 운명을 생각하였다. 까닭모르고 살아가는 내 몸에도 조만간 닥쳐올 죽음의 허무를 탄식하였다. 서녘 하늘로부터는 비를 머금은 구름이 몰려 들어온다. 그 검은 구름장은 시름없이 떨어뜨린 내 머리 위를 덮어 누르려 한다.


배는 아산만 한가운데에 떠 있는 ‘가치내’라는 조그만 섬에 와 닿았다. 멀리서 보면 송아지가 누운 것 만한 절해의 고도다. 나는 굴 껍데기가 닥지닥지 달라붙은 바위를 짚고 내렸다. 조수가 다녀나간 자취가 뚜렷한 백사장에는 새우를 말리느라고 공석을 서너 잎이나 깔아 놓았다. 꼴뚜기와 밴댕이 같은 조그만 생선이 섞인 것을 헤쳐 보려니,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 외로운 섬 속에도 사람이 사나 보다.’ 나는 탐험이나 하듯이 길로 우거진 잡초를 헤치고 인가를 찾아 섬 가운데로 들어갔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라멘타인

늙은 아비 홀로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어려서 부르던 노래를 휘파람 섞어 부르며, 뱀이 지나간 자국만치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갔다. 과연 집이 있다! 하늘을 꿰뚫을 듯 열 길이나 까마득하게 솟아오른 백양목 그늘 속에서 게딱지같은 오막살이 한 채를 발견하였다. ‘저기서 사람이 살다니 무얼 먹고 살까?’ 나는 단장을 휘두르며 내려갔다.


추녀와 땅바닥이 마주 닿은 듯한 그나마도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속에서 60도 넘어 보이는 노파가 나왔다. 쑥방석 같은 머리를 쓰다듬어 올리면서 맨발로 나오더니,

“아, 어디서 사시는 양반인데.... 이 섬 구석엘 이렇게 찾아 오셨시유?”

하고, 바로 이웃집에서 살던 사람이나 만난 듯 얼굴의 주름살을 펴면서 나를 반긴다.

“여기서 혼자 사우?”

나는 그 노파가 말을 잊어버리지 않은 것을 이상히 여길 지경이었다.

“아들허구 손주새끼허구 살어유.”

“아들은 어디 갔소?”

“중선으로 준치 잡으로 갔슈.”

노파는 흐릿한 눈으로 아득한 바다 저편을 건너다본다. 그 정기 없는 눈동자에는 무한한 고적에 속절없이 시들어 가는 인생의 낙조가 비치지 않는가? 백양목 윗가지에는 바람이 씽씽 분다. 이름도 모를 물새가 흰 날개를 펼치고 그 위를 난다.

“쓸쓸해서 어떻게 사우?”

나는 저절로 한숨이 쉬어졌다.

“여북해야 인간 구경두 못 허구 이런 데서 사나유. 농사처가 떨어져서 죽지 못해 이리루 왔지유.”

나는 차마 더 묻기 어려워 머리를 숙이고 돌아서는데, 노파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침침한 부엌 속을 들어간다. 수숫대로 엮은 울타리 밖에는 마늘과 파를 심었다. 북채만한 팟종에는 씨가 앉아 알록달록한 나비가 쌍쌍이 날아다닌다. 조금 있자,

“이거나 하나 맛보시유.”

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돌아다보니 노파는 손바닥만한 꽃게 하나를 들고 나왔다. 내 어찌 불쌍한 노파의 친절을 물리치랴. 나는 마당 구석에 가 쭈그리고 앉아서 짭짤한 삶은 게발을 맛있게 뜯었다. 그대로 돌아 설 수가 없어 백동전 한 푼을 꺼내어, 한사코 아니 받는 노파의 손에 쥐어 주고 나왔다.


‘아아, 인생의 쓸쓸한 자태여!’ 나는 속으로 부르짖으며 그 집 모퉁이를 돌아 나오려는데 등 뒤에서,

“응아, 응아”

어린애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애가 우는구나? 그 늙은이의 손주가 우나 보다.’ 나는 발을 멈추었다. 불현듯 그 어린애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한번 안아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어 발을 돌렸다. 토굴 속 같은 방 속에서 어머니의 젖가슴에 달라붙어 젖을 빠는 것은 이 집의 옥동자였다. 그 침침한 흙방 속이 이 어린애의 흰 살빛으로 환하게 밝은 듯,

“나 좀 안아 봅시다.”

나는 손을 내밀었다. 살이 삐죽삐죽 나오는 배옷 한 벌로 앞을 가린 젊은 어머니는 부끄러워 머리를 들지 못한다. 노파는,

“이 더러운 걸...”

하며, 손주를 젖에서 떼어내어 내 팔에 안겨 준다.


어린 것은 젖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른 사지를 바둥거리며 내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본다. 울지도 않고 낯도 가리지 않고 반가운 인사나 하는 듯 무어라고 옹알거린다.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제 힘껏 감아쥐고는 놓지를 않는다. 까만 눈동자의 별같이 영롱함이여! 조그만 코와 입 모습의 예쁨이여! 나는 가슴에 옮겨드는 어린 생명의 따스한 체온에서 떨어지기 어려웠다. 이 고도의 어린 주인을 떼치고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바다 위에는 저녁 바람이 일어 성낸 물결은 바윗돌에 철썩철썩 부딪친다. 내 얼굴에는 찬 빗발이 뿌리고 백양목은 한층 처창한 소리를 내며 회색빛 하늘을 비질한다. 내가 그 집에서 나오자 어린애는 다시 울었다. 걸어오면서도, 배를 타면서도, 등 뒤에서 ‘응아, 응아’하는 소리가 바람결을 따라 들렸다. 머리 위에서 나는 물새의 소리조차 그 어린애의 애처로운 울음 소리인 듯....


‘그 어린애가 잘 자라는가?’

‘그들은 그저 그 섬 속에서 사는가?’

그 뒤로 나는 바람 부는 아침, 눈 오는 밤에 몇 번이나 베갯머리에서 이름도 모르는 그 어린 아이가 병 없이 자라기를 빌어 주었다. 그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언제까지나 내 귓바퀴를 돌며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로 1년이란 세월이 꿈결같이 흘렀다. 며칠 전에 나는 마을 젊은 친구들과 함께 숭어 잡는 구경을 하려고 나갔다가 ‘가치내’ 섬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 노파와 젊은 며느리는 전보다도 갑절이나 반가이 나를 맞아 주었다. 그들은 1년에 한두 번 사람 구경을 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인듯...... 그러나 어린애는 눈에 띄지 않는다.

“어린애 잘 자라우?”

하고 묻는데 때 묻은 적삼 하나만 걸친 발가숭이가 토방으로 엉금엉금 기어 나오지 않는가? 작년에 내가 대접을 받은 꽃게 발을 뜯어먹으며, 두 눈을 깜박깜박 하고 우리 일행을 쳐다본다.

“오오, 네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나는 그 어린애를 끌어안고 해변을 거닐었다. 어린애는 1년 동안에 몰라보도록 컸다. 오래 안아 주기가 힘이 들만치나 무거웠다.


그 날은 바다 위에 일점풍도 없었다. 성자의 임종과 같이 수평선 너머로 고요히 넘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나는 석조에 타는 붉은 물결을 멀리 보며 느꼈다. 이 외로운 섬 속,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에서 교목과 상록수와 같이 어린애가 장성하는 것을 생각할 때, 한없이 쓸쓸한 우리의 등 뒤가 든든해지는 것같이 느껴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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