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 구슬 놀이
  • 구슬 놀이 (jaeok9876)

연기법, 우주의 진실
09/02/2011 13:09 댓글(0)   |  추천(1)

연기법, 우주의 진실 / 신용국


들어가면서..


연기법은 우주의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은 인간이 삶에서 찾는 진리입니다. 인간의 삶은 인과율로 뒤덮여 있습니다.


일상 삶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부터 나의 존재에 대한 질문, 세계가 작동하는 인과에 대한 질문, 자연과 우주의 인과에 대한 질문, 사회의 제도나 관습,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질문들로 뒤덮여 있는 것이 인간의 삶인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의 존재 자체도 인과율입니다. 매 순간의 선택에 대하여 자신의 존재성을 결정하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어떤 인과율의 상태이며, 세계나 존재, 우주를 이해하는 사상 또한 어떤 인과율적 구조의 관념인 것입니다.


연기법은 인간의 삶과 인간의 존재가 찾는 인과율에 대한 해답입니다. 우주의 진실이기에 인간 존재의 해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우주의 진실을 깨달으시고 이를 연기법이라 명명하신 분입니다. 부처님에 의해 우주의 진실이 이 땅에서 비로소 각성되기 시작한 것이며,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은 인류에게 개벽에 다르지 않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깨 달으신 후, 부처님의 일생은 연기법의 전파에 있었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승가에게도 불법을 지켜 자신을 닦음은 물론 세상에서 법을 밝혀 나갈 것을 유언으로 남기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불제자라면 연기법에 대한 확고한 이해는 물론, 연기법의 전법에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은 부처님이 말씀으로 남기신 연기법을 현대의 언어로 해석해 보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1장에서는 연기법을 현대의 문명이 의지하는 관념들과 비교하며 이치와 의미를 설명하여 보았습니다. 2장에서는 연기법의 관점에서 불교와 불교의 문제들을 해석하여 보았습니다. 연기법을 논함에 있어 이 책 한권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르며, 또한 이 책이 다만 시도의 의미에서 그칠지도 모릅니다.


그 러나 연기법을 불법으로 이해하는 불제자라면 이러한 시도가 무모하다거나 의미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할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언제까지나 연기법이라는 이름 석자만 외우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이 책이 불교의 핵심인 연기법에 대한 진지한 사색과 토론을 일으키는 인연이 되기를 바라며, 책을 읽으신 독자들의 경책을 기다립니다. 혹여 의견이 같지 않더라도 불제자로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기회가 된다면 더 이상 좋은 일이 없을 것입니다.


2003년(불기 2548년) 12월


합장 삼배

신용국


----------------------------------------------------------------


1-1. 연기법이 무엇입니까


연기법이란 비존재론적 인과율因果律입니다.


인 식되는 모든 사물을 하나의 개별 실체로서 인정하지 않는 인과율인 것입니다. 연기緣起란 인연因緣으로부터 일어서는 결과입니다. 현대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연기란 인연이라는 <관계>로부터 일어서는 <관계성>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관계성>으로서의 연기 존재는 <관계>를 이루는 어느 요소들에도 종속되지 않는제 3의 존재성입니다.


여 자와 남자가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여자와 남자 어느 쪽에도 종속되어 있지 않는 하나의 독립적 인간이듯이 말입니다. 제 3의 존재성인 연기 존재가 현상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연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도 관계성으로서의 존재성, 즉, 연기 존재이어야만 합니다.


왜 냐하면 인연을 이루는 요소들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개별의 자성自性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 인연의 결과는 결과를 낳은 자성의 존재에 종속될 뿐, 인연을 이루는 어느 요소들에도 종속되지 않는 제 3의 존재성으로 연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의 우주라고 하는 것은 연기 존재들이 이루는 인연으로부터 새로운 연기 존재가 일어서는 현상의 우주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모 든 연기존재는 인연에 의지하여 비로소 존재하므로 우주는 그러한 연기 존재들의 인연들이 거미줄처럼 얽힌 인드라 망의 세계입니다. 인드라 망의 우주이므로 부분의 인연은 부분은 물론 전체의 인연과 연동連動되어 있습니다. 마치 바다의 한 물결이 모든 대양의 물결 파도와 연동되어 있듯이 말입니다.


인 연에 의지하여 비로소 존재하는 연기존재는 개별 자성自性이 없는 무아無我이며, 또한 정지하여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성질이 없는 무상無常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연기법의 설명에서 제법무아諸法無我와 제행무상諸行無常은 항상 수식어처럼 동반되는 개념입니다.


우 리의 문명을 이루는 학문과 사고는 존재론적 인과율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보이는 대상을 A, B라고 할 때, A와 B의 역학 관계 혹은 A가 B로 변하는 역학 관계의인과율이 존재론적 인과율입니다. 존재론적 인과율에서는 관측자에 의해 측정되는 A, B의 성질 혹은 값은 객관 실재의 값입니다. 다른 말로 A, B는 관측자가 측정하는 값과 성질을 지닌 객관 실재의 존재인 것입니다.


그 러나 비존재론적 인과율에서는 대상을 객관의 개별 존재로 규정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대상에 대한 단독의 값을 정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A나 B의 값은 인연에 의지하여 비로소 존재하는 연기존재이므로 그 값을 확정적으로 규정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비존재론적 인과율의 관점에서 보는 존재는 객관의 실재가 아니라, 관측자의 인연을 포함하여 환경의 여러 가지 인연에 의해서 비로소 존재하는 연기 존재이므로 인연을 제외한 순수한 대상만의 값을 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 를 들어 보겠습니다. 나무의 성질을 규정할 때, 두 가지 방법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나무가 그 자체의 성질 즉, 자체의 내연內緣으로서 그러한 형상과 성질의 값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나무가 내연과 외연外緣의 만남, 즉, 인연에 의해서 그러한 형상과 성질의 값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전 자前者의 방식으로 말하는 관점은 나무가 외부와 무관하게 그 자체의 자성自性을 원인으로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며, 후자後者의 방식으로 말하는 것은 나무가 그러한 성질과 형상, 값으로 존재하는 것은 내연과 외연이 이루는 인연으로부터 연기한 때문이라고 보는 관점입니다.


물 론 전자는 존재론적 관점이며 후자는 연기법의 관점입니다. 연기법의 관점에서 나무의 외연으로 생각할 수 있는 요소들은 기압, 온도, 수분, 흙, 태양열 등의 상식적인 요소들이 있겠지만, 또한 나무를 그렇게 보는 관측자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관측자에 의해서 나무의 성질과 값이 비로소 형상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의 관점에서는 나무를 객관의 개별 존재로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나무의 내연이 있다고는 하나 그 내연은 외연과의 인연이 없으면 나무라는 형상과 성질로서 현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 물의 존재 방식을 존재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인연으로부터의 연기라는 관점에서 보는 연기법에서는 인식되는 대상을 객관의 개별 실재로 볼 수가 없으며, 따라서 인식되는 값이나 성질을 대상의 값이나 성질이라고 규정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 값이나 성질에는 값이나 성질을 말하는 자신의 인연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니까요.


만 일 관측자를 포함한 나무의 외연과 나무의 내연이 확정된 값이라면, 다시 말해서 나무의 성질이라는 연기 존재를 이루는 인연의 요소들이 그 자체의 성질로서 확정된 값이라면 그 값들을 모두 묶은 값으로서 나무의 성질을 규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나무의 내연과 외연들 또한 인연에 의지하고 있는 연기 존재들이므로 그 자체로서 확정된 값을 가지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연기법입니다.


연 기법에서는 우주의 모든 존재를 인연에 의지하여 비로소 존재하는 연기 존재라고 봅니다. 어떤 존재도 자신의 자성이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만일 존재가 자성이 있다면 인식되는 존재는 자신의 값을 인식자에게 말할 것이지만, 그러나 어떤 인식에서도 대상이 인식자에게 자신의 값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만 일 하나라도 자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상대성의 우주란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며, 또한 모든 인식자는 기계적으로 동일한 값을 인식하는 인식자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는 인식의 대상이 절대 객관으로서 존재하지 않는 상대성의 우주입니다. 인식의 대상이 객관 실재가 아님으로 하여, 즉, 인식에 인식자의 인연이 작용하고 있음으로 하여 모든 인식은 상대적 인과율을 가지게 됩니

다.


다시 말해 보는 자가 적용하는 값에 기반하는 인과율이 보이는 대상의 인과율로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식자는 대상에 대하여 타인과 동일하지 않은 의미와 감성의 인식을 생산합니다.


대 상에 의한 기계적인 인식이 아니라 인연에 의한 능동적인 인식, 즉, 인식자가 인식 대상에 참여함으로써 인식의 인과율이 이루어지는 능동적 인식이 연기법 세계의 인식이며, 따라서 인식자가 인식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취하는 자유의지도 연기법 세계에서 비로소 가능할 수가 있게 됩니다.


연 기법에서는 대상을 공空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자성이 없는 존재이므로 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연기법에서는 티끌에 우주가 들어 있다고도 합니다. 부분으로부터 전체, 전체로부터 부분으로 무한 순환하는 인연의 값들이기에 티끌에도 우주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공 하다는 것과 우주라는 것은 언뜻 모순 되게도 들리지만, 그러나 공함과 무한은 같은 무게일 수도 있습니다. 공함과 측량할 수 없음은 한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3차원 형상의 세계에서 살면서 인과因果를 따져야 하는 존재이므로 인식되는 형상들에 대하여 값, 의미, 성질을 부여하는 존재론적 인과율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연 기법의 인과율이 우주의 실상이지만 대상의 값을 한정하지 못하는 연기법이므로 방편으로써 존재론적 인과율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대상의 값을 정하지 못하는 연기법이 어떻게 인과율일 수 있는지 의문하실 것입니다. 사실, 하나의 사건에 대하여 연기법에 준하는 완전한 인과율을 해석해 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완전한 인과율을 제시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의 사건에 전全 우주를 들이대어야 할 판이니까요.


그 러나 연기법은 분명히 부분과 부분, 부분과 전체의 인연이 서로 연동連動하는 인과율이며, 비록 우리가 존재론적 인과율에 의지하더라도 그 실상實相은 연기법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비로소 올바른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실상에 근접한 인과율에 기초하는 보다 현명한 문명의 생산이 가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 일 우리가 연기법을 알지 못하고 보이는 형상의 값이나 가치가 절대적인 것으로 안다면, 우리는 형상에의 집착과 그로부터의 존재론적인 번뇌를 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연기법이 실상이라는 것을 안다면, 형상들에 주어지는 가치나 의미가 진실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므로 그로부터의 집착이나 번뇌에서 보다 자유로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 간이 인식하는 방식은 존재론적 인과율에 의지하고 있으므로 인간의 인식은 자신에게 직접 작용하는 대상을 형상화하여 그 형상에만 가치와 의미, 값 등의 인과율을 적용하는 방식에 익숙해 있습니다. 소위, 너 때문이야'하는 논리들이 그러한 존재론적 인과율의 결과입니다.


