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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03/24/2011 06:03 댓글(5)   |  추천(3)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는 짧은 생을 드라마틱하게 살면서 2,000여점의 작품을 남기고, 20세기의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미친 위대한 화가이다. 음악에서 베토벤에 필적하는 화가로서 수많은 봉우리를 제치고 정상에 우뚝 솟아 있다.


그의 그림이 위대한 것과는 반대로 그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몹시도 처절하고 불행한 인생을 살았다. 동생 테오가 주는 돈으로 겨우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물감을 샀으며, 청혼했던 모든 여자들에게서 퇴짜를 맞았다. 그의 그림은 살아생전에 인정을 받지 못하고 팔리지도 않았다. 또한 그는 성격이 괴팍하여 사교적이지 못하고 흉금을 털어 놀만한 동료나 친구가 없었으므로 엄청난 고독에 몸부림쳐야 했다. 그는 결국 조울증에 의한 정신질환으로 37세의 젊은 나이에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인상주의(印象主義; Impressionism)


고흐가 화가로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인상주의(印象主義; Impressionism)가 풍미했던 시기였다. 인상주의란 그림이란 단순히 대상과 자연을 사실적으로 모방(mimesis)해서는 안 되고, 빛과 색채의 변화에 따른 주관적인 인상을 적절히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상주의 화가들은 해의 위치와 햇빛의 강도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색채를 화면에 담기위해 어두운 작업실에서 나와 야외로 나갔다. 예를 들어 모네는 아침, 저녁으로 햇빛에 따라 색깔이 변하는 루앙 성당의 모습을 연작으로 그렸다.


대상으로부터 순간적으로 받는 인상을 그리기 위해서는 짧은 순간에 그려야하므로 그림의 완성미는 떨어진다. 빛과 색채에 따른 인상을 강조하다 보니 그림에 생각과 이야기를 담을 수 없었다. 순간적인 영상이 있을 뿐이었다. 인상주의 화가에는 마네, 모네, 피사로, 드가, 시슬리, 르느와르 등이 있다.


후기인상주의(後期印象主義; Post-impressionism)


이러한 인상주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움직임이 고흐, 고갱, 세잔으로 대표되는 후기인상주의(後期印象主義; Post-impressionism)이다. 그들은 그림에 감정과 정신을 담고자 했다. 고흐는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대상을 일본의 판화에서처럼 단순화시키고 색깔을 임의대로 칠했다. 뚜렷한 선과 화려한 색채를 사용하는 일본의 우끼요에(Ukiyo-e; 浮世繪) 판화처럼 그림자를 없애고, 가는 선으로 테두리를 치고, 이례적 원근법을 사용하였다. 또한 그림 전체의 효과를 위해 보색적(補色的) 대비를 강조하여 하늘을 초록색으로, 구름을 분홍색으로, 그리고 길을 청색으로 칠하기도 했다. 고흐의 이러한 방식은 훗날 순수색채를 추구한 마티스의 야수주의(Fauvism)와 감정표현을 추구한 뭉크의 표현주의(Expressionism)로 이어지게 되었다.


아를의 예술가 방(The artist's room in Arles, 1889)


고흐는 눈부신 색채에 대한 열망으로 찾아간 프랑스 남부의 아를에서 자신의 하숙방을 몇 차례 그렸다. 그중 다음의 그림에 대해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나의 하숙방을 그렸다. 그림에서 적절한 색깔을 나름대로 칠하고, 모든 대상을 단순화시켜 오로지 수면과 휴식의 아늑함만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벽은 보라색, 바닥의 타일은 붉은 색, 침대와 의자의 골격은 버터와 오렌지 색, 시트와 베개는 밝은 레몬 색, 창문은 녹색 등으로 칠했다..... 이 그림은 그림자를 없애고 일본의 판화에서처럼 대상을 단순화시킨 것인데 너도 이 점은 잘 이해할 것이다.”


극도의 궁핍 속에서 아주 지저분했을 고흐의 방은 이와 같은 단순화와 색깔의 선택으로 실로 따듯한 안식의 장소로 느껴지게 한다.

