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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 본 붓다
08/10/2011 20:08 댓글(2)   |  추천(3)
기독교에서 본 붓다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2006년 5월19일 한국 기독자 ·불자 학술회 발제 전문)



1. 붓다의 가르침으로서 불교는 기독교를 풍성하게 해주는 위대한 이웃종교

 

나는 이 글에서 불교가 기독교인인 나에게 주는 의미 혹은 불교사상이 지난 40여년 기독교 신학을 공부하는 신학도인 내 안에 끼친 창조적 영향을 회고하면서 솔직한 자기성찰적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나는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서의 역사적 붓다(563-483 BCE)는 오늘 한국에서 살아 숨쉬는 역사적 종교로서의 한국불교를 떠나 이해할 수 없다. 순순한 역사적 붓다와 원시불교 그 자체에 대한 연구는 그 분야의 전문 학자들에게 필요한 학문적 관심이겠지만, 그야말로 불교에 대하여 문외한이랄 수 밖에 없는 한 기독자로서는 너무나 전문적 주제이다. 나에게서 붓다는 2,500년 면면이 자라서 지금 삼보(三寶)라는 살과 뼈와 피를 갖춘  역사적 유기체로서의 한국불교를 의미한다. 한국불교의 몸으로 계신 인류의 영원한 스승 붓다에게 지고한 맘으로 합장하여 감사드린다.

 

‘기독교에서 본 붓다’라는 제목으로 이야기 해보라는 제의를 본인이 받아드린 이유중 하나는, 내가 자란 가정의 배경이 미래 동아시아 종교사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의 문제를 예견할수 있는 한 작은 사례가 되겠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불교나 기독교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유가의 가정에서 자라다가, 20세 전후 청년기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문하여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불교에 관한 인상이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원효스님의 유명한 존함과 유정·휴정스님의 호국불교사상을 귓가에 듣는 정도였다. 봄가을 불교 사찰에로 떠나는 소풍이나 수학여행에서 받은 불교인상은 1,500년동안 우리 조상들의 심신을 일궈온 불교인데도 나에겐 낯설은 것이었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나에겐 불교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에, 한국고찰이 자리잡고 있는 경외로운 산세와 조용한 불교도량의 청량감이 인상적일 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의 불교 이해나 이 글에서 피력하는 나의 소견은 불교 입장에서 보면  터무니 없는 오해일수도 있고, 정견(正見)이 아닌 무명(無明)의 잡견일 수 있다. 그러나, 부정 할수 없는 사실은 불교를 전혀 모르던 한 청년이,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지도 않은  한 청년이, 성경을 읽고 회심을  경험하여 신학공부를 하게 된 후에, 순전히 책을 통해 배운 불교적 진리에 눈을 떠가면서, 나의 신학과 기독교 사상형성에 어떤 영향을 받고있다는 것만큼은 부정 할수 없는 진실이라는 점이다. 나는 이 변화가 기독교의 자기정체성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자신 안에 갖추고 있는 진리이면서도 지금까지 보지못한 것들을 불교를 통해 깨닫게 됨으로서 이전보다 성숙해가는 ‘창조적 변화’(creative transformation)라고 스스로  확신한다. 종교란 금은보화로 장식된 궁전이라기 보다는 역사의 대지에   뿌리박고 자라가는 거대한 생명나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 활짝 꽃핀 대승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한 원시불교가 노장사상이나 유교나 선교(仙敎)나 풍류도(風流道)같은 정신적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한 것이어서, 기독교가 뿌리내릴 풍요로운 옥토가 된다.  때론 선의의 경쟁자로서, 때론 다정한 길벗 이웃종교로서  불교는 나에게 다가온다. 한국 기독교는 동아시아 문화·종교적 토양 속에 토착화되기엔 너무 젊은 종교이다.  한국기독교는 한국종교사에서 양적으로 팽창하는 역동적인  ‘초대교회’시대를 끝냈다. 이제는 불교와 깊은 대화·협력을 통해 창조적 성장과 성숙을 시작 할 때다.

