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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란 무엇인가?
07/11/2011 18:07 댓글(2)   |  추천(2)

촘스키의 언어학과 언어사상 (과학사상 2000년 겨울호) 


1. 들어가며


이 글의 목적은 『과학사상』의 독자들을 비롯한 일반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집필되었다. 따라서 촘스키의 학문과 사상에 대한 사전 지식을 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소개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고, 그런 이유로 너무 전문적인 내용은 제외하고 그의 핵심적이고 과학 사상과 관련된다고 판단되는 부분들에 대해 중점적으로 비전문적인 술어를 사용하여 논의한다. 촘스키의 주요 업적이 이루어진 두 분야가 언어학과 정치 비평/언론 비평이라 할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정치 비평에 대한 논의를 미루고 그의 언어학과 언어 사상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특히 그의 언어 사상의 핵심은 무엇이고, 그것이 인접 학문인 심리학, 철학, 인지과학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의 언어학의 방향은 무엇인지를 조망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 글의 또 다른 목적은 독자들로 하여금 촘스키의 원전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므로 관심 있는 독자들을 위해 촘스키의 관련 저서들을 언급하게 될 것이다.


2. 촘스키는 누구인가


촘스키의 약력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그에 대한 외부의 평가를 일별해 보자. 미국의 유력지인 『시카고 트리뷴』은 촘스키를 인류 역사상 가장 자주 인용되는 여덟 번째 인물로 묘사했고, 『뉴욕 타임즈』는 그를 '생존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인'이라 불렀다. 1980년부터 92년 사이에 인문·예술 인용지수(AHCI)에서 4천회를 기록했을 뿐 아니라, 과학 인용지수(SCI)에서도 1974년부터 92년 사이에 1619회나 인용되었다. 이러한 통계는 촘스키가 인문학에서 뿐 아니라 과학 분야에서도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984년 미국 심리학회로부터 특별 과학공로상을 수상했고, 1988년에는 기초과학에 대한 공헌으로 일본판 노벨상이라 할 교토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대학에서 명예 학위를 받았고 강연을 했다. 그는 지금까지 약 천 여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80여권의 저서를 냈는데 이중 절반 이상이 정치 비평서이고 나머지가 언어학과 철학에 대한 것이다.

 

물론 외부적 평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더욱이 촘스키 자신이 경고하다시피 도표와 수식, 통계 수치야말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위의 수치들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선택적이고 주도면밀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유보적 태도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세계적 석학이자 현대의 대사상가로서의 촘스키의 학문에 대해 알아볼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아브람 노암 촘스키(Avram Noam Chomsky)는 펜실베니아주의 필라델피아에서 1928년 12월 7일에 유태계 러시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아났다. 아버지는 저명한 히브러어 학자였고 어머니와 외가쪽은 정치 의식이 매우 높을 뿐 아니라 특히 사회주의는 물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경도돼 있는 친척들이 많았다. 촘스키는 미국의 교육 사상가인 존 듀이의 교육 방침을 따르는 실험적이고 진보적인 오크레인 컨추리 초등학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필라델피아의 센트럴 하이스쿨로 진학한다. 매우 경쟁적이고 대학 진학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 이 학교에서 촘스키는 질식할 것 같은 학교 분위기로 인해 매우 불행했다고 회고한다. 흥미로운 점은 촘스키 자신의 평가에 의하자면 MIT의 면학 분위기가 바로 오크레인 컨추리에서처럼 창조적 사고를 권장하고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자유로운 것이라고 하여 교육에 대한 그의 일면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촘스키 자신도 필자와의 대담(『신동아』(2000년3월호)에서 밝힌바 있듯이, 교육의 역할은 무엇을 가르치거나 계도하려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오크레인에서처럼 학생들의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고양시키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고 주장하여 루소-듀이로 이어지는 자유주의 교육 철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펜실베니아 대학교에 진학한 후, 한때는 대학의 면학 분위기가 센트럴 하이스쿨에서와 마찬가지로 억압적인데 실망하여 중퇴를 고려하기도 하지만 스승인 젤리그 해리스의 영향으로 학업을 계속한다. 언어학자인 해리스의 학문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의 정치적 견해에 동조해서라는 것이 그가 학교에 계속 남아있게 된 이유였다. 비록 학부생이었지만 해리스의 소개와 격려로 그는 대학원에서 넬슨 굿맨, 네이탄 화인 등으로부터 철학, 수학 등을 청강하며 언어학에 대한 관심도 계속 유지하게 된다. 그는 하버드 대하교의 특별연구원(Society of Fellows)으로 있으면서 펜실베니아 대학의 특별 배려로 그가 저서를 출판할 목적으로 준비중이던 방대한 논문의 일부를 제출함으로써 박사학위를 받게된다. 스물 아홉에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부교수가 되었고 서른 두 살에 정교수가 되었다. 서른 일곱에 석좌교수가 되었고 마침내 마흔 일곱의 나이에 아주 드문 경우이지만 인스티튜트 프로페서(Institute Professor)로 임명되어 현재 언어·철학과에 재직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촘스키의 정치적 측면을 다루지 않을 예정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춘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의 정치적인 측면에 관심을 가질 일부 독자들을 위해서, 간단하게나마 촘스키의 정치적 지평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촘스키는 언어학 분야에서 지명도를 확보해가던 시기는 베트남 전쟁을 비롯하여 많은 사회적 이슈들이 폭발하던 1960년대였다. 촉망받는 언어학자이자 대학교수로서의 안락한 소시민적 삶과 양심의 지시에 따라 지식인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도덕적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자신의 선택이 스스로를 감옥으로 이끌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있었지만, 베트남전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1966년에는 "지식인의 책무"라는 글을 『뉴욕타임즈』의 서평란에 기고한다. 촘스키를 일약 전 세계적 스타로 자리매김한 이 글에서, 그는 지식인이 정부의 거짓말을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7년 10월에 촘스키는 국방성과 법무성 앞에서 진행된 반전데모에 참가하였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투옥되었다. 촘스키와 한방에 투옥되었던 소설가 노먼 메일러는 촘스키에 대해 갸름하고 날카로운 인상을 가졌고 고행자의 표정이었으며 부드럽지만 절대적인 도덕성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했다. 촘스키는 이후에도 끊임없이 미국의 개입주의적 대외정책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을 가했고 베트남과 니카라과를 방문하기도 했다. 미국의 주류 언론의 이중성을 끊임없이 파헤치고 공격한 댓가로 그는 1960년대 이후 『뉴욕타임즈』를 비롯한 주류 언론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하기도 한다. 1990년대 초에 벌어진 걸프전(Gulf War)에서의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 행태에 대한 비판에 이어 코소보, 동티모르 등에서의 인권유린에 대한 고발 뿐 아니라 최근에는 투기성 유동자금의 폐악을 비롯한 신자유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누구 못지 않게 강력하고도 끈질기게 경고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부터 촘스키의 언어학과, 인접 학문들인 심리학, 철학, 인지과학에 있어서의 촘스키의 언어학의 영향에 대해 알아보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는 이를 다음과 같은 몇 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기술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전적으로 필자의 개인적 취향과 이해력에 따른 자의적이고 개인적인 분류임을 밝혀둔다.

