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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무엇인가?
06/30/2011 13:06 댓글(0)   |  추천(3)

미국의 경제학자인 베블렌(Veblen)은 ‘유한계급론(有閑階級論)’에서 전시효과를 위한 과시적소비가 부유하고 빈둥거리는 ‘유한계급’의 특징 중의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과시적소비란 소비로부터 얻어지는 직접적인 효용(效用; utilities)보다는 본인의 사회적 계급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 우선시되는 소비를 말한다. 


나를 과시하고 전시하는 소비는, 가령 실제의 효용과는 상관없이 부유층이 소유하는 루이비똥, 입생로랑, 폴로, 나이키, 페라리 등의 상품에 목매달아 하는 일반적인 소비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나의 소비와 구매 행태가 철저히 사회적인 경제현상에 의해 결정된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를 함으로 나 자체로 만족할 수 없고 불행한 것이다.


베블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의 만족은 아래와 같은 등식에 의해 결정된다 하였다.


(만족 또는 행복; Satisfaction) = (수단 또는 물질; Means) / (욕구; Desire)


사람들은 아무리 소유하고 있는 경제적 수단이나 재산이 많다 해도 지나치게 욕구와 욕심이 많으면 만족은 줄어드는 반면, 가난하여 재산이 없다 해도 욕심이 적어지면 큰 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옛날 우리 선조들이 읊조리던 ‘반소사음수 곡굉이침지 낙역재기중(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라는 말의 뜻이 고스란히 담겨진 논리라 할 수 있다.


아래의 글에서 안병욱 선생은 행복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들을 정연하게 제시하고 있다. 선생은 행복이란 다른 말로 빗대어 한마디(Metaphor)로 얘기하자면 그것은 “사랑과 노동과 신앙”이 모두 포함된 밀레의 그림 ‘만종’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오늘도 행복하기 위해 사는 우리들 모두 깊이 되새겨 볼 일이다.



행복의 메타포 / 안병욱


1) 앉은뱅이꽃의 노래


괴테의 시 가운데 ‘앉은뱅이꽃의 노래’라는 시가 있다.

어느 날, 들에 핀 한 떨기의 조그만 앉은뱅이꽃이 양의 젖을 짜는 순진무구한 시골 처녀의 발에 짓밟혀서 시들어 버리고 있다. 그러나 앉은뱅이꽃은 조금도 그것을 서러워하지 않는다. 추잡하고 못된 사내 녀석의 손에 무참히 꺾이지 않고 맑고 깨끗한 처녀에게 밟혔기 때문에 꽃으로 태어났던 보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시의 상징을 좋아한다. 들에 핀 조그만 꽃 한 송이에도 꽃으로서의 보람, 생명으로 태어났던 보람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람 있는 생(生)을 원한다. 누구나 보람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다. 보람 있는 일생을 마치고 싶어 한다. 우리 인생의 희열과 행복을 주는 것은 진실로 보람이다.


화가가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려고 캔버스 앞에 설 때, 작곡가가 좋은 노래를 지으려고 전심 몰두할 때, 어머니가 자식의 성공과 장래를 위해서 밤낮으로 수고할 때,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큰 일 작은 일에 정성된 노력을 기울일 때, 우리는 삶의 보람을 느낀다. 생의 보람을 느끼기 때문에 고생이 고생으로 느껴지지 않고 기쁨으로 변한다. 인간의 생에 빛과 기쁨을 주는 것은 곧 보람이다. 보람이 크면 클수록 우리의 기쁨도 크다.


자기의 생에 보람을 못 느낄 때, 허무의 감정과 의식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내가 하는 일이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절대로 인생의 허무주의자가 될 수 없다.


행복은 만인의 원(願)이다. 행복에의 의지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의지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인생의 사실이다. 행복한 생을 원하거든 먼저 생의 보람을 찾아야 한다. 보람 있는 생을 살 때 꽃의 향기가 짝하듯이 행복이 저절로 따른다.


나는 행복에 관해서 생각할 때마다 위대한 철학자 칸트의 말을 언제나 연상한다. 칸트에 의하면 행복한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복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행복을 직접 목적으로 삼지 말고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행동을 하고 또, 그러한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우리는 착한 사람이 행복하고 악한 사람이 불행한 것을 볼 때 그것이 당연한 인생의 질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악한 사람이 행복하고 착한 사람이 불행한 것을 볼 때 그것은 인생의 부당한 질서라고 생각한다. 어딘지 못마땅하게 느껴진다.