 

2. 구원사 중심으로 편향된 실재관을 유기체적 실재관으로 보완하여 교정

 

붓다의 깨달음의 요체와 불교라는 위대한 우주적 종교의 주춧돌은 ‘인연생기적 실재관’(因緣生起的 實在觀)이라고 여겨진다. 연기설(緣起說)은 여러 가지 불교적 진리담론중 하나가 아니라, 그것들의 원점이자  종점이라고 여겨졌다. 그리고 그 붓다의 큰 깨달음이 역사 중심의 기독교, 구원사 강조의 기독교, 현세에서의 사회정치적 해방이나 래세적 영혼구원을 강조하는 기독교, 그 어느형태를 막론하고 수직·수평적 사고에 길들여져 있는 기독교 실재관이 지닌 사고의 편향성을 균형감을 갖도록  교정·보완해주는 길벗종교가 되어주었다.

 

대학시절 내가 서점에 가서 최초로 구입해본 불교개론서는 김동화(金東華)교수가 쓴 『불교학 개론』 (보연각,1972)이었다. 연기설을 해설하는 가운데 불경을 인용한 말씀  “緣起를 보는자는 곧 法(다르마)을 보며, 法을 보는자는 곧 緣起를 보느니라”라는 한마디 문장이 나에게 그 복잡다단한 불교의 교리들을 일이관지 하도록 번개광휘같이 비취어왔다. 중도(中道), 반야(般若), 공(空), 유식(唯識), 선정(禪定), 법성(法性), 해탈(解脫), 보살도(菩薩道)등 위대한 불교의 진리해설과 방편들이, 마치 실이 실타래에서 풀어져 나가듯,  연기론(緣起論)에서 전개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붓다의 그 위대한 깨달음은 나의 기독교신앙을 흔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너무나 선형적(線型的)사고로서 편향된 기독교 신학도의  기독교적 진리이해에 새로운 열린 지평을 눈뜨게 해준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아마도 내가 위대한 인류의 스승 붓다에게 배운 가장 큰 진리가 무엇이었느냐고 그 누가 묻는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인연생기하는 실상을 보라!’는 가르침 이었다고 대답 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창조설과 인연생기설은 상호배치되는 것 아니냐고 오해하기 쉽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구약성경 창세기 창조설화는 우주만물의 발생원인을 가르치는 과학교과서가 아니다.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그것들 스스로 자존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있도록 해주시기 때문에 있게 된다는 ‘존재함에 대한 감사와 경탄의 고백’ 이다. 불교의 연기설은 ‘있다고 하지만 없는바나 다름없는 피조물의 피조성’에 대하여 좀더 논리적으로 사물의 여여한 실상을 꿰뚫어 보여주는 진실해명이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줄여말하면, 나에게는 기독교의 창조신앙과 불교의 인연생기설은 모순 충돌되지 않고, 전자는 신앙고백적 언어로서, 후자는 분별지를 넘어선 반야지적 언어로서 함께 숨쉬고 있다.

 

연기(緣起)에 대한 불교적 가르침은, 선형적이고도 역사적 실재관에 편향된 기독교 신학도의 시각을 교정시켜줌으로서 소위 요즘말하는 ‘유기체적 실재관’을 갖도록 촉매하여 주었다. 그렇게 깨닫고보니, 성경의 여러곳의 진리들도 결코 단선적이거나 직선적인 실재관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구약성경의 창조신학, 시편의 자연신학과 지혜문학들, 예수의 씨뿌리는 천국비유들, 그리고 사도 바울의 우주적 그리스도론등이 새롭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다시말하면, 서양신학은 언제나 역사와 우주를 날카롭게 구별하고, 시간과 공간을 대조적으로 보도록 쇠뇌시켜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실재는 시공연속체로서 상자(相資), 상의(相依), 상보(相補), 상생(相生)하는 유기체적 관계속에 있음이 밝혀지는 현대문명 속에서 기독교가 불교에게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자산이 ‘연기적 실재관’임을 나는 확신한다. 그래야만 오늘날 심각한 인류의 공동과제로 대두된 생태계  위기를 공동대처  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연기설을 통하여 많은 깨달음을 얻고 입체적 시각을 가질 수 있었지만, 연기설은 내가 믿는 기독교의 창조신앙과 종말론적 새로움의 출현신앙을 대체하지는 않는다. 만물은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연기적 세계만이 아니라, 이전엔 없던 전혀 새로움이 출현하는 ‘창조적 과정’이라고 기독교신앙은 실재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3. 기독교의 선택구원론을 부끄럽게 만든 보살의 대비(大悲)정신과 회향(回向) 

 