  

3. 촘스키, 현대 언어학, 그리고 인접 학문들

 

오늘날 촘스키가 차지하는 지위는 현대 언어학 내에서만 독특한 것이 아니라, 언어학의 전 역사에서도 그 유래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필자는 이미 앞에서 통계와 각종 기록을 통해 암시했다. 그의 언어 이론을 정초한 첫 저서는 1957년에 출판된 『통사구조』(Syntactic Structures)이다. 그러나 그의 언어학의 본체와 사상을 집대성한 저서는 사실 당시에 출판이 거절되었던 논문인 『언어 이론의 논리구조』(1955)이다. 이 논문은 그가 박사학위 청구 논문으로 펜실베니아 대학에 제출한 논문을 일부분으로 포함하고 있는 보다 방대한 것으로 당시에는 MIT 출판부에 의해 출판에 앞서 학술 저널에 발표를 해야된다는 이유로 출판이 거절되었고 이런 저런 이유로 1975년에야 출판되는 기이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하여튼 『통사구조』에 제시된 소위 변형생성문법(transformational-generative grammar)라는 기다란 이름의 이론이 여러 번의 수정과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에는 최소주의 프로그램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촘스키의 언어학이 중요하다는 것은 모든 학자들이, 혹은 대부분의 언어학자들이 그의 언어학 이론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적어도 특정한 문제에 관해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고자 할 때 그에 관한 촘스키의 견해와 관련짓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1969년 촘스키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언어와 정신의 철학에 대해 강연했을 때 천 명이 넘는 학생과 교수들이 그의 강의를 경청했다는 사실은 촘스키가 제시한 변형생성문법이라는 특정한 이론 언어학이 태동된 지 일천한 역사를 생각할 때 아주 놀라운 현상이다.

 

촘스키의 언어학이 심리학이나 철학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논의할 것이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하는 가장 뚜렷한 특성이 호모 사피엔스라는 용어에서 암시되듯이 사고 능력이나 지능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 능력이라는 사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다.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이 '사고'라는 것이 말이나 글로써 구체화되지 않고서도 가능한지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답이 무엇이든 간에, 언어는 인간 활동의 모든 면에서 극히 중요하고, 언어가 없다면 가장 초보적인 의사소통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의사소통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언어 연구가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데, 그리고 이를 목표로 삼는 심리학과 철학의 연구에서, 어떠한 기여를 할 수 있는지는 자명한 것이다. 오늘날 언어학이란 학문이 그 자체를 위해서 뿐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는 심리학이나 철학 등의 여타 관련 학문 분야에 기여하기 위해서도 연구할 가치가 충분한 학문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면 그것은 바로 언어학에 기여한 촘스키의 공로라 할 것이다.