이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양심의 요구다. 착한 사람이 행복을 누리는 것이 인생의 자연이요, 또 필연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우리는 그것을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해서 또 인생에 정을 붙이고 살아가는 것이요, 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악한 사람이 행복을 누리고 착한 사람이 불행해야 한다고 하면,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지옥의 질서다. 저주받은 사회다. 그것은 인간의 사회가 아니고 악마의 나라다. 우리는 의식하건 안 하건 인생과 세계의 도덕적 질서를 굳게 믿고 살아가는 것이다.


행복이란 단어는 인생의 사정에서 가장 큰 캐피털 레터로 씌어진 말이다. 우리의 대화에 항상 오르내리고 우리의 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위치와 무게와 의미를 차지하는 단어다. 행복은 인생의 알파요, 오메가다.


서양 신화에 의하면 행복의 여신은 짓궂은 여신이다. 쫓아가면 도망한다. 냉정한 태도로 멀리하면 유혹하려고 든다. 단념하면 배후에서 사람을 조롱한다는 것이다. 행복의 여신은 이렇듯 다루기 어렵다는 것이다. 행복의 여신은 쫓기에도 안 되었고, 안 쫓기에도 안 되었다. 쫓으면 달아나고 안 쫓으면 유혹하고 단념하면 조롱한다.


너무 행복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 좋다. 행복에 개의치 않고 보람 있는 인생을 살려고 애쓰고 또 인생의 보람을 위해서 정성스럽게 일하노라면 뜻밖에도 행복의 여신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행복의 길은 행복에 해당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요,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일이다. 인생의 보람을 위해서 살고, 보람 있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보람, 이것이 행복의 중요한 열쇠가 아닐까?


2) 세 사람의 석공(石工)


20여 년 전에 배운 중학교 영어 교과서의 삽화가 하나가 생각난다. 어떤 교회를 짓는데 세 사람의 석공이 와서 날마다 대리석을 조각한다. 뭣 때문에 이 일을 하느냐고 물은 즉, 세 사람의 대답이 각각 다르다.


첫째 사람은 험상궂은 얼굴에 불평불만이 가득한 어조로, “죽지 못해서 이놈의 일을 하오.”하고 대답한다.

둘째 사람은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돈 벌려고 이 일을 하오.” 그는 첫째 사람처럼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불평을 갖지 않는다. 그렇다고 별로 행복감과 보람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셋째 사람은 평화로운 표정으로 만족스러운 대답을 한다.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대리석을 조각하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에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다.


이 삽화의 상징적 의미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사람은 저마다 정다운 마음의 안경을 쓰고 인생을 바라본다. 그 안경의 빛깔이 검고 흐린 사람도, 맑고 깨끗한 사람도 있다. 검은 안경을 쓰고 인생을 바라보느냐? 푸른 안경을 통해서 인생을 내다보느냐? 그것은 마음에 달린 문제다. 불평의 안경을 쓰고 인생을 내다보면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이 모두 불평 투성이요, 감사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인생에서 축복하고 싶은 것이 한없이 많을 것이다.


똑같은 달을 바라보면서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혹은 슬프게 혹은 정답게 혹은 허무하게 느껴진다. 행복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육체  를 쓰고 사는 정신인 이상, 또 남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인 이상, 누구든지 먹고 살기 위한 의식주와 명성과 사회적 지위가 필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돈 건강 가정 명성 쾌락 등은 행복에 필요한 조건이다. 이런 조건을 떠나서 우리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러나 행복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곧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행복하다는 것과 행복의 조건을 갖는다는 것과는 엄연히 구별해야 할 별개의 문제다. 집은 지으려면 돌과 나무와 흙이 필요하지만 그런 것을 갖추었다고 곧 집이 되는 것이 아님과 마찬가지 논리다.


행복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행복감을 떠나서 행복이 달리 있을 수 없다. 아무리 돈이 많고 명성이 높고 좋은 가정을 갖고 재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지면서도 불행한 사람, 또 그와 반대로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을 별로 갖지 못하면서도 사실한 행복한 사람을 우리는 세상에서 가끔 본다. 전자의 불행은 어디서 유래하며 후자의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없다.”라고 맹자(孟子)는 말했다. 그러나 맹자는 다시 선비는 항산이 없어도 항심이 있다고 단언했다. 맹자의 항산이란 말을 행복의 조건이란 말로 바꾸고, 항심이란 행복이란 말로 옮겨 놓아도 별로 의미에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행복의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행복할 수 없다. 그러나 선비는 행복의 조건을 못 갖추어도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맹자의 행복의 논리다. 행복의 조건이 행복의 객관적 요소라고 한다면, 행복감은 행복의 주관적 요소다. 행복은 이 두 가지 요소의 종합에 있다.