기독교인인 나를 정말 감동시키는 불교의 가르침은 인연생기설과 손등·손바닥 관계로 있는 보살정신 이었다. 만물의 인연생기적 실상을 꿰뚤어 확철하는 프라주냐(般若)는 자연히 고통받는자들의 아픔을 자기의 것으로 동병상린하는 카루나(大悲) 실천의 보살행으로 나타난다. 보살행으로 나타나지 않는 반야지는 가짜이거나 아직 덜익은 깨달음일 뿐이다. 내가 한국신학대학에서 기초신학을 배우던 20대 초반 학창시절, 가정교사 아르바이트를 하러 시내버스를 타고 삼선교를 지나던 때, 포교원 건물 벽면에 씌여진 문장 “衆生의 병은 無明에서 오고, 菩薩의 병은 大悲에서 온다”가 나의 시선과 가슴을 사로잡곤 했다. 어떻게 저렇게 아름답고 숭고한 글귀가 있을 수 있는가 사뭇 감동적이었다. 뒤에 알고보니, 그것은 바로 ‘깨달음을 통한 해탈’을 강조하는 불교사상과 쌍벽을 이루는, 아니 전자의 당연한 귀결로서 다른 표현이랄수 있는 불교의 심장이요, 유마경의 본질적 가르침임도 알게 되었다.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와 죤힉(John Hick)의 말대로  종교의 가장 숭고한 목적과 기능은 인간의 자기중심적 이기심을 극복하게 하여, 고통받는 타자들에 대한 자비나 사랑의 실천에 있다는 것은 교과서적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그 점에 있어서 대승불교의 보살정신은 기독교의 아가페신앙과 쌍벽을 이루며, 어느면에서 더 심오한 면이 있음을 기독교인들은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예수의 무제약적인 아가페적 사랑처럼, 유다와 버림받은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지옥밑바닥엘 간 부할예수에 대한 신앙전승 처럼, 불자들은 놀라운 보살도로서 기독자를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사전적 의미에서 ‘보살’이란 “깨침(bodhi)을 위한 존재(sattva)"이다. 아직은 완전한 깨우침에 도달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런 과정 속에 있는 자들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보살정신 혹은 보살도란 한마디로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하려는 정신이지만, 대승불교에서 극치에 달한 보살정신은 중생의 고난과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동병상린하는 자비(慈悲, karuna)의 마음 때문에 발생한다. 보살은 이미 열반에 들 충분한 경지에 도달했지만, 자신의 열반에 드는 일을 유보하거나 맨 마지막 순서로 연기하고서, 고해에서 허덕이는 중생을 먼져 제도하려고 현세에서 중생을 무제약적 책임성과 연민을 가지고 돕는 존재자를 말한다.   자비(카루나)는 값싼 연민이나 동정이 아니며,  어려운 자들에 대한 가진자들과 지식인들의 시혜(施惠)는 더욱더 아니다. 세상 속에서 고통 당하고 있거나 죄업에 시달리는 생명들의 불행한 현상에 대한 공동 책임의식이요, 무한 책임의식이다. 이러한 보살정신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자비(헤세드)와 닮았다.

 

기독교는 사랑못지 않게 정의를 강조하기 때문에, 그리고 인격적 존재인 인간의 의지적 반역과 죄과에 대한 책임을 묻고자 하기에, 하나님의 절대주권 신앙과 맞물려 ‘구원받기로 예정된 선택설’이 ‘만인 보편구원설’과 함께 병행해 왔었다. 그리하여, 교파중에는 구원받을 일정한 숫자 144,000 명 속에 들어가기를 열망하며, 믿지 않는자들과 죄짓는 자들의 영원한 멸망을 교리로서 가르치는 곳도 있다.  이러한 극단적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잘못된 생각은 차치하더라도, 기독교의 사랑이 본래 예수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매우 당파적이 되거나 집단적 종교이기심에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피부색과 정치적 신념과 종교가 다르다고, 심지어 교파가 다르다고 해서 ‘다름이나 차이’를 용납못하고 정복하거나 저주하거나 획일화하려는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적 신앙행태를 보살정신과 비교해 볼 때, 기독자로서 부끄럼을 느끼고 크게 반성하게 된다. “중생이 앓으니까 앓게 되고, 중생의 병이 낫게되면 내병도 낫겠지요”라는 마음은 유마거사만이 아니라, 모든 참 종교인의 자세일 것이다.