 

방금 우리는 인간 본성을 연구하는데 언어 연구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는 언어가 유일하지는 않겠지만 독특하게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라고도 언급했다. 그렇다면 언어란 무엇인가? 모든 문제는 바로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촘스키 이전에는 소쉬르가, 그 이전에는 또 훔볼트, 플라톤 등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제시했었다. 촘스키를 필두로 하는 현대 이론 언어학의 목적도 '언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과학적인 답을 제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이 언어와 사고의 관계를 논하는 데 있어서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다.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은 이러한 목적에 맞게 언어의 두드러진 특징 몇 가지를 수학적으로 명시적이고 정확하게 기술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촘스키의 언어학의 특성을 다음 단락에서 자세히 다루기 전에 간략하게 살펴보면 이렇다. 초기의 모델을 지칭하는 변형생성문법에서 1980년대 이후에는 포괄적으로 생성문법이라 불리는 촘스키의 언어학은 언어와 관련한 어린아이의 능력, 즉 어린아이가 접할 수 있는 언어 자료로부터 구조적 규칙성 (즉 문법 규칙)을 이끌어내고, 이 규칙들을 이용해서 전에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문장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과학적 방법으로 규명하려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촘스키는 특정 언어들, 이를테면 한국어, 영어, 스와힐리어 등의 자연 언어들에서 문법 규칙을 결정하는 일반 원리는 상당한 정도로 모든 인간 언어에 공통된다는 주장을 제시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원리들은 매우 특수하고 뚜렷하므로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이러한 원리들은 인간 본성의 일부로서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유전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 능력을 설명하고자 하는 철학자나 심리학자는 물론 생물학자에게도 촘스키의 생성문법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촘스키의 입장은 1990년대 이후 더욱 강력해져서 언어학의 성공 여부는 이제 생물학에 달려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촘스키의 언어학과 그것이 심리학이나 철학, 그리고 인지과학 등의 인접 학문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우리가 알아볼 필요 혹은 가치가 있다는 점은 이제 명백해졌을 것이다. 촘스키의 주장들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각자의 자유겠지만 적어도 그의 주장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그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하기 위해서라도 우선은 촘스키의 언어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4. 촘스키 생성문법과 현대 언어학의 목표


촘스키 언어학의 태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통사구조』가 출간되던 전후  시기에 지성계를 휩쓸었던 블룸필드(Bloomfield) 학파의 구조주의 언어학 전통, 스키너(Skinner)를 필두로 하여 견고한 성곽을 쌓고 있던 행동주의·경험주의 심리학 전통에 대한 언급부터 해야할 것 같다.

 

비록 언어학을 자율적/독립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으로 만드는 데 블룸필드가 누구보다도 많은 공헌을 했지만, 그는 자신의 기념비적 저서인 『언어』(1933)를 쓰게 되었을 당시 왓슨 등이 주창한 행동주의 심리학을 언어 기술의 틀로서 채택한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블룸필드 언어학의 맹점은 구조주의 언어학의 일반적 맹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언어학의 목표를 현장 방법(field method)을 통해 자료를 수집한 후 적정한 문법을 발견하는 발견 절차(discovery procedure)로 간주하고, 직접적으로 관찰할 수 없거나 물리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모든 데이터를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것이다. 이점이야말로 구조주의 언어학과 경험주의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여기서 자세한 논의를 할 수는 없지만 촘스키는 언어학의 목표가 문법의 발견 절차의 추구가 아니라 경쟁 문법간의 평가 절차로 옮겨가야 한다고 반박하였다.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사항은 언어 연구 대상에 대한 개념의 정립이다. 블룸필드를 포함하는 미국의 구조주의자들이 수행한 북아메리카의 언어학은 현장 방법을 통해서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그리고 전에 듣거나 배우지 않은 많은 인디언 언어들을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기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이들의 언어학은 주어진 언어 자료에만 입각하여 그 언어의 옳은 문법을 자동적으로 발견하는 '발견 절차(discovery procedure)'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연구 태도의 부수적 결과로서, 보아스가 언급했다시피, 인간의 언어에서 발견되는 다양성의 폭은 좀 더 친숙한 유럽 언어들의 문법적 기술을 토대로 일반화해서 생각했을 경우보다 훨씬 더 크다는 인식이었다. 다시 말하면 언어의 유사성보다는 다양성에 대한 인식을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보아스와 같은 이는 결론적으로 언어는 제각기 독특한 문법 구조를 가지고 있으므로, 각 언어에 맞는 기술 범주(記述範疇)를 찾는 것이 언어학자의 과제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대해 촘스키는 언어 기술의 대상으로 실제 발화된 언어 자료가 아니라 그러한 발화 자료를 생성하도록 해주는 일련의 규칙 체계를 찾아내는 것이 언어학자의 임무라고 주장하였다. 규칙 체계를 그는 언어 능력(linguistic competence)라 부르면서 이를 실제의 발화 자료인 언어 수행(linguistic performance)와 구별하였다. 이러한 이분법적 개념의 구분은 대략 소쉬르의 랑그(langue)와 빠롤(parole)에 각각 대응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촘스키가 언어 연구의 대상으로 언어 수행보다 언어 능력을 강조하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언어 수행은 기억의 상실, 기분 상태, 등등의 다양한 외부 요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언어의 본질을 반영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는 점이 한 가지 이유이다. 이에 반해 언어 능력이야말로 해당 언어의 화자가 구사하는 언어의 모든 문법적 문장과 오직 문법적 문장들만을 생성해내는 규칙들의 집합이므로 이러한 규칙 체계를 규명하는 것이 언어의 본질을 밝히는 첩경이다.