일 어난 상황을 존재론적으로 처리하는 우리의 인식에서는, 집착과 탐욕'분노와 질투'어리석은 편견과 오해 등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우리 모두는 탐욕이나 분노, 질투, 경멸, 자기 비하 등의 감정들이 자신과 남을 다치게 하는 부정적인 감정이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런 부정적인 감정을 제어하려 하지만 자신이 이해하는 존재론적 논리에서는 그러한 부정적 감정들이 정당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본다면 자신의 존재론적 논리는 다만 자신이 구성하는 상대적 인과 영역에 불과함을 알게 됩니다. 즉, 실상이 아니라 방편에 불과한 인과율인 것입니다.


실 상은 연기법입니다.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을 말하는 연기법에서는 대상을 존재화하여 집착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그러므로 탐욕이나 분노, 질투 등의 부정적 감정들이 생겨나더라도 그것들에 머물지 말아야 하는 것이 연기법에서의 올바른 존재방식인 것입니다.


사람이 살면서 부정적인 감정들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들로부터 얼마나 빨리 벗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존재론적 인과율은 방편일 뿐이어서 허상虛像입니다.


연 기 무아를 유아有我로 착각하는 허상입니다. 허상임을 깨닫고 재빨리 허상이 일으키는 감정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바로 실상의 삶이며 연기법의 삶인 것입니다. 실상의 연기법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보다 큰 영역의 인과율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능하다면 우주 전체의 인과율을 보는 것이 연기법을 그대로 보는 것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인지 영역에서 우주 전체의 인과율을 보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연기법을 가장 왜곡하는 것은 편협한 존재론적 영역의 인과율로써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개체 위주의 존재론적 인과율로써 볼 때 연기법은 가장 심하게 왜곡됩니다.


예 를 든다면, 개별 개체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자연은 적자생존의 장이지만, 그러나 자연이라는 계界에서 볼 때에는 자연은 조화와 공생의 순환계입니다. 어떤 사건을 해석할 때에도 개인중심주의로 보는 인과율과 집단 다수의 이익을 위한 인과율,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인과율과 인류애로 보는 인과율, 생태주의로 보는 인과율과 우주적 관점에서의 인과율이 모두 다릅니다.


실 상의 연기법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가능한 큰 인과율로 보아야 합니다. 개체 위주의 편협한 존재론적 인과율일수록 현실에 작용하는 인연의 관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인과율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연의 관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인과율일수록 현실에 대한 왜곡의 정도도 그만큼 커지기 마련이고, 따라서 조화와 공생으로부터도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집 단생활을 하는 인간의 사회와 문명 또한 법이나 제도, 학문, 이데올로기 등의 존재론적 관념들에 기초하여 존재합니다. 인간의 문명이 보다 인간적이고 우주 자연과 조화로운 것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러한 존재론적 인과율이 연기법에 가능한 근접하는 인과율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문명을 규정하는 물리학, 경제학, 법학 등의 제도권 학문체계나 자본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를 볼 때, 인간의 사회가 연기법에 근접하는 인과율을 구축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 를 들어, 이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농산물 전면 개방 및 세계시장화라는 개념에서 사용되고 있는 논리는, 생태 가치나 사회적 가치의 실상에 근거한 인과율이 아니라 지극히 자본 중심의 인과율에 편향된 논리임을 볼 수 있습니다. 쌀 한 톨이 칠천 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경제 논리는 지역의 농산물이 지역 사회에서 가지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생태적 가치들을 모두 무시하며, 대신 세계시장에서의 교환가치 혹은 자본 경쟁력 가치로서만 값을 결정합니다. 무시된 가치들은 인간과 자연의 착취로 이어지고, 그 결과는 인간과 자연의 해체

라는 현상으로 연기緣起합니다.


법 학에서도 사회의 범죄에 대한 처벌이 대부분 개인의 책임과 처벌로 완료되는 존재론적 인과율에 의해서만 결정되어 집니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강제했던 사회적 영향력이나 인간관계, 관습, 제도, 잘못된 종교나 학문의 문제들은 무시되고 마는 것이죠.


신 에 의해 창조된 개인의 절대 존재를 주장하는 기독교 문화로부터 성장한 경제학이나 과학 등의 학문들이 현대의 제도권 학문의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그러나 이들 학문들은 너무나 개인 중심, 개체 중심, 물질 중심의 편협한 존재론적 관념들이어서 현대 사회가 경쟁과 자본 중심에 편향되도록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진 화론의 생물학이나 입자 중심의 물리학, 인간 중심의 경제학에서는 자연이나 사회의 유기적 연결망과 그 인과율의 가치를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인간과 인간이 이루는 사회적 연결망, 인간과 자연이 이루는 생태적 연결망의 가치를 결抉한 제도권 학문과 현대 문명의 인과율에서, 덕목은 조화와 공생이 아니라 경쟁과 배타적 생존입니다.


현 대 문명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전全 지구적 빈부격차와 노동착취, 자연착취의 현상이 현대 문명의 전도顚倒된 인과율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편협한 존재론적 인과율을 보다 넓은 존재론적 인과율로 확장시킨 것을 관계론적 인과율이라고 합니다.


관 계론적 인과율의 학문에서는 보이는 형상의 존재만 실재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 즉, 인간과 인간이 이루는 사회적 연결망과 인간과 자연이 이루는 생태적 연결망, 순환계까지도 존재의 개념에 담아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즉, 농촌의 지역계나 지역 자연의 순환계, 노동자와 자본가들이 공존하는 도시의 산업계 같은 연결망들이 하나의 존재로서 의미와 가치를 담고, 그 가치가 경제 논리에 편입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모든 네트워크 존재들의 조화와 공생을 추구하는 인과율이 관계론적 인과율인 것입니다.


3 차원 형상의 삶을 사는 인간에게 존재론적 인과율은 필요 불가결한 방편이지만, 그러나 방편으로서의 존재론적 인과율을 연기법의 실상에 근접하게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평등하고 조화로운 문명의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방안일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떠한 존재론적 인과율이라도 그것이 방편에 불과함을 결코 잊지 않는 것입니다.


비 록 방편으로써 존재론적 인과율에 의지하지만 진실은 연기법이며, 진실을 잊지 않음으로써 인간은 항상 가치의 근본, 의미의 근본에 대해 돌이켜 볼 수 있는 힘과 실상의 인과율에 근접하는 올바른 사회를 구성하려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 상 삶의 인과율이 방편임을 일깨우면서 진실은 연기법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불교이므로 불교는 그야말로 종교宗敎, 즉, 궁극의 가르침으로써 손색이 없습니다.어떤 자들은 천당 가고 지옥 가는 것을 심판하는 신神도 없는 불교가 무슨 종교이냐고 하지만, 그런 저차원의 사람들과는 아예 말을 섞지 않는 것이 현명합니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불교는 현상現象에서 작동하는 우주의 진실, 즉, 진리를 깨우쳐주는 종교인 것입니다. 존재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명의 문제까지도 인도하는 우주의 진리라면 이 보다 더한 종교를 찾을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1-2. 시간과 공간의 연기, 형상의 연기


불 교의 십이지연기에서는 색色, 즉, 형상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식識이 세계와 이루는 인연으로부터 연기한 것이라고 말하여 집니다. 이 말은 특정의 시간과 공간, 즉, 형상의 우주에서 인식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식에서 특정의 시간과 공간, 즉, 형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존재론적인 관념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의 우주, 즉, 형상의 우주를 인식이 인지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연기법의 관점에서는 인식에서 형상의 우주, 시공간의 우주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 전 물리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독립된 별개의 축으로 구분하였지만,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시간과 공간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결합체가 됩니다. 《수학원리》의 저자인 버트란드 러셀은 상대성이론이 가지는 철학적 의미를,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사건들에 있어서 그 사건적 위치를 가지는 단일하고 포괄적인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의하였습니다.


시공간이 시간과 공간을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현상이며, 시간은 공간에 대해 공간은 시간에 대해 상대성이라는 사실은, 우주를 규정하는 독립된 시간이나 공간의 실체가 따로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 일하고 포괄적인 절대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단일하고 포괄적인 절대의 공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절대의 공간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절대의 형상도 존재하지 못합니다. 독립된 시간이나 공간이 없는 우주의 실상은, 그 시공간성[형상]이 확정되어 있지 않는 비차원의 시공간성입니다. 시간의 절대적 값이나 공간의 값이 없는 우주이므로 비차원의 우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 차원의 우주는 형상이 없는 우주입니다. 형상은 시간이나 공간이 0 이나 무한대가 아닌 어떤 특정 값의 영역에서 비로소 존재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차원의 우주는 형상이 없는 우주라서 시간과 공간이 0 이거나 무한대입니다. 아니, 시간이나 공간이라는 것이 없는 우주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공 간이 없다는 것은 비차원의 우주 그 자체가 공간이라는 요소, 즉, 존재와 존재를 분리하는 공간을 가지지 않는 일체一切 동체同體의 계界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리적 방식으로 말하자면, 우주의 기질基質이 입자가 아니라 파동이라는 의미입니다.

3차원 형상의 세계인 인간의 세계는 그러한 비차원의 우주로부터 연기한 차원의 우주입니다.


양 자역학에서는 전자나 양성자 같은 입자들을 관측하면 공간의 어느 특정한 장소에서 발견할 수는 있으나 관측의 순간까지는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하고, 그 가능성의 확률은 물질파의 파동함수로 주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파동의 에너지로부터 질량을 가진 입자가 현상한다는 양자역학의 관점은 비차원으로부터 관측. 즉, 인식이라는 인연을 통하여 차원이 연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비 차원으로부터 차원이 연기한다는 개념과 능동적 인식은 인식 대상에 대한 인식자의 참여를 필요로 한다는 인식의 개념을 서로 연결한다면, 인간의 인식에서 형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간의 시간율에 의해서 비차원이 3차원 형상의 공간율로 확정되어진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의 시간율이 우주의 공간을 이루고 그 공간에서의 형상을 생산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인 식에서 시간은 인식자의 것이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시간이 인식자의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인식의 일관성과 연속성은 외부의 것이 되고 마는 것이어서 인식자는 인식자일 수가 없게 됩니다. 로봇이 인식을 하는 데는 대상에 대한 접촉으로부터 대상에 대한 인과율을 생산하는 프로그램의 시간적 진행이 로봇에게 귀속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시 간적 진행이 외부에 있다면, 다시 말해 처리 프로그램이 로봇과 분리되어 있다면 로봇은 결코 인식자가 될 수 없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능동적 인식자라면, 공간율을 확정하는 시간율, 즉, 형상을 규정하는 시간율은 인간에게 귀속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시간율은 어떤 것이며,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십 이지연기에 보면 색色, 즉, 시공간의 우주는 식識이 비차원의 우주와 이루는 인연으로부터 연기하는 것이고, 식識은 행行과 육체가 이루는 인연으로부터 연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시간율은 육체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육체의 시간율이 비차원의 우주와 인연하면서 인식에서의 시간과 공간이 연기하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육 체의 시간율은, 로봇의 예에서 보듯이, 감각을 생산하는 오감과 감각의 정보를 종합하는 뇌가 이루는 인식의 시간율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시간율은 인식의 대상을 만나면서 구체적 시간으로 형상화되는 것이겠지요. 반드시 인식의 시간율이 아니라 하더라도, 인식의 시간성을 내포하고 있는 육체에서 세계의 공간성을 생산하는 시간율이 비롯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인 간의 시간율이 육체로부터 비롯한다는 것은 저의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식하는 형상의 세계는 인간의 의식이 참여하는 인연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것은 십이지연기의 사실입니다. 십이지연기에서는 분명히 색은 식으로부터 연기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을 믿는 불제자라면 인식되는 모든 형상들은 객관의 실재가 아니라 나의 존재가 이루는 인연으로부터 연기하는 것이라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십이지연기가 아니더라도 인식이 능동적 인식일 수 있기 위해서는 인식되는 대상의 형상이나 개념에 인식자의 인연이 참여하여야만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인식론적 사실입니다.