 

4.  현실 대긍정의 대승기신론을  읽음으로써 이원론적 세계관을 극복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청년기 20세에 이르기 까지 나에게 불교는 현실부정의 종교, 삶에 대한 비관적 종교, 역사도피적 종교로 비쳐졌다. 물론 이것은 나의 무지에서 연유하는 오해이지만 아직도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한국 출가승들의 삭발이나 회색빛 장삼가사 색상자체가 삶의 체념이나 생명력 약동에 대한 부정종교로 느껴졌고, 숭유억불정책이 펼쳐지기 조선왕조 이전부터 깊은 산속에 가람을 짓고 승단을 이루는 뽄세가 현실도피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불교에 대한 오해를 교정하는 계기는 이기영(李箕永)교수의 『원효사상』(弘法院, 1971)을 구해본 이후였다. 그 책의 재판(1971)이 나온 후, 한국신학대학 안병무교수와 친한 관계로 이기영박사가 한국신학대학에 ‘불교특강’을 하러 오셨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구입하여 정독하게 되었다(1973). 원효사상을 소개하되 마명의 『대승기신론』을 주해한 원효의 『大乘起信論 疏·別記』를 현대적 언어감각으로 해설한 명저였다. 그 무렵엔 불교관계 서적들은 온통 한문투성이요, 한글로 쓴 것이라 해도 한자어를 한글로 옮긴 것 뿐이어서 문외한들로서는 난감하였다. 그런데, 본래 가톨릭 신앙에 귀의했다가, 유럽문명 한복판에서 공부한 불교학자 이기영 교수의 저서는 한결 이해하기가 쉬었다. 뒷날 이홍우(李烘雨)교수의 교육이론으로서 대승기신론을 번역주해한 역저도 큰 도움이 되었다.

 

무릇모든 종교는 대체로 이원론적인 면이 있다. 표현이야 어떻든 세간/출세간, 역사현실/하늘나라, 이 세상/ 저 세상, 현상계/본질계, 시간/영원 등등이 모두 그런 대립의식의 표현이다. 초기 아비다르마 불교(부파불교)를 비롯하여 헬라철학의 영향을 듬뿍받은 기독교역사도 먼저 열거한 범주적 실재계를 부정하여 후에 열거한 범주적 실재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취하며, 후자 범주의 가치가 전자 범주의 가치보다 우월함을 강조하는 경향을 지닌다. 나도 기독교의 그러한 경향성에 대하여 항상 의문을 품고 고민하던 터라 ‘일심이문’(一心二門)의 역설적  불가분리성을 설파하는 마명과 원효의  기신론적 논리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마명(馬鳴, 아슈바고샤)이전에 이미 용수(龍壽, 나가르쥬나 150-250)의 중도론이 그 진리를 말하지만, 마명의 대승기신론은 그 문제를 가장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론서였다. 일심진여(一心眞如)로서 진리자체가 영원불변하는 ‘진여문’(眞如門)과 변화하고 시공간적인 현상세계로서의 ‘생멸문’(生滅門)이라는 두 모습을 나타내는데, 그 둘은 서로 불가분리적 관계를 갖고있다는 것이다. 두가지 문이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 일심진여의 두가지 존재방식이라고나 할가? 흔히 해파관계(海波關係)로서 은유되는 일심이문의 대승불교적 실재관은 현실부정이나 현실도피의 비관주의적 종교가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양자의 차이는 인식론적인 것일뿐, 존재론적으로 말하면 양자가 동일하다는 가르침은 대승불교사상의 요체를 새롭게 표현한 것으로 보여졌다. 

 

한국의 기독교는 복음의 본질이해에 있어서 심각한 이원론의 병폐를 앓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앙의 목적은 죄많은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음으로 죽어서 그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구원받는 것이라고 보수적 기독교 교단에서는 통상 말한다. 그런 이원론적 기독교는 창조세계를 보시고 “아름답다!”하셨다는 존재긍정의 창조신앙에도 위배되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성육신 신앙에도 어긋나며,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이다”라고 기도하라시는 예수의 주기도문 정신에도 위배되는 신앙행태이다. 대승불교 기신론이론이 기독교가 말하려는 신앙내용 전부를 설명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원론의 갈등을 해소시키는데 내겐 큰 도움을 주었다.