 

그러나 언어 능력의 탐구는 어쩔 수 없이 간접적인 방법으로, 즉 모국어 화자의 발화 자료를 근거로 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때 발화 자료는 동질적인 언어 사회의 이상화된 화자와 청자를 상정해야 한다고 촘스키는 주장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촘스키 언어학파 의 반대편에 서있는 많은 학자들로부터 격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촘스키의 혹독한 비판을 받으면서 혜성처럼 떠오른 새로운 언어(습득)이론에 자리를 내준 것은 스키너의 행동주의 혹은 경험주의 심리학이었다. 대표적 저서인 『언어행동』(1957)을 통해 나타난 스키너의 주장에 따르자면, 동물의 행동을 예측하고 통제하는 데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외부 절차 (예를 들면, 자극, 반응, 강화 등)를 통해 인간의 행동, 특히 언어 행동을 설명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언어 자료를 충분히 주고 이를 연습시키면, 인간은 언어를 습득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촘스키가 볼 때 이것은 인간 행동의 근본적인 특성인 창조성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서른 살의 촘스키는 이듬해에 『랭귀지』에 기고한 서평에서 이러한 점을 강력하게 개진함으로써 아성으로만 여겨졌던 행동주의에 일격을 가했다. 촘스키의 주장에 의하면, 스키너의 학설은 어린아이조차도 생전 처음 듣는 다양한 문장을 생성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인간의 창조성을 부인한다 것이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듯이, 어린아이는 두 세 살만 되어도 주어진 언어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창조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촘스키가 주장했다시피, 인간의 두뇌 속에 유전적으로 정해진 언어습득장치를 설정하지 않고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생득적으로 주어진 이러한 언어능력을 촉발시키는 데 있어서 경험의 역할을 촘스키가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행동주의 심리학과 관련하여 또 하나 살펴보아야 할 점은 자극, 반응, 조건화, 강화 등과 같은 용어들이 너무 애매하고 경험적으로 무의미해서 어떤 것이든 설명할 수 있는 맹점이 있다는 촘스키의 지적이다. 또한 명백한 반응이 없는 경우 행동주의자들은 관측된 적도 없고 관측할 수도 없는 소위 '반응경향'이라는 용어 속으로 피신한다고 촘스키는 지적하였다. 촘스키는 스키너의 행동주의적 혹은 경험주의적 심리학을 언어학적인 이유 외에도 정치적인 악용의 소지라는 점에서 비판했지만 이에 대한 논의는 이 글의 성격상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촘스키의 대안은 무엇인가? 『통사구조』의 6장에서 촘스키가 '언어이론의 목표'라는 제목을 달기도 했었지만, 그가 블룸필드 학파나 스키너류의 행동주의 심리학자들과 뚜렷하게 구분하면서 강조한 두 가지 개념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 하나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간 언어의 창조성에 대한 강조이다. 문법 이론은 한 언어를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전에 들어본 적도 사용해본 적도 없는 문장을 생성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반영해야 한다고 촘스키는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촘스키 자신도 나중에야 인식한 것이지만 훔볼트나 소쉬르에 의해서도 제기된 것이긴 하다.

 

언어 이론의 목표와 관련하여 촘스키가 강조한 다른 한 가지는 모국어 화자의 직관이다. 다시 말하면 문법에 의해 생성된 문장들은 모국어 화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또 오직 그러한 문장들만 생성해야 한다.

 

언어의 창조성과 모국어 화자의 직관을 설명해야 한다는 언어 이론의 궁극적 목표에 덧붙여서, 촘스키는 블룸필드 학파가 추구한 발견 절차(discovery procedure)를 포기하고, 좀 더 온건한 목표라고 스스로 명명했던 문법에 대한 평가 절차(evaluation procedure)를 확립하는 것을 당면한 목표로 제시했다. 『통사구조』의 도입부에서 촘스키는 문법이란 분석의 대상이 되는 언어의 문장을 '만들어내기' 위한 일종의 장치라 하였다. 여기서 '만들어내다'라는 말은 후에 '생성하다(generate)'란 용어로 대치되는 데, 오늘날 촘스키의 언어학이 '생성문법(generative grammar)이라 불리게 된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이전의 구조주의 언어학이 음운론 중심의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같은 성질을 띠었다. 이에 비해 촘스키의 생성문법은 발음과 음의 배열을 연구하는 음운론, 어휘들의 배열을 통해 문장을 구성하는 원리를 밝히는 통사론,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밝히는 의미론의 세 가지 하위 부분 중에서 통사론에 다소 경도된 측면이 있다.

 

이제 생성문법이라 불리는 촘스키의 언어학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논할 단계가 되었다.