인식의 방식에는 세 가지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인식 대상이 인식자에게 인식의 내용을 말하는 경우입니다. 즉, 붉은 꽃이 나는 붉은 꽃이다라고 인식자에게 말하는 인식이어서, 인식은 객관의 실재만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식자가 인식 대상과 무관하게 붉은 꽃이라는 인식을 생성하는 경우입니다. 인식 대상과 무관한 것이라서 인식은 객관의 실재에 대한 반영이 아니라 순수히 주관의 창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인식자와 인식 대상이 맺는 인연으로부터 인식, 즉, 형상과 형상에 대한 개념이 연기하는 경우입니다.


첫 번째에는 능동적 인식이 성립할 수가 없어서 인식자는 기계적 인식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대상에 대한 인식자의 능동적 행위가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 번째에는 인식에 인식의 대상이 필요 없는 것이라서 인식이라고 이름붙일 것도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인식이 능동적 인식일 수 있기 위해서는 인식은 인식자와 인식 대상이 맺는 인연으로부터 연기하는 것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형상은 객관 실재이고 개념은 주관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런 대상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모순의 존재에 불과할 뿐입니다.


예 를 들어 ‘붉은 꽃이 아름답다’라는 인식이 있다고 할 때, 대상인 붉은 꽃이 객관의 실재라고 한다면 그에 대칭하는 인식자, 즉, ‘아름답다’라는 개념을 생산하는 인식자도 객관의 실재이어야 하게 됩니다. 그러나 붉은 꽃에 대하여 ‘아름답다’라는 개념을 생산하는 인식자도 있겠지만, 또한 ‘위험하다’거나 ‘징그럽다’ 등등의 여러 가지 개념을 생산하는 인식자들도 있습니다.


이 렇게 되면 하나의 대상이 인식자의 수만큼 다양한 존재로 존재하는 반면, 정작 붉은 꽃 자신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서술은 가지지 못하는 모순의 존재이고 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론적 당위성에서 본다면, 대상의 인식에서'붉은 꽃'이라는 주어를 객관으로,'아름답다'라는 술어를 주관으로 이해하여 주관과 객관의 개념을 나누는 인식은 옳지 못한 관념입니다.


연 기법에서는 주관이나 객관의 분리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분리만이 아니라 주관 혹은 객관이라는 자체가 연기법에는 없으며, 다만 인연으로부터 연기한 연기 존재로서의 인식만 있을 뿐입니다. 인식의 모든 내용이 인연으로부터의 연기라면 인식의 형상 또한 연기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데 카르트는,'보이는 세계의 어떤 것도 결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할 수 없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비록 바위나 콘크리트와 같이 형상이 부정할 수 없는 절대 실재인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형상은 결국 인간의 오감을 통해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연 기법이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도 대상에 대한 인간의 능동적 인식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인식의 방법은 연기법 이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능동적 선택, 의지를 가능하게 하면서도 대상과 분리되지 않는 인식이란 인식자와 인식의 대상이 맺는 인연으로부터 연기하는 연기법의 인식 밖에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리고 그 연기법에서 인식의 개념은 물론 인식의 형상들이라는 것 모두가 연기한 연기 존재입니다. 형상이 연기한 것이라면 인식에서의 시간과 공간 또한 연기한 것입니다. 바로 인간의 존재가 이루는 인연에 의해서 연기한 형상의 세계이며 우주인 것입니다.



1-3. 연기법의 의미

『존재의 실상: 우주적 존재』


부 처님이 존재와 우주의 실상實相을 보시고 그 실상을 명명命名하신 것이 연기법입니다. 존재의 생로병사와 번뇌, 그리고 우주의 작동하는 실상을 깨달으신 분이기에 부처님을 정각자라 하며, 그 실상에 부합하는 존재성을 갖추신 분이었기에 완성자라 부릅니다.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위 없는 법, 즉, 궁극의 법을 깨달으시고는 이 법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설說해야 할지 고민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법은 참으로 깊고 오묘하여 미혹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법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해야 할 것인가?”


부처님을 고민하게 한 법은 바로 연기법입니다. 연기법은 비존재론적 인과율입니다. 즉, 모든 만물이 자성自性의 실체가 없는 제법무아의 인과율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야 부처님의 말씀도 공부하고 해서 그렇지, 존재론적 관념들에 지배되던 당시의 지식 상태에서는 개별 사물의 자성으로부터가 아니라 관계로부터 일어나는 제법무아의 인과율이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연 기법으로부터 도달하는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우주에서 인간을 운영하는 신이나 절대 법칙이 따로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연기법에서는 부처가 인간의 안이나 밖에 따로 있지 않다고 표현합니다. 혹은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이 부처라고 표현되기도 합니다.


존재론적 관념에서의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 대칭하는 절대 존재나 섭리를 상정想定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존재론적 관념에서는 인간은 언제나 우주의 티끌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 간이나 우주를 피조물로 보고 창조주를 외부에 두는 것이 기독교나 가톨릭입니다. 인간이나 우주를 피조물로 보고 창조주를 내부에 두는 것이 힌두입니다. 그러나 연기법에서는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절대 궁극의 실체가 인간의 밖이나 내부에 따로 있음을 부정합니다.


연 기법에서는 바로 인간과 뭇 생명들, 그리고 우주의 모든 존재와 우주 그 자체가 우주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존재를 규정하는 신이나 법칙이 따로 없다는 연기법은 존재의 의지, 즉 인간과 생명의 자유의지를 우주적 의지로 인정하는 참으로 놀라운 법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 이래로 뭇 생명은 물론, 인간의 자율권과 인간의 가치를 이렇게 위 없는 최상의 자리에 올려놓은 철학이나 종교는 불교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첨 단을 달린다는 현대의 이론 물리학에서 조차 우주의 절대 법칙을 찾아 헤매는 오류 속에 있음을 볼 때, 신이나 절대 법칙의 존재에 대한 강박관념을 미망迷妄이라 단언하는 이런 법이 우파니샤드와 힌두의 무수한 신들이 지배하던 당시 인도의 대중들에게 전해졌다는 사실 자체도 놀라운 것입니다.


그 러므로 불법의 위대함은 자신이 바로 우주적 존재, 즉, 부처임을 인간이 깨닫게 하는 것에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불법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우주적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법이 있건 없건 인간은 우주적 존재이며 불법은 다만 그 사실을 인간이 깨우치도록 하는 법이라는 사실에 보편적 진리로서의 위대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존재 실상인 우주적 존재를 깨우칠 수가 있는 것일까요?


연 기 무아를 깨닫고 이를 자신의 존재성으로 완성하면 됩니다. 부처님이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연기 존재가 우주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어떠한 인연의 구속에도 자신의 존재를 한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인연의 강제나 구속으로부터의 해탈입니다.


인 연으로부터의 해탈은 인연을 모두 무시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을 속박하여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존재론적 인과율의 관념들을 벗어버린다는 것이며, 또한 자신을 중독시켜 그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하는 모든 욕망들을 벗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처받고 분노하는 존재는 물론, 대상을 탐하여 대상의 노예가 되는 미혹한 존재에 자신이 머물게 하지 않음을 실현하는 것이 해탈의 의미입니다.


내 가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나인데, 그 우주에서 나를 제어하는 인연에 속박되어 노예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재가 연기 무아를 알지 못하면 우주의 티끌이요 중생이지만, 연기 무아를 알면 우주적 존재요 부처인 것입니다.


인 간은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어떤 보편의 절대나 궁극의 무엇에 대한 강박관념 속에서 살아 왔습니다. 보편의 절대나 궁극의 무엇을 위한 삶이 인간의 삶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경건한 존재방식이나 강박관념들을 머리에 이고 살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이 우주적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생로병사를 포함한 삶의 모든 문제들은 다만 자신을 구속하는 관념들과 못된 업습으로부터의 연기緣起일 뿐이라는 것을 환히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문제를 풀어준답시고 절대적 가치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종교일수록 존재를 구속하고 필요 없는 죄책감이나 의무감에 묶일 것을 요구합니다. 연기 무아의 관점에서 보면 한 바탕 사기극에 지나지 않습니다.


연 기 무아는 어떠한 조바심이나 강박관념도 필요치 않습니다. 다만 연기 무아의 삶을 사는 우주적 존재이기만 하면 됩니다. 신이나 절대 섭리에 의지하는 모든 강박관념의 존재방식을 버리고 오직 자신의 우주적 존재를 위한 머물지 않는 삶을 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1-4. 연기법의 의미

『우주의 실상: 중중무진의 우주』


중 중무진이란 인연의 겹치고 겹침이 끝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모든 만물이 서로의 인연에 의하여 비로소 존재하는 연기법으로서의 우주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연기 존재들이 인연을 모아서 새로운 연기 존재를 일으키고 일어난 연기존재들이 인연을 모아서 다시 새로운 연기 존재를 일으킵니다.


만 일 존재가 자신의 개별 자성으로서 존재한다면 이 우주는 중중무진의 우주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개별 자성의 존재는 존재의 조건으로 중중무진의 인연이 필요 없으므로 그 존재에 이르러 중중무진의 연결은 더 이상 성립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존재도 자신의 개별 자성이라는 것이 없는 연기 존재의 우주이므로, 이 우주는 존재와 존재, 티끌과 전체가 서로의 인연에 의지하는 중중무진의 우주라는 것입니다.


시커먼 흙에서 고동색 줄기와 푸른 잎, 붉은 과일이 열리는 까닭은 흙이나 나무, 에너지, 씨앗들이 단독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 인연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는 중중무진의 인연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중 중무진의 우주에서는 꽃 한 송이, 물 한 줄기, 나무 한 그루에도 우주의 인연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부분의 인연이 전체로 확장되고, 그 전체의 인연이 다시 부분으로 회귀하는 무한 순환을 실현하는 것이 중중무진의 자연이며 우주인 것입니다.