 

5. 여래장 사상은 원죄설로 인간성을 어둡게 본 신학적 인간학을 균형잡아 줌

 

내가 기독교 신학을 전공한 한 학도로서 대승불교에 감사한 또 한가지 중요한 통찰은  현실적 중생들이 탐·진·치 삼독(三毒)에 침윤된체 고해의 바다를 헤매는 비본래적 존재일지라도, 인간본래성의 진면목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여래장(如來藏)을 지니고 있다는 강렬한 인간성 대긍정의 사상이었다. 앞서말한 대승기신론의 인간에 대한 궁극적 긍정신앙도 여래장 신앙에 기초하고 있으며, 중관학파이후 발전했다고 말하는 3-4세기 유식학파(唯識學派)의 경전들이 말하는 놀라운 소리가 기독교 원죄론에 치우친 나로 하여금 성경전체의 진리가 말하려는 보다 균형잡힌 신학적 인간학을 가지도록 자극하였다.

 

모든 인간은 생래적으로 여래장을 품고있다는 것이다. 여래장(tathagata-garbha)은 여래와 장의 합성어라고 한다. 여래(如來,tathagata)란 ‘깨달음을 이루신 이’ 곧 부처에 대한 별칭이요, 장(藏, garbha)이란 모태(womb, matrix)와 태아·배종(胚種,embryo, fetus)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고 전문가들이 말한다. 여래장 사상이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는 이유는, 모든 인간의 비참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깨달은 존재’ 곧 부처가 될 수 있는 태아나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것, 부처님을 모실수 있는 자궁을 지닌 존재라는 것과 인간성 회복 및 자기완성을 위하여 수행과 정진의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불교의 여래장 사상과 비교할 때, 기독교 또한 ‘인간은 하나님의 모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창2:7)라던가, 인간영혼의 깊은 곳에 ‘하나님의 씨’(요한 1서 3:9)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까지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 사상이 역사속에서 전개되어 오는동안 ‘하나님의 모상론’이나 ‘하나님의 종자론’은 어거스틴 교부이후 인간의 타락설과 원죄론에 의하여 그 빛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동방기독교와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면면히 이어져 왔으나, 서방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신학전통에서 인간의 전적타락설과 원죄론이 득세하여 그 빛은 살아지게 되었다. 원죄론이 강조할려고 하는 바는, 인간본성이 지닌 죄의 성향과 이기심이 너무나 심각하여 도덕수양론이나 자기성찰의 노력만으로는 인간의 중생사건이 어렵다는 반성이다. 인간의 자기성찰이나 수양노력을 넘어서는 진리의 빛, 은혜의 능력에 접촉해야 중생(重生)은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경박한 인간낙관론에 경고를 하면서, 인간이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거듭나는 일의 중요성과 어려움을 말하려는 의도는 옳았으나, 너무나 인간성 그 자체를 비관적으로만 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종교적 수행 그 자체를 소홀히 하는 폐단을 낳았고, 인간의 자기완성을 향해서 끊임없이 정진(精進)하려는 불교적 수행도를 ‘자력구원론’이라는 오해를 가지고 비판하기도 했다. 현대신학적 인간학은 원죄(original sin) 못지않은 원복(original blessing)을 강조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재발견하고, 양자의 균형감각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여래장 사상은 인간의 원죄론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인간의 죄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믿고 인간들과 임마누엘하시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촉구한다.  예수의 가르침을 복음서 속에서 교리적 전제없이 맑은 귀로서 들어보면,  예수는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게 되라”(마5:48)고 격려하였고, “나를 믿는자는 나의 하는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더 큰 일도 할것이다”(요14:12)라고 격려했다. 원죄론의 주창자라고 정통신학이 말하는 바울사도의 편지에도 모든 신도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여래장 사상은 기독교 전통 속에도 본래 있었지만 잃어버렸거나 약해진 인간의 가능성과 ‘내적인 신성의 빛’을 회복하게 하는데 촉매적 역할을 해준다.