촘스키 언어학은 처음에 변형문법(transformational grammar)으로 불리다가 후에 생성문법(generative grammar) 혹은 양자의 결합형인 변형생성문법으로 불리었다. 그의 스승인 해리스가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이긴 하지만 언어 기술에서 변형이란 개념을 체계적으로 사용한 것은 촘스키였다. 가장 손쉬운 예로는 능동문에서 수동문을 도출하는 수동 변형을 들 수 있다. 변형이란 개념은 심층 구조(deep structure)와 표층 구조(surface structure)라는 개념과 더불어 언어학 바깥에서도 널리 채택된 학술적 용어가 되었다. 이 개념은 가령 What do you like?란 영어 의문문이 실은 you like what이란 심층구조에서 의문문 변형 규칙을 통해 만들어진 표층 구조이다. 

  

『통사구조』에 제시된 변형은 그 수가 무수히 많았으나 촘스키는 『통사이론의 제양상』,『지배와 결속이론』등으로 생성문법을 수정·발전시키면서 이 규칙들을 이동 규칙 하나로 줄이고 그 대신 다수의 원리와 서로 다른 값을 가지는 매개 변항을 제시하였다. 결속 이론, 통제 이론, 한계 이론, 엑스바 이론 등의 모듈이 다양한 언어들을 설명하는 원리들로 제시되었고, 언어간의 상이성은 서로 다른 값을 가지는 매개변항으로 설명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보편언어가 있다라는 촘스키의 주장은 얼핏 보면 모순되게 들린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6천여 가지 이상의 언어가 있기 때문이다. 보편언어라는 개념은 현상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에 의해 주어진 자연 언어에 공통된 특성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한국어와 영어에 모두 동사라는 것이 있고, 중국어와 영어는 어순이 비슷하다는 등의 특성들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 언어에 내재하는 공통의 언어 모습이 있고, 각각의 개별 언어들은 이들 가운데서 매개변항의 서로 다른 값을 선택한 결과인 것이다. 어순에 관해 말하자면, 한국어는 후치사를 선택한 반면에 영어는 전치사를 선택한 것이고, 한국어는 목적어를 동사 앞에 둔다는 선택을 했다면, 영어는 목적어를 동사의 뒤에 둔다는 선택을 했다는 의미이다. 


5. 촘스키 언어학과 심리학


『통사구조』와 같은 촘스키의 초기 저서에서는 독립 학문으로서의 언어학의 위상을 강조하였다. 언어학을 인지 심리학(cognitive psychology)의 일부로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 이후의 저서들인 『통사이론의 제양상』,『데카르트 언어학』,『언어와 정신』에 와서이다. 오늘날 폭넓게 인정되는 인지과학의 태동이 이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통사구조』가 출판되던 같은 해에 스키너의 『언어행동』이 나왔는데, 이 저서는 행동주의적 학습 이론의 틀 안에서 언어 습득을 설명하고자 한 가장 상세한 것이었다. 촘스키는 곧바로 이에 대한 서평을 『뉴욕타임스』의 서평란에 기고함으로써 일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행동주의 언어습득 이론에 대한 촘스키의 반박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이 이론이 언어 습득의 창조성을 설명해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언어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인간 행동의 한 양상인 창조성은 자극과 반응이라는 학습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임에 틀림없다. 게다가 행동주의 심리학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게 되는 데, 언어는 오히려 양자를 구별해주는 가장 뚜렷한 특성이므로 촘스키가 보기에 행동주의 언어습득 이론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자극, 반응, 조건화, 강화 등의 행동주의 용어들이 비록 정밀해질 수는 있으나 실제로 언어에 이들을 적용하기에는 너무 모호하여 어느 것에나 통용될 수 있고 따라서 경험적 내용을 전혀 갖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어떠한 반응도 드러나지 않는 경우 행동주의자들은 소위 '반응경향'이라는 관찰되지 않은 영역으로 도피해버린다는 것이 촘스키의 지적이다. 셋째로는 새로운 문장의 형성에 대해 행동주의자들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거나 혹은 막연한 유추(analogy) 개념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행동주의에 대한 촘스키의 비판이 물론 언어 자체나, 언어 사용의 어떠한 측면에서도 자극-반응 모델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온당하게 기술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따라서 촘스키는 그 대안으로서 앞에서 살펴본 소위 생성문법 이론을 제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찍이 1958년에 촘스키는 『언어의 과학』을 쓴 저명한 심리학자인 조지 밀러와 공동으로 "유한 상태 언어"라는 논문을 썼고, 1963년에는 『수리심리학 백서』 중 일부를 공동으로 집필했다. 이를 통해 촘스키는 언어 수행의 기저를 이루는 심리적 메커니즘의 연구에 대하여 생성문법이 가지는 의미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 글의 결론은 유한 상태 문법이 영어와 기타 언어의 일부 문장들을 생성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60년대에 유행하던 구 구조문법(Phrase Structure Grammar) 역시 문장의 구조 의존성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촘스키는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한편 1960년대 초반에 빅토르 잉베는 '심층 가설'이라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는 John's friend's wife's father's gardener's daughter's hat과 같은 좌분지 구조는 단기 기억장치에 너무 많은 부담을 주므로 그것보다는 우분지 구조를 사용하는 것이 화자로 하여금 과도한 심층을 피할 수 있게 한다고 주장하였다. 촘스키는 이러한 주장은 물론 옳지 않다는 점을 즉시 지적하였다. 한국어와 일본어처럼 좌분지 구조를 가지는 자연 언어들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잉베와 촘스키 사이의 논쟁에서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은 생성문법으로부터 도출된 개념에 의해 언어의 형식적 특성을 조사하는 것은 언어 수행의 기저를 이루는 심리적 메커니즘과 처리의 연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이미 1950년대 말에 조지 밀러가 촘스키와 공동으로 작업했다는 사실이 바로 이러한 사정을 심리학자들이 재빨리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960년대 초에 심리언어학(psycholinguistics)이 새로운 분과 학문으로 출현하였는데, 촘스키 사상의 혁명적인 충격은 무엇보다도 이 새로운 분과 학문을 창조했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초창기의 심리언어학 논문 중 일부는 촘스키의 변형규칙의 심리학적 타당성을 검증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졌다. 이후로도 심리언어학은 촘스키의 생성문법이 수정과 발전을 거듭하면서 그에 따른 규칙과 원리들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수단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촘스키의 생성문법이 원리와 매개변항이론이라 불리던 단계에서 많은 심리언어학자들과 언어학자들은 여러 가지 문법의 모듈 중 하나인 한계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실험을 하기도 했다.