북 경 나비의 날개 짓이 뉴욕의 폭풍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귀로 듣는 피리 소리를 예로 들더라도, 그 피리 소리에는 우주의 인연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는 사람의 의지, 나무의 재질, 바람 소리, 입김, 온도, 기압, 소리를 전달하는 매질로서의 공기, 듣는 사람의 귀, 듣는 사람의 의식 등등 그 인연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중중무진의 우주는 극단적 역동성의 우주입니다. 모든 존재가 자성이 없는 제법무아이므로, 우주의 모든 존재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 인연의 관계망 위에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제행무상의 연기 존재인 것입니다.


찰 나의 멈춤이나 정지도 있을 수 없는 중중무진의 인연과 연기가 일어나는 곳이 바로 우리의 존재이며, 우리가 사는 우주인 것입니다. 혹자는 바위와 같이 천년의 세월을 제자리에서 버티는 존재에 대하여 어떻게 극단적 역동성을 상상할 수 있느냐고 의문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근저에는 바위가 자신의 자성으로서 그렇게 존재한다는 존재론적 관념이 있습니다.


그 러나 바위가 그렇게 존재하는 형상과 성질에는 내연內緣과 외연外緣, 그리고 인식자와의 멈춤이 없는 인연이 일어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인식되는 바위의 존재에 찰나의 멈춤이나 정지도 없는 인연과 연기가 일어나고 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찰 나도 멈춤이 없는 인연과 연기의 우주에서 모든 존재들은 일체一切 동체同體를 이룹니다. 세상의 모든 좋고 나쁜 것들의 인연에 의해 나는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므로 일체 동체이며, 서로의 인연에 의지하는 연기 존재들이 이루는 거미줄 인드라 망의 우주이므로 우주와 나의 존재는 일체 동체인 것입니다.


일 체 동체이며 중중무진인 연기법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사라짐은 다른 하나가 사라지는 원인이 됩니다. 자연의 생명 종種들 사이에서 이러한 사라짐의 현상은 빠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들을 멸절시켜가고 있지만, 그러나 연기법은 그 멸절이 곧 인간의 멸절로 이어지리라는 것을 예고합니다.


이미 자연의 인간은 사라지고 물질과 소비에 종속된 기형의 인간들만이 남아 있지만, 생명이 없는 자연이 해체되면 물질의 인간들도 버티지 못할 날이 오고 말 것입니다.

불 교인이면서도 이 중중무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성이라는 이상한 개념으로 중중무진을 대체하기도 합니다. 즉, 모든 생명에 불성이 있기 때문에 살생을 하면 안 된다느니 혹은 모든 존재가 불성이 있기 때문에 범아일여라느니 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모든 개념은 연기법을 기반으로 보아야 하므로 불성이라는 존재론적 개념들은 모조리 중중무진이라는 연기법의 개념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첫 번째 잘못된 관념은, '나에게 불성이 있으므로 나는 부처이다’라는 관념입니다. 이 관념은 '나는 중중무진의 연기 존재이므로 부처이다’라는 사실을 왜곡하는 관념입니다. 중중무진의 우주에서는 모든 점, 모든 존재로부터 인과因果가 비롯합니다. 즉, 내가 인식하는 우주의 모든 인과는 나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며 따라서 나의 존재는 내가 인식하는 우주의 우주적 존재이므로 부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가 된다는 것은 나에게 있는 불성을 보거나 깨우침으로써가 아니라 이미 부처인 나의 연기법 존재를 각성함으로써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를 보는 자 부처를 본다’라는 말의 진실한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만 일 세간에서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대로, 나에게 불성이 있기 때문에 내가 부처라면, 나는 불성이라는 무엇을 보거나 깨쳐야만 비로소 부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불성이라는 무엇을 보지 못하면 나는 언제나 중생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며, 따라서 부처와 중생은 존재적으로 대對를 짓게 되는 과오가 있고 마는 것입니다.


‘불 성이 있으므로 부처이다’라는 말이 이끄는 결론은 둘 중 하나입니다. 불성이 있다는 사실을 듣는 것만으로도 부처가 되거나 아니면 내 안에 내재해 있는 불성을 깨쳐야만 부처가 되거나 하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불성이 있다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처가 되지는 않습니다. 또한 내재해 있는 불성을 깨치지 못하는 한 중생이라는 주장도 연기법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힌두적 인과법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불성이 있으므로 부처이다’라는 말은 불교를 힌두이게 하는 잘못된 관념임을 분명히 인지하여야만 합니다.


두 번째 잘못된 관념은, 처처處處에 불성이 있다는 관념입니다. 중중무진의 연기 존재들이 이루는 우주이므로 처처에 부처인 것이지, 처처에 불성이 있어서 처처에 부처인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 잘못된 관념은, 불성이 있으므로 살생을 하지말라는 불살생입니다. 그러나 나와 일체 동체이면서 나를 존재하게 하는 중중무진 인연의 연기 존재들이므로 의미 없는 살생을 하지 말라는 것이지, 불성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살생을 하지마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네 번째 잘못된 관념은, 범아일여입니다. 만물에 불성이 있으므로 범아일여라고 하는 것은 만물에 브라흐만이라는 절대 실재가 내재해 있으므로 범아일여라는 힌두에서나 하는 말입니다.


연기법을 말하는 불교에서는 중중무진의 인연에 서로가 의지하여 있으므로 일체동

체 인 것입니다. 이외에도 불성을 들먹이며 연기법을 왜곡하는 관념들은 무수하게 많습니다. 그러나 불성을 실체화하여 불교의 말씀을 논하는 것은 모두가 힌두입니다. 연기법의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을 불성이라고 하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본래 자리, 궁극 성품의 불성을 말하는 것은 모두 불교의 거죽을 뒤집어 쓴 힌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중 중무진은 존재들이 서로에게 겹쳐 존재하는 것이란 의미이지만, 동시에 무수한 세계들이 서로에게 겹쳐 존재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존재하므로 세계가 존재하며 세계가 존재하므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연기법입니다. 세계와 나의 존재는 서로의 인연에 의지하는 연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 의 감성과 의미로서 존재하는 세계, 나라는 존재의 의미와 감성을 존재하게 하는 세계가 서로의 인연에 의하지 않고서는 따로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세계와 코끼리의 세계, 뱀의 세계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세계가 겹쳐 어울리는 것이 중중무진의 우주요 화엄의 우주입니다.


부 처님은 세계가 강가의 모래알처럼 많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마다, 그리고 생명들마다 다른 세계가 곧 중중무진의 우주이요, 불교에서 말하는 화엄의 우주인 것입니다. 궁극 성품을 직접 관한다는 견성 불교와 대비되는 것이 남방의 아비담마 불교입니다. 아비담마 불교의 요체는 모든 만물이 무아無我, 무상無常, 고苦임을 통각함으로써 해탈한다는 것입니다.


무 아이고 무상임을 분석적으로 펼쳐 놓은 것이 소위, 구경법으로 불리는 82 혹은 72가지 기본 요소들입니다. 즉, 만물은 지, 수, 화, 풍, 마음, 물질 등의 82가지 구경법들이 이루는 인연의 가합물이며 구경법들이 서로 묶여 찰나 찰나로 인연하는 것으로부터의 연기가 만물이라는 분석입니다.


그 러나 아비담마 불교는 구경법이라는 존재론적 관념의 요소들을 동원함으로써 중중무진의 화엄 사상을 놓치게 됩니다. 즉, 82가지 부수의 구경법들이 가합하는 인연으로만 연기를 해석하다 보니 존재에 대한 무아, 무상, 고만 붙들고 있게 되고 그러다 보니 개인의 해탈만 추구하는 소승 불교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제법무아를 말하는 불교에서 구경법이란 있을 수가 없고, 또 연기란 기본 요소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그런 물리적 현상이 아닙니다.


연 기란 그야말로 한량없는 연기 존재들이 겹치고 겹쳐서 이루는 중중무진의 현상인 것입니다. 중중무진의 연기법이라서 연기법에서는 존재와 세계, 존재와 우주가 분리 불가이며 따라서 연기법의 불교는 존재만 붙들고 씨름하는 소승이 아니라 세계까지도 싸안아서 세계 속에서 실천적으로 실현되어져야 하는 대승의 불교인 것입니다.


연기법의 불교는 궁극 성품을 보아서 해탈하는 견성의 불교도 아니며, 구경법을 관하여 해탈하는 아비담마의 불교도 아닙니다. 중중무진의 연기법 그 자체를 보는 지혜의 법을 불법이라고 말하는 불교가 연기법의 불교입니다.


궁 극 성품이니 82가지 구경법이니 하는 것들은 따지고 보면 모두가 후세에서 만들어 낸 인위적 관념들일 뿐입니다. 특히 아비담마 불교의 82가지 구경법 논리는 제가 보기엔 굉장히 이상합니다. 인연 연기를 설명하고 무아를 설명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 아닌가 유추합니다만, 그러나 물질의 요소들을 동원하여 연기법을 설명하려다 보니 무아의 해석 또한 물질적 해석, 즉, 의식의 차원이 아니라 육체적 물질의 이합집산 차원에서 무아를 설명하고 있는 꼴입니다. 이런 아비담바가 주장하는 위빠싸나라면 그 위빠싸나는 연기법의 위빠싸나가 아니라 물리적 이합집산을 관찰하는 위빠싸나에 불과할 것입니다.


제가 연기법을 주장하니까 견성의 불교는 물론 아비담마 불교까지 싸잡아서 비난하는 양비론의 주장으로 보실지도 모르나, 그러나 연기법으로 보니 잘못 되었기에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뿐입니다.


연 기를 이루는 기본 요소들을 82가지 법으로 존재화해서 이들로부터의 해탈을 말하는 아비담마 불교는 물론, 연기를 이루는 궁극 성품을 존재화해서 이를 견성함으로써 해탈하는 견성 불교 모두 존재론적 관념의 오류에 있는 것이라고 말할 도리 밖에 없습니다.


부 처님은 당신의 법에서 기본 요소이니 혹은 궁극 성품이니 하는 존재론적 관념들을 일체 말씀하신 바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법은 오직 무상, 무아의 연기법입니다. 무상, 무아의 연기법에 구경법이나 궁극 성품과 같은 존재론적 관념들을 연결시키는 것은 연기법을 왜곡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1-5. 연기법의 의미

『비법의 법』


연 기법을 이해함에 있어 비법非法의 법法을 이해하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이 비법의 법이라는 의미를 해석하지 못하면 자칫 연기법을 형상화하거나 절대화하기 십상입니다. 나가르쥬나의《중론中論》이나 불교 경전을 보면 법이라는 용어가 대략 세 가지 용도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 나는 인과율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물을 포함하여 뭇 생명과 인간의 존재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흔히 법신불法身佛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궁극의 무엇, 즉, 연기법을 이루는 궁극의 무엇입니다.