 

6. 동아시아불교의 선(禪)의 정신은 기독교의 ‘우상타파’정신과 통하는 것

 

나는 1974-5년에 미국에 첫 유학의 길을 떠났다. 미국 아이오아주 듀북대학교 신학부에서 공부하던 중 어느 날, 기독교 교부사상을 전공한 교수 한분이 『고다마 붓다』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고, 동아시아에서 온 만학도 나에게 읽어보라고 책 한권을 선물했다. 감사하게 받으면서, 속으론 벽안의 학자가 동아시아 불교를 알면 얼마나 알랴하고 건방진 생각을 했다. 가벼운 맘으로 침대에 누워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읽다가, 나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경건한 자세로 고쳐앉아 읽게 되었다. 벽안의 노학자가, 팔리어나 산스크릿 원자료에서 인용하면서, 내가 한국에서 알고 있는 불교보다 훨씬 더 심오한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동양의 학도로서 심히 부끄러웠다. 비록 신학전공의 학도이지만, 그 노학자도 자기 전공을 넘어 불교를 이렇게 진지하게 연구하는 것을 알고 나의 무지가 부끄러웠다.

 

서양의 지식인들과 진리구도자들이 불교에 관심하는 이유는 여러가지 있지만, 특히 선불교에 대하여 관심이 깊은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 기독자로서 동아시아에서 활짝 피어난 선불교 정신은 임제선사의 사자후라고 알려진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극단적 표현 속에서 일체의 우상을 파괴하여 초탈(超脫)·초연(超然)하려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의 자유정신을 보게되었다. 동서양의 우주적 종교들이 추구하는 구경의 목표는 인간자유혼의 회복이며 인간해방이건만 종교는 동시에 교리와 의례등 상징체계를 갖게 마련이어서 위대한 세계적 종교일수록 전통을 우상화하는 자기모순의 역사를 반복해왔다. 붓다와 예수를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서 존경하는 것은 그들이 인간을 억압해온 우상들 특히 종교적 우상들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준 때문이 아니던가?

 

기독교는 십계명을 암송하면서 계율로서 지키려고 노력하는 종교이다.   그런데 열가지 계명중 맨 앞부분의 세가지 계명이 사실은 모두 ‘우상타파’ 정신을 강조하는 계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어리석게도 특정교리, 특정 교파, 특정종파, 특정 경전을 절대시하는 우상숭배를 범하고 있는 자기 모순적 종교단체가 되어 있다. 우상이란 무엇인가?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섬기거나 주장하면서 거기에 인간의 궁극적 관심을 쏟아붓고 거짓 안심입명을 누리려는 행위이다. 역사적 종교들은 역사적 종교를 탄생시킨 그 근원적  진리자리에로 되돌아가 자기를 부인할 때라야만, 상대적인 역사적 종교를 통해서나마 절대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선불교가 기독자에게 가르치는 위대한 정신은 한마디로 모든 종교들의 교학적 표현이나 의례적 상징들이 그것자체로서 궁극적인 것이 아니고,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려는 ‘방편’에 불과하다고 통찰하는 점이다. 소위 교리적 문자들·의례적 상징행위들·가람건물이나 부처상들도 결국은 달을 보게하려는 방편으로서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이라는 것이다. 우선 기독교는 선불교에서 ‘우상타파’정신을 다시 배우게 된다. 그런데 슬프게도 보이지 않는 더 큰 ‘기독교 교리 우상’에 사로잡힌 배타적이고도 공격적인 기독자가, 상징물로서 모셔진 불전의 불상들을 ‘우상’ 깨트린다고 훼불사건을 일으키는 웃지못할 비극이 얼마전까지  발생했다.

 

그러므로, 다시한번 선불교가 말하려는 역설 곧 종교의 교리나 의례마져도 ‘한 방편’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상에 사로잡혀있는 자아를 조용히 성찰하는 ‘방편으로서의 명상수행’이 기독자에게 더욱 절실히 요구됨을 절감한다. 가톨릭 사제들과 수사들에겐 피정기간이 있고, 불자들에겐 하안거·동안거등 철저한 좌선 수행전통이 있는데, 개신교엔 그점이 약하거나 전무하다는 것을 반성하게 된다. 선불교는 기독자에게 ‘방편’이 왜 필요한가를 알려주면서 궁극적으론 ‘방편’을 왜 돌파해야 하는 가를 가르쳐주는 인류의 스승 붓다를 알려준다.

 

7. 한국불교의 정혜쌍수(定慧雙修)·교선병행(敎禪竝行) 전통에서 배운다.

