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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도덕, 또는 사랑
07/15/2011 17:07 댓글(1)   |  추천(1)
종교란 모름지기 절대적인 진리, 또는 그와 관련된 절대자와 나와의 직접적인 관계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우주와 인생의 기본 뜻을 깨달아 마음의 안정을 얻고 진실된 삶의 의미를 찾게 되는 것이다.


불교의 목적은 절대 진리인 연기법(緣起法)을 깨달아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데 있고, 이를 위해 시간을 아껴 경전을 읽고, 참선 수행할 것을 권하고 있다. 반면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신성성과 예수의 행적을 성경에 있는 그대로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와 기독교는 공통적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과 사회에 대한 윤리도덕을 곁들여 요청하고 있다. 경전의 대부분은 절대자와 나와의 관계보다는 도덕과 윤리, 그리고 사랑에 관한 인간들끼리의 관계와 의무로 채워져 있다. 불교에서는 자비와 보시의 마음을 주문하고 있으며, 기독교는 도둑질, 살인, 거짓말을 금기시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등 모세의 십계명을 생활의 덕목으로 삼을 것을 강조한다.


불교의 자비심과 기독교의 이웃사랑이 견성성불과 구원에 각각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가늠할 길이 없다. 종교의 원리와 도덕적 책무가 혼합이 되어 한꺼번에 이야기되고 있는 느낌이다. 캐톨릭의 미사시간은 믿음에 다가가기 위한 시간인지, 윤리교육 시간인지 크게 혼동된다.


아래의 글에서 ‘종교적 의무가 신앙에 의한 것이지만 그 의무의 실천적 주체가 사람이요, 실현 장소가 사회인만큼 종교는 사회를 떠나 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종교이든 간에 윤리적 덕목과 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다’라고 종교와 도덕 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종교와 도덕 간의 관계를 이해하기에는 여전히 미흡한 설명이다. 로빈슨크로소는 사회적 관계가 없으므로 윤리와 이웃사랑 없이도 신앙생활이 가능한 것 아닌가?


믿음 또는 깨달음과 관계가 없는 보시와 이웃사랑에 관한 달마대사와 양무제 간의 대화는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양무제 : 

 “짐은 즉위한 이래 수많은 절을 짓고 경전을 출판하였으며, 불교교단을 후원했는데 어떠한 공덕이 있겠소?”

달마대사 :

 “공덕이 될 것이 하나도 없소.“

양무제 :

 “어찌 공덕이 없다고 하는가?”

달마대사 :

 “그 공덕은 인간의 속세에서나 필요한 덧없는 행위이며 그 과보 역시 조금씩 흘러나오는 옹달샘에 불과할 뿐이오. 그림자가 실재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것은 실체가 아니듯 공덕 역시 허상일 뿐이요.”

양무제 :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공덕이란 무엇인가?”

달마대사 :

 “진정한 공덕이란 청정한 지혜의 완성에 있습니다. 이 지혜의 본질은 형상을 초월한 것이며 공적(空寂)한 것입니다. 이 진정한 공덕은 세간적인 방법으로는 추구되지 않는 것입니다.”


위의 대화에서 달마대사는 종교, 즉 깨달음과 속세의 자비, 보시, 공덕 등을 포함한 모든 도덕과 윤리를 철저히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불교와 기독교에서는 왜 아직도 윤리와 도덕을 강조하고 있는가?



‘종교적 생활과 윤리적 행위의 구별’

우리는 종교의 기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종교와 사회와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앞서 말한 종교의 기원은 초자연적․영적인 존재나 신비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는 오히려 종교의 기원을 의례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동서양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스미스는 “의례가 신화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신화가 의례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그에 의하면 신화는 관념의 소산이기에 변하는 것이지만 의례는 고정된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신화적인 입장에서의 신앙은 신도들의 재량 혹은 개별적인 심정에 의해 수정되는 것이지만 의례는 의무적인 것이어서 그와는 달리 고착성을 보인다. 이처럼 의례를 종교의 근원으로 보는 종교사회학자들의 주장이 오늘날의 종교와 사회와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고 있다.

베버나 트뢸치 같은 학자들도 종교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한다. 물론 칸트는 사회와 신앙보다는 윤리적인 최고선을 신의 존재근거로 보았고 러셀도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박에서 도덕을 무기로 삼았다. 또한 미국의 종교학자 파슨스, 바흐, 버거 등은 종교를 사회적 차원에서 조명하였는데, 이러한 내용은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게 된다. 이들은 뒤르켐처럼 종교를 사회의 종속변수로 보았다.

종교가 사회의 종속변수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은 윤리적 차원에서도 적용된다. 종교와 윤리학은 인륜생활에 있어서 공통적 의미를 갖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종교의 실천내용이 윤리적 덕목이 되는 경우이다. 그리스도교의 사랑, 불교의 자비, 유대교의 율법, 이슬람교 코란의 내용이 윤리적 덕목으로 주어진다. 사실 종교적 생활과 윤리적 행위는 구별된다. 전자는 감정에 의한 신앙적 생활이며 절대자를 전제로 한 영생 또는 윤회사상의 생활이다. 하지만 후자는 이성적 사유에 의한 현실적인 인륜생활이다. 종교적 생활의 동기와 목적은 절대자에 귀의코자 함에 있고 윤리적 생활의 근거는 이성적 사유이다. 가령 거짓말을 하지 말 것, 도둑질을 하지 말 것, 살인을 하지 말 것, 이웃을 사랑할 것, 법을 지킬 것 등은 인륜생활의 기본적 덕목이면서 종교의 근본원리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이성적 삶의 기본질서이지만 한쪽은 계시에 의해서, 다른 쪽은 의무로서 주어지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종교를 믿든 그렇지 않든 간에 종교적 의식과 윤리적 의무감을 떠날 수 없다. 가령 신을 믿지 않는다 함은 특정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 신의 관념마저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윤리적 의무는 그것을 지키는 것에 상관없이 필연적 존재로 주어진다. 이슬람교에 있어서는 종교의 교리에서 연유되며 불교에서는 윤리적 체계가 불교의 교리를 실천하는 것이 된다. 아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교의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이것이 신에 대한 사랑이요 인간적 본질의 실천이며 신앙의 사회 참여이다. 종교적 의무가 신앙에 의한 것이지만 그 의무의 실천적 주체가 사람이요, 실현 장소가 사회인만큼 뒤르켐이 말한 것처럼 종교는 사회를 떠나 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종교이든 간에 윤리적 덕목과 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다.

불교에서는 열반에 이르기를 희구하고, 그리스도교는 천당을 향해 간다 하더라도 그곳에 이르게 되는 근거는 사회이며 교리의 근본내용은 윤리적 의무 혹은 덕목으로서 사회조직에 적용된다. 물론 윤리적 행위의 근거를 자유에 둔 칸트는 교의와 덕목을 구별한다. 하지만 자유를 행위의 근거에서 찾는 것은 신의 존재근거를 간접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즉 윤리적 완성개념인 최고선에 도달하기 위해 사람에게 신성성이 주어져야 하고 최고선의 존재성을 위해 신이 요청되는 것이다. 종교적 교리의 실천을 위해 윤리적 덕목이 필요한 것처럼 사람이 최고선에 도달하기 위해서 종교적 교리가 요청된다. 헤겔 철학의 체계는 절대정신의 단계적 실현이다. 이 정신의 내용은 예술, 계시종교, 철학인데 유한과 무한의 통일로서의 신이다.

종교의 사회적 역할 1 : 종교를 받아들이는 사회 (박선목 / 부산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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