법 이 인과율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은 현대적 의미와 동일한 것이지만, 하지만 존재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법이 사용되는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인간을 포함한 만물이 연기법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연기 존재가 곧 연기법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통상의 법(물리법칙이나 법률)을 해석하는 방식은 존재론적 관념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즉, 법이 있고 그 법에 규정되는 대상이 있는 방식이지요. 다시 말해 존재론적 방식으로 사용되는 법은 법과 그 법에 규정되는 대상 사이에 존재적 대칭 관계가 성립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현 대 사회에서 존재적 대칭 관계가 성립하는 법의 개념은 종교적 사용으로부터 사회적 사용, 학문적 사용의 영역을 망라하고 있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법률과 법률에 규제되어야 하는 인간, 제도와 제도에 종속되어야 하는 인간 등,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모든 관념들이 신과 인간, 법과 인간, 제도와 인간을 대칭적으로 분리하는 존재론적 관념들입니다.


그 러나 연기법은 이러한 대칭적 분리의 관념들이 미망의 오류라고 지적합니다. 연기법이 실상인 우주에서는 존재와 법이 대칭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존재적으로 대對를 세우는 관념들을 옳지 못한 관념이라고 선언합니다.


마찬가지로 연기법을 이루는 궁극의 무엇도 연기법과 대對를 세우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연기법이 곧 법신불인 것이며 따라서 법신불과 연기법 사이에 존재적으로 대를 세우지 못하는 것이 비법의 법인 연기법인 것입니다.


이 논리에 따른다면 법신불은 서방 극락정토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의 존재가 곧 법신불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연기법에서는 모든 존재가 곧 우주적 존재인 것입니다.


존재론적 관념에서 우주를 해석한다면, 우주에는 궁극의 절대가 있고 그 궁극의 절대가 운행하는 법이 있으며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존재는 궁극의 절대가 운행하는 법에 종속되는 존재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세계 밖에 창조신이 있고 세계에는 창조신이 운행하는 법칙이 있으며 이 법칙에 우주 만물이 종속됩니다.


힌두교에서는 세계 안에 창조신과 창조신이 운행하는 법칙이 있으며 이 법칙에 우주 만물이 종속됩니다.


그 러나 불교에서는 지은 자와 지어진 자, 그리고 운행의 법칙이 모두 하나입니다. 그래서 지은 자와 지어진 자, 운행의 법칙 사이에 어떠한 대對도 세우지 못하는 것이죠. 불교에서 궁극 성품을 논하는 사람들은 궁극 성품이 무애자재하며 청정 적멸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대對를 세우지 못하는 연기법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말은 틀렸습니다.


인 연에 묶인 연기존재를 구속으로, 진여의 궁극 성품을 무애자재로 대對를 세워 분리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무애자재나 청정은 연기법에 종속되는 노예가 아니라 연기법의 주인 되는 연기 무아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론적 개념이지, 그 자체가 궁극 성품을 묘사하는 것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즉, 어떤 관념이나 부정적 감정에도 머물러 자신을 구속함이 없는 연기 무아를 묘사하기 위한 것이 무애자재이며 청정이지, 연기 무아를 존재하게 하는 궁극 절대의 성품이 무애자재이거나 청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 론 연기법을 이루는 궁극의 무엇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 궁극의 무엇은 청정, 무애자재, 기쁨, 성냄, 더러움, 오욕 칠정의 모든 연기법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다만 머물러 집착하는 존재론적 관념에 붙들리면 중생이요,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의 실상을 알아서 무애자재하면 부처일 뿐인 것입니다.


비 법의 법이라는 연기법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연기존재가 연기를 이루는 궁극 성품을 관觀한다는 견성見性의 수행도 연기법에 어긋나는 오류의 방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다는 것이 연기법을 보고 연기존재의 공한 성질을 본다는 것이면 모르되, 궁극 성품을 직접 관한다는 발상은 전변론적 힌두에서나 가능한 발상입니다.


연 기법은 일승一乘입니다. 지은 자와 지어진 자, 그리고 운행의 법칙[인과율]들에서 대對를 지어 나눌 수 없는 것이 비법의 법이며, 일승의 연기법인 것입니다. 불교적 방식으로 말한다면 불, 법, 승 일체이며, 일승인 것입니다. 궁극 성품을 말하는 사람들은 일승의 의미를 모든 세계의 종자種子들이 서로에 다르지 않는 하나라는 의미로 말합니다만, 그러나 일승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이라는 창조주가 만물을 지었다고 하는 기독교도 일승의 종교라고 말하는 꼴 밖에 되지 못합니다.


불 법의 일승은 지은 자와 지어진 자, 그리고 이 둘의 행行을 잇는 운행의 법칙이 서로 대를 지어 나뉠 수 없다는 연기법의 일승인 것입니다. 간화선의 화두를 관통하는 '한 맛’이라는 말의 의미도 바로 이 일승의 맛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일 승인 연기법의 극치는 존재와, 존재가 인식하는 세계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존재와 세계, 그리고 존재가 세계에 대해서 생각하는 법, 제도, 관념, 지식, 개념, 이미지, 형상도 분리되지 않는 일승이라는 것입니다. 연기법에서 모든 인간의 존재성은 자신이 인식하는 세계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세계가 행복하면 존재도 행복해지고, 세계가 무애자재하면 존재도 무애자재해지는 법입니다.


연기법의 인간이란, 마치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주라는 그림에서 자신의 색깔을 매 순간에 더하여 가는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그림을 그리는 주인공은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이겠지요.



1-6. 연기법의 의미

『삶의 실상: 부처란 주인이 되는 것』


연기존재들이 이루는 중중무진 화엄의 우주에서 주인은 연기 존재들입니다. 연기법의 우주에서 존재와 존재의 세계를 규정하는 인과율은 어디로부터도 오지 않습니다.


인 과율이 근원하는 곳은 존재의 밖도 아니고 존재의 안도 아닙니다. 바로 존재로부터 존재가 이루는 세계의 모든 인과율이 근원하는 것이 중중무진의 우주, 연기법 우주의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중중무진의 우주를 살아가는 존재는 자신의 세계, 자신의 우주에서 주인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림자 같은 노예의 삶입니다.


중 중무진의 우주라는 말은 중중무진의 인과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어떤 절대적 인과가 모든 존재를 강제한다면 그러한 우주는 중중무진의 우주가 될 수 없습니다. 중중무진의 우주가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중중무진의 모든 점이 인과의 출발지이자 종착지이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우주에서의 어떤 점, 어떤 존재도 그의 인과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중중무진하는 우주의 실상이며, 이것을 두고 우리는 상대성의 우주라고 이름하기도 합니다.


존 재가 자신이 인식하는 세계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인과율에 한정되거나 그 인과율에 붙들려 고통당하는 머무름으로부터 벗어나야만 합니다. 존재가 대상과의 탐, 진, 치에 머물러 붙잡히는 것은 주인이 아니라 대상에 대해 행사한 존재의 인과율에 존재가 스스로 노예 되기를 자청하는 꼴입니다.


자 신을 괴롭히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은 대상을 탓하고 있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을 있게 하는 인과율의 출발점은 자기 자신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자신의 존재도 공空한 연기 존재임을 안다면, 생로병사의 관념들을 포함한 부정적 감정들이란 한바탕 근거 없는 소란에 불과함을 알게 됩니다.


부 처님은 부정적인 감정들에 머무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부정적인 감정뿐만 아니라 자기 교만이나 자기 비하에도 머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머물지 않는다는 것은 교만이나 비하, 기타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인연들에 자신을 노예되지 않게 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연기 우주의 참된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연 기법은 비법의 법이므로 연기존재와 연기법은 동일합니다. 자등명 법등명에서 자自와 법法은 다르지 않는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기 존재인 자신의 삶에서 주인 된다는 것은 연기법의 주인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나아가 해탈 열반으로 향하는 부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처는 연기법에 머무르지 않음으로써 연기법의 주인이요, 중생은 연기법에 머물러 집착함으로써 연기법의 노예입니다.


세 상의 많은 철학들이 자신의 삶에서 주인으로 살아갈 것을 계몽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주인이나 우주적 존재의 의미는 연기법이라는 존재 실상의 당위성에서 이해되어져야만 합니다.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 세상에 세우려 안달하는 존재론적 관념의 당위성이 아니라 연기 존재의 실상인 우주적 존재로서 참되게 존재하라는 연기법의 당위성인 것입니다.


주 인으로 살라는 말을 존재론적 관념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존재론적 관념으로 주인이나 우주적 존재를 이해하게 되면 오히려 그런 아상我相의 노예가 되기 마련입니다. 존재론적 철학들은 자신을 세상에 대해 힘차게 세우라고 말들 하지만, 그러나 우주의 실상인 연기법에서는 그러한 존재 방식은 전도망상의 오류입니다.


연기의 법은 주인을 세우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참된 주인이 되는 무아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대상은 물론 자신의 존재에도 머무르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머무름의 주인이 되는 것이 연기의 법입니다.



1-7. 삼법인


불 교는 현실의 삶을 궁극적 목표를 위한 정거장 정도로 생각하는 모든 종교를 미망이라 선언하는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존재와 우주의 실상을 인간의 진리로 삼는 종교이며, 그래서 지금 바로 이 순간 참되게 존재함을 실현할 것을 요구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 러므로 불교는 가장 현실 참여적이며 역동적이어야만 하는 종교입니다. 해탈 열반과 인과 윤회가 종이 한 장의 차이도 없고 부처와 중생이 털 끝 만큼의 차이도 없는 종교라서 어떠한 관념적 허상도 삶에서 용납하지 않는 종교가 불교인 것입니다.


그 러나 이러한 불교의 이념과는 배치되게 불교를 다른 미망의 종교들과 같은 꼴, 심지어 허무주의로 전락시키는 불교의 해석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해석들을 꼽자면 이루 다 말을 할 수 없지만, 그 한 예를 들자면 삼법인의 해석이 있습니다. 삼법인은 제법무아, 제행무상, 일체개고로 이어지는 부처님의 설법입니다. 연기법의 요체를 담고 있고, 연기법에 노예 되지 않는 방법을 담고 있는 설법이라서 부처님 말씀 중의 요체라 할만한 설법입니다.


그 런데 이 삼법인을 '모든 만물은 실체가 없고 모든 만물의 행이 무상하므로 윤회하는 업의 중생 일체가 고통이다.'라고 해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해석이야말로 불교를 힌두가 되게 하고 나아가 허무주의로 떨어지게 하는 해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런 해석에서는 윤회하는 중생의 삶이란 아무쪼록 무사히 지나쳐야 할 정거장 혹은 업을 줄이기 위해 필요한 정거장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위의 해석으로부터 번져 나오는 세간世間의 근거 없는 관념이 ‘인생무상’이라는 것입니다. '삶이란 머무르고 할 것이 없으므로 덧없다.'라는 관념이 인생무상이며 이 '덧없다'라는 말은 다시 허무주의로 연결됩니다. 즉, 제행무상이 인생무상으로, 인생무상이 현생의 삶에 대한 허무주의로 연결되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논리입니다.