 

지난 20여년 동안에 이루어진 심리언어학 연구의 업적 중 두드러진 분야는 아동 언어 습득에 관한 것이었다. 연구의 결과들은 촘스키의 언어 생득설과 보편언어 가설을 모두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모든 아동들의 모국어 습득 과정은 대략 비슷한 단계를 거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옹알이 단계, 한 단어 단계, 두 단어 단계, 전보문 단계 등이 그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단계들이 언어 습득 결정 요소에 관한 거의 모든 가설들과도 일치한다는 점이다. 더욱이 서로 구분되는 뚜렷한 각 단계에서 모든 아동들이 문화적·사회경제적 환경에 관계없이, 그리고 그들이 접하는 언어 자료와 무관하게 발달의 동일한 단계에서 비슷한 구조의 발화를 생산한다는 사실이다. 촘스키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아이들이 유전적으로 정해진 언어습득장치(LAD, language acquisition devide)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가설을 증명해주는 증거로 해석한다.

 

그러나 오늘날 언어 습득이 좀 더 일반적인 인지 능력(cognitive faculty)의 성숙이라는 관점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여기는 심리언어학자들이 더욱 더 많아지고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언어 습득에 미치는 촘스키의 영향은 오늘날 이전 시기에 비해 강하거나 직접적이지 못하다. 학자들이 순수한 문법적 능력의 습득에 기울이는 관심은 현저히 줄어들고 있고, 이에 반비례하여 촘스키가 언어 수행이라 불렀던 분야에서의 습득 및 소통적 가치의 습득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은 촘스키 언어학의 오류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의 견해가 틀렸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증거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6. 촘스키 언어학과 정신의 철학


이번 절에서는 생성문법에 담긴 철학적 의미를 추적해보자. 여기서 조심할 점은 이제 더 이상 언어학, 철학, 심리학, 생물학 등이 서로 분리된 독립 학문으로서보다는, 적어도 촘스키의 언어학이 관련된 한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이라는 이름 아래 통합되고 있거나 통합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촘스키는 언어학이 인간 정신의 연구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으며, 지금도 이성주의와 경험주의 간의 오래된 철학적 논쟁에서 어느 하나의 입장에 더 유리한 증거를 제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성주의자들은 정신 또는 이성이 인간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경험주의자들은 모든 지식이 경험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한다. 정신과 외부 세계에 대한 관계에 대해서 17세기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로크, 버클리, 흄 등과 같은 영국의 경험주의자들은 지식이란 단지 감각 인상의 수동적인 기록 및 연상에 의한 이들 감각 인상의 결합체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와 반대로 데카르트와 같은 대륙 이성주의자들은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과 이해는 관념에 의지하며, 이 관념은 선천적·유전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블룸필드 학파나 스키너를 필두로 하는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철저하게 경험주의에 기대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지식과 인간의 행동은 전적으로 환경에 의해 결정되고, 이 점에서 인간과 다른 동물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물리주의(physicalism) 혹은 결정주의(determinism)로 이어졌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촘스키의 인간관은 이와 다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많은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 능력은 지식을 습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또한 우리가 외부 환경의 자극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자유 행위자로 행동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인간의 창조적 언어사용이나 언어 습득이 이러한 가정 하에서만 설명될 수 있음을 촘스키는 누누이 강조해왔다. 촘스키의 이성주의적 철학 사상은 특히 『데카르트 언어학』, 『언어와 정신』,『지식과 자유의 문제』등에서 자세히 다루어지고 있다.

