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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종교의 공존
03/30/2011 08:03 댓글(0)   |  추천(3)

국어사전은 종교를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체계”라고 정의하고 있다. 종교에는 그 대상, 교리, 행사 등의 차이에 따라 애니미즘, 토테미즘, 물신 숭배 등의 초기적 신앙형태를 비롯하여 샤머니즘이나 다신교,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의 세계적 종교가 있다.


21세기에 들어 개별 국가는 다문화 되는 과정에 있고, 세계적으로는 이질적인 민족과 문화가 빈번하게 교류, 조우하면서 종교 간의 충돌과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 봉은사에 난입하여 우상숭배를 집어치우라고 소리치거나 단군 상을 파괴하는 기독교인의 행태가 비근한 예이다. 아침저녁의 러시아워에 콩나물시루 같은 전철 속을 비집으며 방자하고 몰염치하게 예수를 믿으라고 고함치다 승객들과 싸움이 붙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한편, 신문의 댓글마다 익명에 숨어 기독교인을 ‘개독’이니, ‘광란자 집단’이니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도 종교의 공존 차원에서 참으로 우려스런 일이다.


국제적으로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의 종교와 문명이 충돌하면서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테러방지를 위해 엄청난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 9.11 테러로 인해 서구의 기독교 국가들과 이슬람 국가들 간의 대립은 더욱 첨예화되었다. 미국 내에서도 종교의 자유와는 상관없이 9.11 테러의 그라운드제로 인근에 이슬람 사원을 짓는 문제와 관련하여 국론이 크게 분열되었다. 미국과 이란의 대립, 미국의 이락, 리비아와의 전쟁 뒤에는 종교 간의 대립과 충돌이라는 배경도 숨어있다 하겠다.


종교 간의 갈등을 예견했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여러 종교들과의 올바른 관계정립이야말로 인류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중요한 숙제라고 일찍이 역설한 바 있다. 또한 비교종교학자 스미스 역시 인류 상호간에 이해하고 신뢰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종교 간의 상호 이해와 대화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종교 간 갈등의 원인


인류의 역사를 회고해 보면 다양한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했던 시대가 많았다. 예를 들어 유교, 불교, 도교가 유불선(儒佛仙)이라는 삼교일치 사상이 중국과 우리나라에 이어져 왔다. 고대 로마제국 시대에는 다양한 종교들이 다투어 수입되고 권장되었다.


종교 간의 본격적인  갈등은 서구 열강의 기독교가 아시아와 이슬람권의 종교와 만남으로서 비롯되었다. 기독교는 한 분이신 유일신과 그 신의 하나뿐인 독생자 예수를 믿음으로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배타적인 종교이다. 따라서 기독교 입장에서 볼 때 예수를 믿지 않는 타 종교들은 본질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서구의 종교(Region)에 대한 개념에서는 역동적인 개인의 신앙을 마치 관찰할 수 있는 현상처럼, 비인격적인 외적 사물로 간주하였다. 이것을 종교 개념의 주지주의화(主知主義化), 혹은 물상화(物象化 ; reification)라 하는데, 이러한 물상화의 과정을 통해 종교에 대한 관점이 심각하게 왜곡되었다 한다. 즉 개인 내면의 경건성과 믿음은 간과하고, 단지 추상적인 교리와 행위체계의 관점만 강조했다. 본질인 신앙은 없어지고 형식적인 교리만을 내세워, 타 종교를 배척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종교의 의미와 목적’, 일프레드 캔트웰 스미스 : ‘The Meaning and End of Religion', Wilfred Cantwell Smith)


이러한 서구의 기독교에 관한 종교관은 17~18세기 동안의 종교전쟁, 계몽주의적 세계관, 역사주의적 사고방식이 상호작용하면서 다듬어진 결과이다. 즉  논쟁(polemics)과 변증론(辨證論; apologetics)의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결과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는 배타적인 구원관뿐만 아니라 물상화에 따른 인위적인 교리의 배타성으로 인해 타 종교와의 타협이 어려운 것이다.


종교 간의 공존 방안


스미스는 종교 간의 갈들을 없애고 공존하기 위해서는 서구 기독교의 특정한 문화와 역사적 맥락에서 출현, 유지되어 온 종교의 개념을 바꿀 필요가 있다 하였다. 즉, 종교에 대해 암암리에 당연지사로 여긴 전제를 다시 묻고, 자명하여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관점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종교에 대한 개념의 대안으로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제시하였다.


1) 축적적 전통(蓄積的 傳統; Cumulative Tradition) : 세속적인 측면에서 종교의 개념을 논

    할  때 교리뿐만 아니라 건물, 제도, 경전, 사원생활, 관련 관습과 법률, 사회제도, 도덕적

    규범, 신화 등 해당 사회의 문화적, 역사적 총체(總體)를 종교로 간주하자는 것이다.


2) 신앙(Faith) : 종교의 초월적인 측면으로서 신앙이란 초월적 존재에 대한 개인 인격체의

    내적 체험과 역동적 반응을 뜻한다. 종교란 이러한 개인의 내면적 경건함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축적적 전통이 강조될 때 종교는 넓은 의미로 규정되어 누구나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화와 역사적인 전통을 인정할 수 있다. 또한 개개인의 내면적인 신앙이 강조된다면 종교 간의 믿음의 일반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의 가능성


1) 복수의 진리


근대 철학자들은 가장 확실한 진리는 유일하고 절대적이라 주장해 왔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진리는 복수형 진리로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예전에는 진리는 당연히 유일한 것이므로 오직 자신의 종교만이 진리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만약 진리가 단수형이 아니라 복수형이라면, 여러 종교들이 다양한 진리들에 대한 가르침을 나누어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힌두교의 논리학, 불교의 심리철학, 기독교의 종교철학, 이슬람의 신비철학, 유교의 윤리학에서 각 종교는 배울 수 있다 하겠다.


2) 구원의 문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종교 간 공존의 주장은 타 종교에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이 핵심이다. 과연 기독교식의 독특한 구원체험은 무엇이며, 그것이 타 종교인들에도 가능할 수 있는 것인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구원이 모든 종교를 통해 가능한가? 불교인이 득도와 더불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기독교인도 천국과 열반에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제는 세계종교에 나타난 ‘구원’의 개념을 분류하고 분석하여 그 결과를 두고 종교지도자들은 책임 있는 교리적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


맺는 말


21세기 세계화, 국제화 시대를 맞아 문화와 종교 간 공존의 문제가 인류 최대의 과제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특히 서구 중심의 종교에 대한 개념과 교리, 그리고 배타적인 구원관에 따라 종교 간의 갈등은 오히려 증폭되고 있다.


비교종교학자 스미스는 종교의 개념을 특정 집단의 사회문화 전통 등을 포함하여 총합적, 축적적으로 규정하여 상호 인정하고, 종교의 교리보다는 내면적 신앙의 경건성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키에르케고어는 종교는 개인의 실존적 체험과 경험에 불과하다고 한 바 있다. 또한 함석헌 선생 역시 교회와 목사가 기독교가 아니며, 예수와 나와의 직접적인 관계와 믿음이 종교의 본질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예수 당시에는 있지도 않았을 인위적인 교리와 경전에 억매여 타 종교를 배척하는 행동을 지양해야 할 것이다.


또한 보편적 진리에 이르는 특수 진리가 유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상호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한라산을 서귀포에서 오르던, 제주에서 오르던 결국에는 백록담의 최정상에 닿을 수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왜 굳이 남에게 나의 생각을 강요하고, 그것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 무력이라도 불사하는가? 

 

 

             Wilfred Cantwell Sm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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