 

 

 

고흐의 불행과 비극


고흐는 외모가 험상 굳고 성격이 괴팍하여 제대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이후 구필(Goupil) 화랑에서 일하고 노동자들을 위해 설교자로 활동할 때도 해고와 실직을 밥 먹듯 했다. 훗날 고흐의 처절한 고독과 절망, 그리고 정신병의 원인이 되었던 여인들과의 실연은 모든 이들의 비애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그는 일찍이 구필화랑의 주인집 딸 로이어(Loyer)에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26세 때에 이종사촌 누이인 8살 연상의 과부에게 청혼했으나 역시 “절대, 절대, 안돼(No, never, never!)"라는 매몰찬 대답을 들었을 뿐이었다. 누이의 아버지가 더 이상 딸을 괴롭히지 말라고 하자, 고흐는 촛불에 손을 대면서 ”제 손이 이 뜨거움을 견딜 동안만이라도 만날 수 있게 해달라“라고 했다 한다. 다음 해 고흐는 알코올 중독자 매춘부였던 씨엔(Sien)을 만나 좋아했으나 이번에는 부모의 반대로 헤어지게 되었다. 이후 고흐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성적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동생 테오가 보내주는 하숙비를 아껴 싸구려 창녀들을 상대했다 한다.

 

 


 

'시엔'에 대한 스케치. 고흐가 시엔을 만났을 때 이 여인은 남편에게 버림받고 다섯살 딸아이와 함께 또 다른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낮에는 청소부로 밤에는 창녀로 일하는 그녀, 시엔은 힘든 세파에 찌들려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보였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고흐는 연민과 함께 사랑을 느끼게 되고 동거에 들어가게 된다. 그녀에게서 옮은 성병으로 고흐가 병원에 입원 한 사이 시엔은 아들을 출산하게 되고, 고흐는 진정으로 기뻐하며 테오에게 그 기쁨을 편지로 쓸 정도였다.


"햇빛이 환히 비치는 창가에 누워 있는 그녀를 보자 아주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남자들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아이가 누워 있는 요람 옆에 앉아 있을 때 깊고 강렬한 감동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불행한 시엔과 고독한 고흐와의 만남은 가족들의 격렬한 반대와 궁핍한 생활로 결국 헤어지게 되고 그 후 시엔은 물에 뛰어들어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고흐의 또 다른 비극은 역시 후기인상주의 화가였던 고갱과의 만남과 헤어짐이다. 고흐는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고갱을 수차례 설득하여 아를에 오게 하여 함께 작업하며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주관이 뚜렷했던 두 사람은 예술을 가지고 심각하게 다투었다. 어느 날 고흐가 면도칼을 가지고 고갱과 거칠게 싸우다 흥분상태에서 창녀촌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자신의 귀를 짜르고 단골 창녀였던 라첼(Rachel)에게 잘 보관하라고 주었다 한다. 고갱은 아를을 영원히 떠나고, 이후 고흐의 정신병은 더욱 심각해졌다.

 


권총자살


1890년 정신병이 더욱 악화되면서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없게 되자 그는 더욱 좌절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칠월의 어느 날 들판으로 나가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쏘았다. 집에까지 돌아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동생 테오에게 한 말은 “슬픔은 영원히 계속된다(the sadness will last forever)"였다 한다.


그가 죽던 해 마지막으로 그린 “까마귀 나는 밀밭”의 그림에는 황금색 밀밭이 바람에 몹시도 출렁거리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무섭게 시퍼런 하늘에 불길한 까마귀가 줄지어 날고 있다. 그의 고독과 슬픔, 그리고 예감되는 죽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그림이다.

 

 

 


그의 그림 중 1990년 경매에서 일본인에게 팔렸던 “가세 박사의 초상”은 사상 최고가격인 8,250만 불이었다. 20년이 지난 일이니 지금은 두 배 이상이 될 것이다. 고독과 슬픔과 정신병으로 살다가 최고의 경매가격만을 남기고 그는 떠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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