 

다음으로 다루게 될 철학적 중요성을 띠는 문제는 촘스키의 보편문법(universal grammar) 개념이다. 보아스나 블룸필드 등으로 대표되는 구조주의 언어학자들은 언어의 다양성과 상이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촘스키는 이를 반대하면서 언어의 유사성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보편언어의 존재를 주장했다. 그는 예스페르센을 인용하면서 각 언어의 형태소는 서로 다르겠지만 구조는 보편적으로 같다는 주장을 제시했는데, 놀랍게도 이러한 견해는 13세기의 철학자인 로저 베이컨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문법은 사실상 모든 언어에 동일하다. 비록 우연히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만 말이다"라고 말한다.

 

촘스키는 아이들의 모국어 습득이 그의 보편언어 가설을 지지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아이들은 인종과 혈통에 관계없이 통일한 언어 습득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이 한정된 짧은 시간에 불충분한 자료에 의지해서 완벽하게 언어를 습득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보편문법 원리와 이를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이른바 언어 생득설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촘스키의 생각이다. 이러한 본유 관념은 데카르트를 거쳐 플라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시사적인 것은 촘스키가 사용하기 시작해서 학술용어가 되어가고 있는 '플라톤의 문제(Plato's Problem)'라는 개념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인간은 무지한 상태로 태어나는 것 같고, 세상에는 인간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이용할 수 있는 증거가 제한되어있는 것 같은데도, 어떻게 해서 인간은 그토록이나 많이 알게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플라톤은 태어날 때의 인간의 정신은 아무런 지식이 없는 텅 빈 상태라는 것을 부인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 점이 바로 경험주의와 정반대되고, 촘스키와는 동일한 입장이다. 촘스키의 해답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아이들은 보편문법, 다시 말해 인간 언어의 구조를 지배하는 보편 원리들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가정하지 않는다면 언어 습득은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7. 촘스키 언어학의 현재와 전망


지금까지 우리는 간략하게나마 촘스키 언어학의 내용과 인접 학문에 대한 관련성을 살펴보았다. 촘스키의 언어학이 해당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 위치를 쌓아올렸음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오늘날 많은 경쟁적 언어 이론들이 제시되었지만 그러나 촘스키 언어학의 헤게모니를 위협할 정도인지, 혹은 다른 말로 토마스 쿤이 말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불러올 만한 대안적 언어이론이 제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못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최근 10년만 뒤돌아보자면 촘스키의 언어 이론은  최소주의 프로그램(Minimalist Program)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 번 변화를 겪었다. 원리와 매개변항 이론에서 제시되었던 다수의 원리들이 해체되거나 제거되었고, 심지어는 변형생성문법의 근간으로 기능했던 심층 구조와 표층 구조라는 개념조차 제거되었다. 반대파의 주장에 따르자면 촘스키의 최근 이론은 너무 자주, 너무 급격하게 바뀔 뿐만 아니라 개념들이 너무 추상화되었다. 추상화 자체, 혹은 어떤 이론이 너무 자주 바뀐다는 사실 자체가 평가의 잣대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촘스키 언어학이 아직도 수정과 정교화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 위해 하임스가 말했다시피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날개를 펴기까지 한 세대 남짓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여기서 논의를 하지 않은 항목인 촘스키의 언어학과 인지 과학과의 관계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촘스키는 소위 '인지주의(cognitivism)'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쳐왔다. 비록 그 자신은 인지 과학 자체에는 어떠한 것에도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심지어는 인지 과학의 태동을 촘스키와 그의 동료들이 MIT에서 가졌던 한 회합으로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움직임도 있을 정도이다.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언어의 연구는 독립적 분과 학문에서 다시금 인지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된 현상으로 재인식되게 되었다. 촘스키의 최근 저술에서는 언어학이란 말 대신에 인지 과학이란 용어를 선호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언어학, 심리학, 철학, 생물학에 두루 관련되거나 아니면 이들을 모두 아우르는 새로운 학문 분야로서의 인지 과학은 오늘날 컴퓨터 공학의 발달과 더불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인지과학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에 대해 실은 아무도 믿을만한 전망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촘스키는 앞에서 언급한 필자와의 대담에서 인지 과학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느냐는 필자의 물음에 대해 흥미롭게도 구제금융을 받은 사람은 한국 국민이 아니라 국제 투자가들입니다.  한국 국민들은 가혹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으로 고통을 받았고, 은행가와 투자가의 이익을 보장하는 사회적 비용을 국민이 떠안은 셈이지요.” 촘스키의 말이다.

 

일전에 한국을 방문했던 피에르 부르디외도 ‘신자유주의’에 대항할 지식인 연대의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지만,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일관되게 그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높여온 사람이 바로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사회비평가인 노엄 촘스키 교수이다. 아담 스미스의 고전적 자유주의에서는 정의 사회를 위한 결과의 공정 분배가 핵이었으나, 신자유주의는 가난한 자로부터 부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이 촘스키의 분석이다. 노동의 이동은 막고 자본의 이동은 허용한 결과, 해지펀드의 농락으로 인한 세계적 경제 혼란이 초래되었음은 우리가 이미 몸소 겪었다. 초국적 기업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다자간투자협정과 같은 음모들이 아직도 진행 중이므로 끊임없이 경계하고 투쟁해야 한다고 촘스키는 경고한다. 사기업이 왜 문제인가? 촘스키의 말을 들어보자. “전체주의, 군국주의, 제도의 폭력 등도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지만, 사기업이 더 위험한 이유는 돈에게는 국경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자는 거부되어도 송금은 거부되지 않지요. 사기업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이익을 추구하지만, 여기에 인권이나 정의, 부의 공정 분배와 같은 단어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굳이 이름을 대지 않더라도 오늘날 초국적 기업들이 국가를 형해화하고 무소불위의 폭력을 휘두르고 있음은 목도하는 그대로이다.