무 상無常이란 '머물러 정지하는 것이 없다'라는 뜻인데, 왜 무상이 허무주의로 연결지어져야만 하는지 저로서는 이해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삼법인의 해석은 결코 그런 허무적인 것이 아닙니다. 제법무아는 나와 너, 나와 세계를 분리하는 존재론적 구별이 오류이므로 나는 곧 우주적 존재, 즉, 부처라는 것을 말하는 법입니다.


제행무상은 제법무아의 근거가 되는 법입니다. 행行, 즉, 존재의 성질, 값, 형상 등

이 모두 연기 존재라서 자신 스스로 머물러 있을 수 없는 행이라는 것을 말하는

연기법의 설명이 바로 제행무상인 것입니다.


일체개고는 삼법인의 결론입니다. 즉,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을 알지 못하여 집착이나 분노에 머무르는 삶이 중생이며 고통이란 것을 말하는 법입니다.


위 의 해석에 따라서 삼법인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 너는 우주적 존재이다, 왜냐하면 너와 세계는 모두 인연으로부터 연기함이 멈추지 않는 연기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멈추어 집착함에 붙들리는 삶은 모두 고통이리라.'하는 해석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힌두적 해석과 비교할 때, 이러한 삼법인의 해석은 참으로 장대하기 그지없으며 또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의 방법을 그대로 드러낸 법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 독교와 마찬가지로 힌두교도들에게 이 삶은 정거장입니다. 모든 모순과 고통을 인내하고 무조건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정거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현생의 삶이 꿈이며 환에 지나지 않는다는 위로라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세상의 미망과 자신의 잘못된 업습을 지금 이 자리에서 파사현정해야 하는 종교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참되게 존재함을 구하는 수행이 바로 세상의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행과 다르지 않는 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이 러한 불교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 귀중한 말씀을 힌두적 해석으로 뒤바꿔 전도몽상하는 불교인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심지어 수행하는 스님들의 노래에도 '나는 돌아가리, 돌아가리라,'하는 뜬금없는 소리들이 난무합니다. 그리고 그런 노래들은 십중팔구 덧없음을 의미하는 애절한 가락들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주인 된 자, 우주의 주인 된 자가 가긴 어딜 간다는 것입니까? 지금 있는 바로 이 자리를 놓고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1-8. 인간과 연기법


인 간은 자신의 존재와 세계의 인과因果, 우주의 인과를 묻는 자者입니다. 나는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지금의 나라는 존재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이 우주는 어떻게 된 우주인가? 이 삶 이후의 나라는 존재는 어찌 될 것인가? 나와 관계하는 모든 사물과 사람들은 어찌 된 것인가?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인가? 등의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지는 존재인 것입니다.


연기법은 이 모든 질문들에 답해주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연기법은 존재와 우주의 실상을 나타내는 법이어서 그 인과율을 묻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 앞에 출간한《실천불교》에서 밝혔듯이, 우리의 우주가 상대성의 우주이고 모든 인과적 사실이 상대적 영역의 사실이라면, 이러한 우주의 진실은 무아이며 연기입니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개별 자성이 없는 무아의 연기 존재이며, 그러한 무아의 존재들이 이루는 인드라 망이 연기의 우주인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우주의 인과를 질문하는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성을 구축해가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인과를 묻는다는 사실 자체가 존재성을 묻는다는 사실과 동일한 것입니다.


존 재성에 있어서 사람마다 그 존재의 영역은 천차만별입니다. 어떤 사람은 육체적 이기주의, 어떤 사람은 집단적 이기주의, 어떤 사람은 사회적 이기주의, 어떤 사람은 국가적 이기주의, 어떤 사람은 인류적 이기주의, 어떤 사람은 생태적 이기주의, 어떤 사람은 우주적 이기주의라는 존재 영역을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모두 큰 사람大人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사소한 일들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라는 평가 대신에 그릇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큰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자신이 질문하는 인과의 영역을 크게 해야만 합니다. 인과 영역을 크게 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확장한다는 의미와 동일한 것입니다.


삶 에서 편협한 존재론적 관념들에 의지할수록 분쟁과 대립은 끊이지 않습니다. 개체 중심으로 상황을 파악할수록 타인이나 사회는 갈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 덩어리들이고 맙니다. 그러나 비록 제법무아, 제행무상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자신이 상황을 파악하는 인과율을 보다 확장시킬수록 분쟁이나 대립보다는 조화와 관용이 우선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부간의 싸움이 가정을 생각하면 자제하게 되고, 개인의 탐욕이 회사 전체를 생각하게 되면, 그 탐욕을 자제하게 됩니다. 개인의 역할이 세계에 미치는 인과를 생각할 때, 그는 세계적 존재일 수 있게 됩니다.


큰 그릇의 사람들이 세인世人의 존경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의 성품이 달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적용하는 인과율이 보다 큰 인과율이기 때문입니다. 보다 큰 인과율이기에 타인의 속사정이나 상황의 형상 뒤에 있는 사정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절로 생기는 것이죠.


그 러므로 인연의 영역들을 살펴보는 연기법의 공부는 비단 부처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을 현명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기 위해서도 절실한 공부입니다. 보다 많은 인연의 영역들을 끌어안는 연기법일수록 큰 사람을 만들고, 그 사람의 삶에서 조화와 공생이 풍부해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 러나 연기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주적 존재로 자신을 확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연기법에서의 우주적 존재란 극대의 의미이기도 하지만 공空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모든 존재론적 관념들에 대한 제법무아와 제행무상의 의식을 갖추지 않고서는 우주적 존재가 되기란 불가능한 것이 연기법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를 죽이고 아라한을 죽이고 조사를 죽이고, 심지어 부모도 만나면 죽이라는 살벌한 불교의 말은, 바로 우주적 존재로 성립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존재론적 관념들을 쳐부수라는 선언입니다.


우 주적 존재로 확장하는 것이 연기법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그 우주적 존재가 닿는 곳마다 제법무아이고 제행무상임을 아는 것은 연기법의 공부이며, 인간이 이 연기법을 공부해야 하는 당위성은 자신과 우주의 참된 주인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인생이 평생 동안 존재성을 구축하는 과정이라면, 쓸데없는 모래성 쌓기 보다는 자신과 우주의 참된 주인이 되는 존재성을 구축하는 것, 즉, 연기 무아의 존재성을 구축하는 것이 제대로 하는 인생 공부가 아니겠습니까?



1-9. 세계와 연기법


인 간이 우주적 존재라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연기법은 또한 인간의 의지가 우주적 의지라는 것을 알게 하여 줍니다. 연기법에 따르면 인간의 세계는 인간의 집단적 관념이 이끄는 대로 구축되며, 이러한 인간의 세계를 이끄는 원동력은 인간의 의지인 것입니다.


인간과 세계를 존재하게 하는 절대의 무엇이 없다는 사실은 인간을 외롭게도 합니

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이 보호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완전한 성인成人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연기법은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도를 닦건 혹은 구원을 바라건 대상을 빌어 기원한다는 사실 자체는 현실도피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 삶의 인과는 철저히 인간으로부터 일어서는 것이며, 그러한 인간들이 이루는 세상의 인과도 철저히 인간의 사회로부터 일어서는 것이 현실의 실상입니다. 인간의 관념과 업습의 욕망이 어우러진 세계가 인간의 세상이라면, 그러한 세상을 올바로 인도해야 할 몫도 철저히 인간에게 있어야 합니다.


기 독교의 세계는 심판의 구원으로 귀결되는 세계이며, 그래서 개인은 신을 찬양하고 신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존재 의무가 이행될 수 있습니다. 힌두교의 세계는 브라흐만이 이끄는 섭리의 인과율에 따라 세계가 진행될 것이므로, 개인은 자신의 해탈에만 전념하는 것으로 존재 의무가 이행될 수 있습니다.


그 러나 불교에는 인간을 대신하여 세계의 방향을 결정짓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더구나 모든 존재가 중중무진으로 서로에 의지하여 구축되는 세계가 불교의 세계이므로, 개인은 세계를 움직이는 관념과 욕망의 동력들에 대해 밝은 혜안을 가져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개 인이 아무리 올바르게 살아간다 하더라도 세계로부터 개인을 규정짓는 모든 잘못된 관습제도, 관념, 욕망들이 횡행하는 한, 개인의 행복한 존재함은 요원한 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제자라면 세상을 어지럽히는 모든 삿된 관념이나 욕망 제도 관습들에 대해 파사현정하여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전체주의나 공산주의, 자본주의와 같이 인간을 강제하는 못된 관념들에 대해 싸워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불 교의 인과응보는 태생적 업습에도 근거하지만 또한 세상의 미망에도 근거하는 일체동체적 인과율입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의 해탈은 자신의 업습을 정화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비록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여 세상의 미망을 씻어 내리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자신을 물들이고 있는 세상의 미망들은 씻어 내려야만 할 것입니다.


인 간은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의 주인입니다. 세계의 모든 의미와 감성이 자신의 존재를 인연으로 하여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기법의 존재를 지칭할 때 연기 무아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그 뜻은 당신이 바라보는 세계는 당신으로부터 비롯한다. 그러므로 머묾이 없는 무아가 되라, 집착하여 머문다면 주인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세 상을 사는 존재에게 던지는 연기법의 선언은 단호합니다. ‘세상의 주인 됨을 실현하라!'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라는 연기법 존재의 주인 됨을 실현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대상에 머물러 벗어나지 못하면 대상이라는 연기법의 노예일 뿐입니다.


삶 에서 노예일 것이냐 주인일 것이냐, 혹은 중생일 것이냐 부처일 것이냐, 혹은 우주의 티끌일 것이냐 우주적 존재일 것이냐는 전적으로 자신으로부터 비롯합니다. 중중무진의 우주에서는 자신의 세계는 자신으로부터 모든 인과因果가 시작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1-10. 연기법과 문명의 방향

『조화와 공생』


연 기법은 비법의 법이므로 방향성이 없습니다. 인간의 존재나 우주의 존재가 계획된 설계에 의해서 운명론적으로 굴러 가야 한다는 강제된 방향성의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신의 섭리 같은 것을 말하는 기독교나 힌두는 섭리의 방향성을 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우주적 의지로 존중하는 연기법에서는 인간을 강제하는 방향성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인 간을 강제하는 방향성은 없지만, 그러나 연기법에서도 지향해야 할 방향성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 방향성은 조화와 공생입니다. 자연을 보면 왜 연기법의 방향성이 조화와 공생이어야 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작은 생명의 계界와 중간 크기의 계, 큰 생명의 계들이 서로 어울려 하나의 조화로운 순환계를 형성하고, 그 순환계에 의해서 또한 모든 생명의 계들이 존재하는 것이 자연입니다.


그 러나 인간은 자연이라는 연기법을 해체하는 위험한 존재입니다.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 자신과 인간의 사회까지도 해체하는 위험한 존재입니다. 왜 인간이 위험한 존재가 되었느냐 하면, 인간이 그의 능력으로 실현시킨 문명이 인간과 자연의 연기법을 해체하는 최악의 존재론적 관념들로 뒤덮여 있기 때문입니다.