 

   평생을 신학교육에 종사한 나로서는, 불교에 문외한이지만 한국불교의 특징으로 거론되는 교학(敎學)과  선수행(禪修行)이 항상 병진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늘 감동과 부러움을 느껴 왔다. 교학의 중심사상을 화엄·천태·정토사상으로 하던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어느 불교종파에  소속하였던지 공통적으로 선수행을 병행하는 것을 불문율로 삼는다. 불교 큰 사찰의 가람배치에서도 예불처가 있고 강원이 있고 선방이 한 큰 불교사찰 도량 안에 함께있다. 학승이 선승이고, 위대한 선승은 곧 학승인 것이 불교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다.

 

이처럼 당연시 되는 불교의 오랜 전통에 비교할 때, 기독교의 진리구도 방식은 교학과 명상수행이 분리되어 있거나 심지어 대립되어 있다는 단점을 통절하게 느끼게 된다. 기독교에도 두 전통이 옛부터 있어 왔다.  하나는 신학교의 강단과 교회의 설교단이 상징하는 ‘교학적 진리’이며, 다른 하나는 수도원과 산속 기도원이 상징하는 ‘신비주의적 영성수련’ 전통이다.  신학교육의 대부분은 기독교의 진리를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으로 말해보고 변증해보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 안에도 그러한 신학적 논리와 언어로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진리가 있음을 알고, 부정신학(否定神學,  theologia negativa)이 발달해 왔다.

 

현대기독교의 약점은 계몽주의 시대이후, 기독교가 언어로서 표현 할수 없고 다만 영혼의 깊은 지성소에서 체험하거나 깨닫는 기독교진리에 이르는 길을  약화시키거나 억업해왔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 경전의종교, 예배의 종교’가 되어 버렸다. 말로 할 수 없거나, 종교의례로서 표현할 수 없는 영성의 깊은 차원의 갈증을 해갈 할 길이 없어 과잉흥분상태의 사이비 부흥회나  도덕주의적 율법주의 종교에로 퇴행하려는 조짐마져 보이곤 한다.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중에서 신비적 체험의 특징으로서 열거하는 특징들과 D.T. 스즈키가 열거하는 선체험의 특징들 사이에 유사점이 많음을 염두에 두는 것이 유익하다. 패러다임이 다른 불교적 선체험을 기독교적 신비체험과 동일시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진실에 대한 비매개적 직접체험이랄지,  모호한 정신상태가 아니라 실재에 대하여 환하게 꿰뚫려 비취는 순수지성적 깨달음같은 것은 공통적이다.


결국 우주적 보편종교로서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은, 두종교가 지닌 유형적 특징을 드러내면서 상대방에게 보완적 공헌을 한다. 두종교의 유형적 특징을 드러내는 상징어와 상징물은 각각 니르바나와 하나님의 나라, 연꽃과 어린양이다. 니르바나와 연꽃은 시간을 초월하여 항존하는 ‘지금·여기’ 존재의 충만을 역설한다. ‘무명의 백태’를 벗어버리고 불타는 삼독의 불길을 잠재우기만 하면, 실재계는  언제나 청정하고 평화로운 진여세계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나라와 어린양은 ‘이미 있으나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희망’을 대망한다. ‘무명의 백태’를 벗어버리고 ‘삼독의 불길을 꺼버리는 것’ 못지않게 사바세계의 참다운 변혁을 요구한다. 피조세계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반복이 아닌 새로움의 출현으로 존재는 약속실현을 위한 ‘희생’을 요구한다. 삶은 대속의 과정이자 창조적 전진을 위한 진통과정이다. 

 

불교는 유무양변을 중도와 반야공사상으로 극복하려는 종교로서 ‘무의 존재론’을 동아시아 문명 속에 수혈하였고, 기독교는 ‘유의 존재론’을 강조하였다. 그러나,『도덕경』 첫 머리의 명언처럼 ‘유와 무, 유욕과 무욕’은 한 진리가 표출된 산봉우리와 계곡의 모습니다. 불교의 ‘무의 존재론’은  드러난 산 봉우리에만 집착하는 기독교의 ‘유의 존재론’의 한계를 보완하고 교정시키고 균형잡아주는 명약이 된다. ‘정혜’(定慧)가 함께 가는 불교에게 기독교는 배운다.  그리하면 다석 유영모의 ‘없이 계신 하나님’이라는 멋있는 말이 더 잘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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