 

“좋은 사회”를 위한 촘스키의 투쟁은 언론 문제에서 단연 독특하다. 그는 사유언론이 광고주의 이익을 대변하고, 광고주는 언론 소유주의 이익을 보장함으로써 폐쇄된 이익의 고리를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사례를 보자. 1975년 인도네시아군은 포드정권의 암묵적 동의 아래 동티모르를 점령하여 무자비한 인종 청소를 자행했지만, 미국의 주류 언론들은 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바로 그 언론은 놀랍게도 월맹군의 캄보디아 학살이나 십여 년 후에 일어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해서 엄청난 물량의 보도를 해댔다. 후자의 경우 미국 석유회사의 사활적 이익이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방영된 다큐멘터리 『대중매체와 여론조작』에서 촘스키는 영국의 더 타임즈와 미국의 뉴욕타임즈의 보도 태도를 비교하면서 미국 주류 언론의 이중성을 폭로하여 전세계인들의 감명과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말대로 거대한 권력기관인 언론이 “좋은 사회”를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함은 자명하다.

 

세계 지식인 사회와 영향력 있는 언론 매체들이 침묵으로 일관할 때, 촘스키는 동티모르의 인권과 독립을 위해 일관되게 투쟁했고, 그 연장선에서 미국의 약소국에 대한 개입 정책에 대해서도 침묵하지 않았다. 레이건 정부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구실로 인구 10만도 안 되는 그레나다를 침공했을 때, 미국 언론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민주주의와 인권이란 허울로 도처에서 경찰 역할을 자임했지만, 미국은 실은 미국 국민이 아니라 일부 군수 업체의 이익을 위해 참견꾼 역할을 해왔을 뿐이다. 주지하다시피, 1980년 광주 항쟁 당시 미국은 허울을 벗어던지고 쿠데타군을 승인하는 본색을 드러내기도 했다. 공공보조로 성장한 군수 업체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길은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는 일이고, 이는 소련 붕괴 후 미국만이 유일 초강대국이 된 지금도 현실로 일어나고 있다.

 

1960년대에 베트남전 반대 운동이 미국 사회에 들끓었을 때 촘스키는 직접 전장을 방문하여 민간인 마을에 대한 미군의 무자비한 폭격을 고발하기도 했다. 노근리 사건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촘스키는 반전의 표시로 납세를 거부하기도 했고, 징집거부운동을 벌이던 청년들과 함께 데모에 참가하기도 했다. 당시 함께 체포되어 구금되었던 저명한 소설가 노먼 메일러는 촘스키에 대해 “야위고 날카로운 얼굴에 수도사같은 인상을 지녔고, 부드럽지만 완벽한 도덕성이 느껴지는 사람”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촘스키는 반미주의자인가? 인간의 존엄과 ‘좋은 사회’ 건설을 위해서라면 그는 모든 비난을 감수한다. 유태국가의 건설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열등국민화 함으로써 평화의 길이 더욱 멀어질 것이라는 이유로 그는 이스라엘 건국을 비판했다. 유태인인 그가 반유태주의자란 비난을 자초한 이유였지만, 그는 모든 ‘주의’와 이중잣대를 거부한다. 

 

촘스키의 투쟁 전선은 넓기만 하고, 길은 아직도 멀게만 보인다. 20세기를 점철했던 야만의 장면들이 아직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에 일견 분산되고 외로운 울림처럼 보이는 촘스키의 투쟁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는 ‘좋은 사회’의 건설이다. 각 개인이 자신의 의지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사회가 바로 그가 지향하는 사회이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그에게 무정부주의자란 이름을 걸어주었지만, 막상 자신은 이를 거부한다.

 

촘스키는 데카르트가 말하는 ‘건전한 양식’과 더불어 ‘이웃과의 연대’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시애틀의 세계무역기구(WTO) 회의가 조직화된 NGO 회원들의 저지로 실패하고 만 것이 본보기이다. 이런 맥락에서 전국 단위 선거보다 생활정치인 지방 선거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그의 촉구는 일천한 지방자치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 매우 시사적이다. 문명사회를 위한 촘스키의 투쟁은 위로 조지 오웰이나 에밀 졸라와 연결되고, 옆으로는 러셀이나 사르트르와 연결되며 수많은 제자와 동지들이 아래로 이어지고 있다. 동시대의 두 거장인 아인슈타인과 러셀에 대해 올바른 지식인의 전범으로 러셀을 꼽는 그의 태도에서 우리는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참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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