현 대 자본주의 문명을 개괄하면 이 문명이 전적으로 기독교적 문화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전도사를 앞세운 자본의 식민지 침략과 그 침략에 연이은 서양문물의 세계 제패는 전 세계에 개인 중심의 학문과 문명체계를 건설합니다. 소위 자본주의라는 것입니다.


자 본주의의 가치는 자연을 물질로 보는 인간 중심의 가치와 개인을 절대 존재로 보는 개인 중심의 가치에 기반합니다.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한 개인이며 따라서 이 땅위의 세계에서 개인은 절대 실체의 존재임은 물론 개인의 물질적 권리는 자연이나 사회 등의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인권을 빙자한 ‘개인의 세계에 대한 물질적 권리’는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물질 만능과 자본 최고의 초석이 됩니다.


현 대 자본주의 문명의 기초를 이루는 법과 경제 제도를 보면 이러한 개인 중심, 인간 중심의 존재론적 관념은 확연히 드러납니다. 보이는 존재 중심의 법이고 경제 제도이다 보니 보이지 않는 사회와 자연의 존재 가치는 무시됩니다. 자연과 사회를 도적질하는 큰 도적은 세상을 활보하는가 하면, 재물을 도둑질하는 작은 도둑은 모든 공권력의 대상이 되는 것이 우리의 법이며 경제 제도인 것입니다.


사 회를 혼란에 빠뜨려 많은 사람들을 자살로까지 몰고 가는 정치인이나 경제 사범은 인권이라는 미명 아래 법의 보호를 받는가 하면, 우발적으로 사람을 살해하고 괴로워하는 사람은 사형이라는 극형으로 심판합니다. 자연을 착취하여 돈을 버는 사람이 자원을 잘 이용한 기업가라는 소리를 듣는가 하면, 까르푸나 메가마켓 같은 거대 자본의 시장이 법의 제도적 지원 아래 재래시장과 그 상인들의 존재 기반을 박탈합니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사회의 조화와 공생을 깨고 경쟁 일변도로 내모는 이러한 법과 제도가 현대사회를 규정하게 된 까닭은 현대사회의 문명이 인간중심, 개인중심의 가치관에 편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러나 연기법의 관점에서는 개인중심과 인간중심의 기치관은 틀렸습니다. 원래 무아인 개인을 절대존재화하여 모든 가치를 집중시킴으로써 사회의 가치와 자연의 가치가 개인이라는 허상에 종속되어버리는 오류를 초래합니다. 개인의 절대존재는 원래 허상이므로 개인의 인권이나 존재의 조화는 실현되지 않고 대신 물질만능과 자본최고의 가치들이 연기緣起하여 인권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무 아인 인간은 자신의 세계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자연과도 분리될 수 없으며 사회와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연과 사회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옳은 방법입니다. 즉, 인간의 조화로운 존재를 위해서는 자연과 사회의 조화를 실현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 인을 절대 존재로 실체화하는 관점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저해하는 사회적 가치나 자연의 가치는 제한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러나 개인을 사회와 자연의 연기 존재로 보는 관점에서는 사회와 자연의 조화와 공생을 극대화하는 것이야말로 개인의 인권과 사회적 정의를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전체주의적 발상이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전체주의는 다른 집단에 대한 자기 집단의 배타성을 기반으로 하는 관념이어서 조화와 공생을 언급조차 할 수 없는 관념입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야말로 개인의 인권이라는 미명 아래 개인과 개인을 배타적 적자생존의 장으로 내모는 전체주의적 발상에 다름 아닙니다. 물신주의 혹은 황금만능이라는 가치 아래 개인과 개인을 투쟁하게 만드는 전체주의적 발상 말입니다.


인 간을 연기 존재의 무아로 보는 연기법에서는 개인의 절대 존재가 허상虛像이며 사회의 관계망, 세계의 관계망, 자연의 관계망이 실상實像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절대존재라는 관념을 근거로 개인의 물질적 권리를 지고의 가치로 간주하는 자본주의는 허상을 위하여 실상을 희생시키는 최악의 미망이요, 오류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 상을 희생시켜 허상의 이익을 구하는 법과 경제의 문명이다 보니, 그런 문명이 조화와 공생의 사회 대신 경쟁과 적자생존의 사회를 생산하는 것은 필연이며 그런 문명이 인간과 자연의 가치 대신 물질과 소비의 가치를 생산하는 것도 필연입니다. 거대 자본이 재래시장과 그 상인들을 압살하고 큰 도적놈이 세상을 떵떵거리며 사는 어처구니없는 것도 필연입니다.


관 계망을 실상으로 하는 세계라면 비록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사회와 자연의 계界를 존재의 계로 편입시켜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입니다. 관계망, 즉, Network를 인간에게 작용하는 실상의 계로 고려하는 학문이 관계론입니다. 세계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학문이 조금이라도 연기법의 실상에 근접하기 위해서는 존재론을 대체하는 학문으로 관계론의 학문을 진지하게 고려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그 러나 현대의 세계와 문명을 구성하는 학문들을 볼 때, 실상의 연기법을 이해하는 관계론적 학문이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한 것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의 지구는 존재론적 관념들로 인해 자연과 인간의 연기법이 와해되는 과정에 있다하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연 기법이 해체되는 과정에 있지만, 그러나 연기법은 비법의 법이므로 인간을 강제하지 못합니다. 오직 인간의 각성과 실천적 의지만이 연기법을 지구에서 부활시킬 수 있습니다. 일승의 연기법이므로 연기법 실현의 주체는 인간 외에 따로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반드시 연기법을 부활해야만 하느냐고 묻는다면, 첫째로는 우리가 실상의 존재로서 참되게 존재함을 원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우리가 지속 가능한 문명을 원하며 그래서 이 지구에서 계속 살아남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허 상을 위한 문명은 실상을 해치게 되어 있습니다. 개인을 절대의 존재로 강조하면 할수록,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사회는 절대 존재의 개인이라는 허상 아래 압살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중심의 문명에서 인간의 가치는 작고 작은 것들만을 향해 달려갑니다. 인간의 소외, 자기 상실, 감각과 쾌락 최고, 경쟁 만능은 그러한 문명이 낳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 문화일 것입니다.



1-11. 불교의 보시

『연기법의 사회적 실천』


연 기법에 비추어 사회의 잘못된 미망이나 관습을 지적하고 그 오류를 개선하는 것이야말로 대승의 승가가 실천할 일입니다. 중생 구제와 자기 수행을 분리하지 않는 대승의 관점에서는 인간을 왜곡하는 사회에 대한 연기법적 파사현정이야말로 중생 구제 속에서 자기 수행을 실현하는 합리적 방법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당 대의 가장 큰 화두는 전 지구적 경제 왜곡을 심화시키고 세상을 경쟁 일변도로 이끄는 자본주의의 병폐, 그 중에서도 특히 농업의 세계시장화가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역의 농업시장을 개방하여 세계자본의 투기장이 되게 한다는 것은 지역의 경제계와 사회계를 초토화시키고 인간과 자연이 이루는 공생의 계界를 무너뜨리겠다는 발상에 다름 아닙니다.


농 촌이 무너지면 도시는 물론 국가가 무너진다는 것은 연기법의 상식입니다. 국가란 다양한 지역의 자립 경제계에 기초하여야 하고 그러한 자립 경제계는 농업이나 어업과 같은 1차 산업들, 즉, 지역의 자연과 직결된 1차 산업들과 그 산업들이 이루는 지역적이며 자립적인 경제계들에 의존하는 것인데 그러한 자립 경제계를 모두 해체시키고 나면 국가의 근본을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국 가를 자본 시장으로 오인하면 안 됩니다. 국가를 자본 시장으로 오인하면 경제적 자생체, 사회적 자생체라는 국가의 개념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이 성장 중심의 강박관념들 속에는 국가란 다만 자본 시장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 러한 전락의 끝에는 약육강식의 이빨을 드러낸 인간과 물질, 쓰레기 더미들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본을 중심으로 한 경쟁 중심의 가치관이 횡행하는 시대에 조화와 공생의 연기법을 실천 공양하는 불교의 역할이란 막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왕 말이 나온 김에, 조계종의 종정스님에게 제안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2004년 신년 법어法語로 농업시장 개방철회를 말씀해 달라는 것입니다. 2004년 쌀 시장 전면 개방에 대항하는 농민들에게 힘을 주고 이를 수수방관하는 도시민들을 각성시키는 법어의 말씀을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농 업시장 개방철회의 법어는 단순히 농민들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농업시장의 문제가 농민의 문제라고 치부하는 사람은 연기법을 모르는 그야말로 무지한 중생입니다. 인간과 자연을 잇는 농업이 황폐해지면 인간의 심성과 사회도덕의 황폐, 그리고 자립경제의 왜곡은 필연적 귀결입니다. 파산한 농촌의 사람들이 도시 빈민으로 몰리고 농촌과 도시를 잇는 지역적 경제계가 붕괴한다면 그러한 사회에서 심성이나 도덕, 조화로운 공생의 경제가 가능할리 만무한 것입니다.


그 러므로 농업시장 개방철회야말로 자본주의의 삿된 관념들에 대해 올바른 사회를 수호하려는 연기법의 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제자라면 불법을 수호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역의 농업시장이라는 연기법을 수호하는 것이야말로 불법을 수호하는 것이며, 부처님을 예경하는 것이며, 자본에 침식된 인간을 살리는 것이며, 나아가 빈부격차와 자연 해체의 위협에 직면한 인류를 살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 어만이 아니라 한국의 불교를 대표하는 종정스님으로서 정부에게 요구하여야 하며, 나아가 범 불교계에 농업시장 개방철회를 위해 궐기할 것을 요청하여야 합니다. FTA이든 WTO이든, 농업시장의 개방은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선언하여야만 합니다.


불 교계가 단합된 힘으로 요구한다면, 농업시장 개방철회는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무역 분쟁이 우려된다면 다른 부분들에서 양보해야 할 것입니다. 자동차 철강 반도체에서 양보하고, 다른 공산품의 수입시장을 더 많이 개방하는 한이 있더라도 농업은 지켜야만 합니다.


농 업시장 개방과 그로 인한 농촌의 고사는 감당키 어려운 비용을 요구할 것입니다. 도시 빈민과 사회 범죄의 증가, 가치관의 상실, 자연 재해, 도시의 인프라 비용이나 환경비용, 복지비용의 증가, 실업자 증가 등등, 그 악영향을 열거하자면 자동차나 반도체 몇 개 더 팔아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공산품 시장은 경제적 손실에 끝나는 일이지만, 그러나 농업시장의 개방은 사회의 체제를 무너뜨리는 사건입니다.


그 러나 무엇보다도 농업시장 개방철회가 중요한 이유는, 자본 만능의 가치관을 척결하고 현대사회에서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조화롭게 공생하는 연기법의 세상, 불국토의 세상을 실현하는 기초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시장에서 거래하지 말아야 할 것과 거래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하는 지혜야말로 자본 만능의 병폐를 극복하고 인간과 자연을 자본 논리의 우위에 세우는 지혜라 할 것입니다.