행복해질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가지면서도 행복해지지 못하는 비극의 원인은 어디에 있으며, 또 행복해질 만한 조건은 별로 갖추지 못하면서도 행복을 누리는 비결은 무엇일까? 맹자의 표현을 빌어서 말한다면, 항산이 없더라고 항심이 있을 수 있음은 어찌된 까닭일까?


그것은 요컨대 마음의 문제다. “사람은 자기의 결심하는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라고 링컨은 말했다. 행복이 마음의 문제라고 한다면 마음의 어떠한 문제일까?


3) 밀레의 만종(晩鐘)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밀레의 그림을 좋아했다. 보리 이삭을 줍는 그림도 좋았고, 씨 뿌리는 그림도 마음에 들었다. 어린 아기를 문턱에 앉히고 엄마가 아가에게 밥술을 떠 넣어 주는데 두 언니가 옆에 앉아서 동생을 귀여운 표정으로 지켜보는 그림은 나의 어린 가슴에 행복의 이미지로 아로새겨 주었다. 어린 아이가 팔 벌린 엄마를 향해서 아장아장 걸어가는 그림은 인생의 사랑과 평화를 그대로 표현한 그림 같았다. 양치는 목자가 들에서 기도하는 그림은 우리에게 경건을 가르쳐 준다.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서 밀레의 그림을 직접 눈앞에 보았을 때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이미지가 가슴 속에 그대로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에서 밀레의 ‘만종’의 그림 앞에 섰을 때, 나는 인생이 시와 진실에 부딪치는 것 같았다.


밀레는 렘브란트나 고호나 루벤스나 세잔 같은 대가에 비하면 이류의 화가밖에 안 된다. 그러나 나는 밀레 그림을 좋아한다. 그 소박성이 좋고, 그 진실성이 마음에 든다. 밀레 그림의 테마가 더욱 마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밀레는 일생 동안 일하는 농부들을 그의 화제(畵題)로 삼았다. 동리 사람들이 푼푼이 모아 준 노자로 파레 가서 그림 공부를 하였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농사를 지으면서 그림을 그렸다.


밀레는 위대한 화가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밀레의 소박하고 정직한 그림은 우리에게 인생의 시와 진실의 세계를 가르쳐 준다. 반다이크는 밀레의 ‘만종’을 평하여, “사랑과 노동과 신앙을 그린 인생의 성화(聖畵)”라고 했다. 나는 ‘만종’에서 행복의 메타포를 발견했다.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동물은 아니다. 사랑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나를 사랑해 주는 자가 필요한 동시에 내가 사랑할 생명이 필요하다. 사랑이 없는 생은 결코 행복한 생이 아니다. 사랑은 행복의 열쇠다. 사랑하는 기쁨과 사랑을 받는 보람을 가질 때 우리는 지상에 인간으로서 태어난 것을 감사하고 싶고 축복하고 싶어진다.


건강해서 일하는 기쁨은 행복에 없지 못할 요소이다. 남자는 사업에 살고 여자는 애정에 산다. 일은 우리에게 벗을 주고 건강을 주고 삶의 보람을 준다. 온 정열을 쏟을 수 있는 일을 인생에서 발견한 사람은 세상에 다시없는 행복자다.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하나의 굳건한 믿음이 필요하다. 종교의 신앙도 좋고 사상에 대한 신념도 좋다. 우리의 생을 의지할 든든한 기둥이 필요하다. 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인생의 긴 다리위에서 우리는 뜻하지 않는 폭풍을 만나는 수도 있고, 불의의 비극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인생을 살아간다. 어떤 이는 가난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어떤 이는 병의 십자가를 짊어진다. 생의 십자가를 굳건히 짊어지려면 마음의 단단한 준비가 필요하다.


나의 분(分)을 알고 나의 분을 지켜서 인생에 지나친 욕심을 갖지 않는 것이 슬기롭다. 지족(知足)은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의 하나다. 자기의 분에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행복과 담을 쌓는 사람이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오고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 행복을 원하거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기르고 배워야 한다.


사랑과 노동과 신앙(信仰), 인생의 참된 행복은 그런 데 있지 아니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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