농 업시장 개방의 문제는 한국 농민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 세계 농민들의 문제입니다. 농업시장 개방의 문제는 정확히 전 세계의 농민과 초국적 자본 기업들의 대립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불교가 앞장서 농업시장 개방철회를 실현한다면, 이는 한국 불교의 세계적 승리라 할 수 있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1-12. 연기법 수행


연 기법의 수행은 자신이 경계에 부딪힐 때마다 끊임없이 그 경계를 지켜보고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경계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으로 대표되는 모든 종류의 존재론적 관념들과 그로부터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발생하는 순간입니다. 존재론적 관념은 자신의 존재는 물론 자신과 1:1로 대칭하는 모든 존재들도 개별의 유아有我로 생각하는 관념이라서 존재를 우주의 한 티끌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관념들입니다.


존 재를 개별의 유아로 생각하는 관점에서는 우주의 보편 절대가 인간의 외부[기독교]나 내부[힌두교]에 대칭하여 존재하여야만 하는 반면에, 존재를 연기 무아로 생각하는 관점에서는 우주의 보편 절대가 인간의 외부나 내부에 따로 있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무아의 관점에서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우주적 존재이어야 합니다.


존재론적 관념들과 그로부터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존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고, 존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존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존재를 분노, 탐욕, 어리석음에 매몰되도록 하여 스스로를 상傷하도록 만드는 관념들이며, 따라서 존재가 존재의 실상인 우주적 존재로 존재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관념들이기 때문입니다.


존 재론적인 모든 관념들이나 그로부터의 부정적 감정들을 극복하고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연기법적 사고이며, 존재방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법적 존재방식을 실천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삼법인, 중도, 사성제, 십이지연기, 팔불게 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연 기법은 우주의 궁극 성품이 작용하는 도道입니다. 견성 수행이 궁극 성품을 직접 관하여 그 성품에 합체되기를 원하는 수행이라면, 연기법 수행은 궁극 성품이 작용하는 도를 관觀하여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궁극성품화 하는 수행입니다.


인 간의 존재는 무아이므로, 연기법을 자신의 존재성으로 취하는 수행이야말로 인간의 존재를 궁극성품화 하는 수행이라는 것이 연기법 수행의 논리인 것입니다. 연기법 수행은 부처님의 말씀에 주목하는 수행입니다. 부처님은 궁극의 실체나 궁극의 절대에 대해서는 있다 없다는 생각조차도 내지 말고 오직 연기법에 의지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물 론 연기 무아의 우주를 이루는 궁극 성품이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연기존재인 인간이 궁극 성품을 직접 관하거나 합체하려는 노력은 궁극 성품과 연기존재인 인간이 서로 대對를 짓게 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노력이나 수행은 연기법에 위배됨은 물론 왜곡된 관념을 궁극 성품으로 잘못 취하는 결과를 낳게 하는 것입니다.


견 성을 수행으로 삼는 이들은 궁극 성품 자체가 무애자재하거나 청정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래서 궁극 성품을 보거나 합체되는 것을 수행의 목적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연기를 이루는 궁극 성품이라면 이는 무애자재하거나 혹은 청정하지도 않아야 할 것입니다. 무애자재한 본성이라면 구속을 내지 못할 것이요, 청정한 본성이라면 더러움을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궁극 성품은 무애자재도 아니요, 구속도 아니며, 청정도 아니요, 더러움도 아닌 것입니다.


연 기법의 수행을 위해서는 머리 속에서 궁극 성품을 지칭하여 생각하는 일체의 관념을 버려야만 합니다. 청정 자성, 마음의 본래자리, 여래장, 진여 불성, 순수 의식 등의 일체 관념들은 형용할 수 없고 취取할 수 없는 궁극성품을 지칭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할 뿐입니다.이들 관념들은 연기법이 만법을 움직이는 절대의 법이 아니라 궁극 성품의 작용하는 도, 즉, 비법非法의 법法임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들에 불과한 것이지, 수행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관념들입니다.


연 기법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관념들을 머리에 이고 맹신한다면, 이는 연기법을 버리고 방편에 불과한 궁극 성품의 관념들을 목적으로 취하는 전도망상에 다름 아니게 됩니다. 궁극 성품을 대상으로 하여 견성의 수행을 취하려는 것은 일확천금을 이루려는 몽상에 다름없습니다. 한 번 견성으로써 형용할 수 없는 부처의 경지를 단박에 취하겠다는 일확천금의 꿈입니다.


그러나 연기법 수행은 그러한 일확천금의 관념들을 경계합니다. 마음의 업습과 존재를 구속하는 세상의 잘못된 관념들을 헤치고 바르게 존재함, 바르게 생각함, 바르게 행동함을 평생 수행해야만 하는 것이 연기법 수행인 것입니다.


수 행하고 수행하여 연기법을 더 이상 의도적으로 수행해야 할 필요가 없을 때까지 수행해야 하는 것이 연기법 수행인 것입니다. 연기법 수행의 첫 단계는 자신의 존재가 우주적 존재임을 아는 공부[육체 속의 존재가 아니라 인식되는 우주와 세계가 곧 자신의 존재임을 아는 공부]입니다. 자신의 의식이 인연이 됨으로 하여 자신이 인식하는 우주의 모든 의미와 감성이 연기緣起하는 것이므로, 인간은 모두가 우주적 존재인 것이 그 실상實相입니다.


이 첫 단계를 알기 위해서는 십이지연기로부터 해석되는 인식의 일어남과 자아自我의 일어남, 일체유심조 등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연기법 수행의 다음 단계는 무상無常함을 아는 공부입니다.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지 말고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일어나는 현상의 법法을 통찰하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공부입니다.


형상의 법으로서 일어나는 현상이 객관의 실재가 아니라 인식하는 자신을 포함한 무수한 인연의 연기 존재들이 이루는 인연으로부터 연기한 또 하나의 연기 존재임을 통찰하는 공부인 것입니다.


다 시 말해, 일어나는 현상을 존재론적 인과율이 아니라 연기법의 인과율로써 통찰하는 공부인 것입니다. 무상함의 공부는 자신이 마주하는 형상이나 의미들이 제법무아이고, 제행무상임을 속속들이 알아서 집착이나 머무름이 없도록 하는 공부입니다.


무 상함의 공부를 존재의 무상함을 공부하는 것으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물론 존재도 무상한 것이지만, 그러나 정작 무상함을 아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무상하여 공空한 관념들이나 형상, 욕망에 굳이 집착하는 잘못된 존재방식을 알아차리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무상함의 공부는 인식하는 자기 자신은 물론 인식되는 대상에 대해 순식간에 일어나는 잘못된 집착이나 욕망 분노 어리석은 편견 등을 알아차려 이들이 무상하고 공함을 깨우치는 공부인 것입니다.


이 두 번째 단계를 알기 위해서는 삼법인 팔불게 중도 연기 등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연기법 수행의 마지막 단계는 첫 번째와 두 번째의 공부에 의지하여 자신의 잘못된 존재방식을 삶의 매 순간들에서 교정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별로 어려운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머리로써 논리적 사실들을 공부하는 법등명法燈明의 공부입니다. 그러나 연기 무아를 믿어 실천하는 마지막 단계야말로 자신의 업습을 제어하고 세상의 어리석은 관념들에 대항하는 자등명自燈明의 수행입니다.


마 음 챙김이나 명상 수련이 필요하다면 이러한 수행을 위해서 필요할 것입니다. 시시때때로 덮쳐드는 업습의 욕망이나 일어나는 탐, 진, 치로부터 회광반조하여 벗어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러한 욕망이나 부정적 감정들을 즉시적으로 알아채고, 또 이겨내는 마음의 근기를 키워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하 지만 연기법 수행에 마음의 수련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연기법의 지혜입니다. 아무리 수련이 수승하다 하더라도 연기법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면 수련의 방향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입니다. 수련이 연기법 수행을 오도하는 전도망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해탈은 자신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에 대한 인과율을 보는 것입니다. 그 인과율을 궁극 성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견성 해탈을 말할 것이요, 그 인과율을 연기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겠다는 연기법 해탈을 말할 것입니다.


연 기법 해탈에서는 연기법 수행 그 자체가 목적입니다. 이 수행을 잃으면 중생이요, 이 수행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부처인 것입니다. 비록 수행이라고 말하였으나, 그러나 연기법 수행은 특정한 종교적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요, 종교입니다. 수행 그 자체가 해탈이자 오류와 미망의 존재방식을 극복하는 참된 존재방식이라서 수행과 삶, 종교가 모두 하나인 것입니다. 그래서 삶이 진행하는 한, 불교의 수행은 끝날 수 없으며 끝나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연 기법 수행을 질식시키는 것이 견성 수행입니다. 견성 수행과 연기법 수행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연기 무아를 수단으로 삼고, 관념적 해탈을 목적으로 삼는 견성 수행은 연기법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연기법 수행의 관점에서 견성 수행은 파사현정하여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견 성 수행으로부터 모든 기복이나 주술, 신비나 도력의 불교가 파생됩니다. 보았다고 주장하는 자들마다 저마다의 본 것과 수행의 방식을 주장하며, 자기 식의 종교적 신앙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힌두에 그렇게 많은 신들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입니다.


견 성 수행을 말하는 혹자는 성품을 보려고 하지 않음으로써 보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계합하는 것이 최상의 도라는 말도 합니다. 그러나 본다고 하는 것이든 혹은 계합한다고 하는 것이든, 그 대상이 궁극 성품의 작용하는 도가 아니라 궁극 성품 그 자체라면 이는 견성입니다.


궁 극 성품을 전제前提로 하는 것은 지은 자와 지어진 자를 대對를 지어 나누는 전변론적 사고방식입니다. 전능하며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브라흐만이 우주를 창조하고, 자신은 우주의 각 존재물에게로 내재해 들어갔다고 하는 것이 힌두의 전변론적 우주관이며, 그래서 모든 존재는 유아有我입니다. 견성은 그러한 전변론적 우주관에서나 가능한 발상인 것입니다.


그 러나 연기법은 전변론적 관념들을 삿되다고 파하는 법입니다. 연기법은 지은 자와 지어진 자를 대를 지어 나누는 능작인과 소작인을 부정하는 법이며, 따라서 어떤 존재도 하나의 독립된 개체가 될 수 없음을 주장하는 제법무아의 법입니다. 불교의 범아일여는 모든 존재가 불성을 가져서가 아니라, 서로에 의지하여 있는 중중무진의 존재방식이므로 범아일여라고 하는 것입니다.


견성이 연기법에 위배되는 이유를 간단히 서술해 보겠습니다.


보 는 자로서의 연기존재는 보이는 대상의 연기존재에 의지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보는 자로서의 연기존재가 스스로 존재하는 진여의 본성까지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보는 자는 연기 존재가 아니라 보는 자로서 상주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종교/불교 카테고리 다른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