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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이야기
12/05/2017 15:12 댓글(0)   |  추천(8)


少年兵 / 목성균

 

아내가 열심히 신문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 자 명단에 자기 오라버니 이름이 들어있나 싶어서다. 아내는 자기 오라버니가 이북에 살아있겠지 하는 일루의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6. 25 사변이 나던 그 해 그의 오라버니는 인민군으로 끌려갔다. 쇠꼴을 해 가지고 동네 들어서는 열일곱 살짜리 소년을 인민군이 붙들고 장총을 메워보더니 총대가 땅에 끌리지 않자 됐다며 끌고 갔다고 한다.

 

그 해 늦가을, 전세는 이미 국군이 평양까지 밀고 올라갔느니, 압록강까지 갔느니 하는데 산골짜기의 가을은 늘 그렇듯이 청명하고 싸느랗게 그 해 여름의 비극 따위는 도외시한 채 깊어가고 있었다. 해거름에 나는 할머니와 뒷골 밭에서 무를 뽑고 있었다. 하늘이 살얼음처럼 새파랬다. 단풍이 불타는 산골짜기가 가을 깊이 잠겨서 죽은 듯 고요했다. 무밭에 산그늘이 지자 싸느란 냉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할머니는 부지런히 무를 뽑고 나는 무더기를 지어서 가마니로 무 더미를 덮었다. 된서리에 대한 대비였다.


한참 무를 뽑는데 그늘진 산에서 조심스럽게 가랑잎 밟는 소리가 나더니 산짐승처럼 인민군 패잔병이 나타났다. 인민군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피더니 할머니와 내가 무를 뽑는 밭으로 내려왔다. 장총이 땅에 끌릴 듯 했다. 인민군은 키만 덜렁했지 기껏해야 나보다 두서너 살 위로보이는 소년이었다. 인민군의 누런 무명 하복(夏服)은 찢어지고 때에 절어있었다. 헝겊 군화도 헤어져서 발에 안 걸리는 듯 새끼로 동여맸다.

 

인민군은 아무 말 없이 조선무를 옷에 썩썩 닦아서 허기진 듯 어적어적 씹어 먹었다. 얼굴은 패각(貝殼)이 기어 다닌 갯벌처럼 어지러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중에는 분명히 눈물자국도 섞여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가는 것이다. 할머니가 어쩔 줄을 몰라 하시며 일손을 멈추고 밭둑으로 나가 앉아서 이리 와서 앉아 먹어요.” 하고 인민군을 불렀다. 인민군은 할머니를 따라 밭둑으로 나와서 할머니 곁에 나란히 앉았다.

 

무 한 개를 다 먹은 인민군은 밭둑에서 일어섰다. 할머니가 얼른 머리에 쓰고 계시던 무명수건을 벗어서 인민군의 볼을 싸 매주셨다. 인민군은 거절하지 않고 할머니가 해주는 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밖에서는 사시사철을 쓰고 사시는 할머니의 살갗 같은 당목수건이었다. 소년병은 땀에 절어 퀴퀴한 할머니의 냄새가 날 게 분명한 당목수건을 말없이 받아드렸다. 이미 뼛골까지 파고드는 산 속의 추위를 격은 때문일까, 당목수건에 밴 냄새가 고향의 부모님 냄새처럼 그리워서일까.


인민군 소년병은 다랑논 건너 맞은편 산등성이를 쳐다보았다. 할머니도 쳐다보고 나도 쳐다보았다. 잎이 거의 진 나무들이 서있는 산등성이가 까마득하게 높아 보였다. 인민군 소년병이 그 산등성이를 향해서 올라갔다. 인민군이 올라간 산발치에 옻나무가 떨구다만 새빨간 이파리를 달고 서 있었는데 그 눈부신 빛깔이 공연히 슬퍼서 맘속으로 -!’ 하고 부르는데 할머니가 나를 끌어 안으셨다. 할머니도 내 맘 같으셨던 모양이다.

 

지금도 늦가을 외진 산골짜기에 서있는 빨갛게 단풍 든 나무를 보면 장총을 땅에 끌면서 저문 산으로 올라가던, 위장 망 끈이 얼기설기 붙어 있는 남루한 여름 군복을 입은 소년병의 작은 등허리가 보인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당목수건으로 볼을 싸맨 얼굴로 우리를 뒤돌아보던 산짐승 같이 크고 순한 눈매가 보인다. 새빨간 옻나무 단풍 이파리가 보인다.

 

그 인민군 소년병이 과연 식구들에게 돌아갔는지, 어디서 얼어 죽었는지, 토벌대의 총에 맞아죽었는지 그 해 가을이 다 가고 겨울이 깊어질수록 내 걱정도 같이 깊어갔다. 그날 밤 어머니는 김장할 무채를 썰고 할머니는 물레를 돌리셨다. 밤이 꽤 깊었는데 할머니가 한 숨을 쉬면서 걱정스럽게 말씀하셨다.

코끝이 매운걸 보니 된내기(된서리)가 내리나 보다.”

 

나는 그 해 여름 새재를 넘어서, 낙동강을 건너서 대구 아래 경산까지 아버지를 따라 피난을 다녀왔다. 별을 보면서 한 데 잠을 많이 잤다. 내 나이 열세 살이었다. 길게 날아가던 별똥별을 세다가 밤이슬을 맞으며 잤다. 여름이지만 밤이슬에 몸이 젖으면 추웠다. 된서리를 맞으면 얼마나 더 추울까. 그 날 밤 나는 단 구들 위에 요를 깔고 이불을 덮고 누어서 너무 따뜻한 나머지 오뉴월 소불알처럼 행복하게 늘어져서 인민군 소년병을 생각했다.

 

가끔 늦가을 논둑 밑에서 얼어 죽는 메뚜기를 본다. 그 때마다 소년 병 생각에 참을 수 없는 마음이 되곤 했다. 아침에 보면 빳빳이 죽었는데 햇살이 퍼지면 메뚜기는 꼼지락거리며 살아났다. 그렇게 메뚜기는 겨울이 깊어지는 만큼씩 서서히 죽어간다. 나는 그 게 신기해서 메뚜기의 죽음을 관찰한 적이 있는데, 밤에 따뜻한 이불 속에만 들어가면 그렇게 얼어 죽어 가는 소년병이 생각나서 잠을 이루지 못하곤 했다. 나의 소년시절은 그 인민군 소년 병 못지않게 고통스러웠다.

 

나는 할머니가 당목수건으로 볼때기를 싸매 준 그 인민군 소년병이 아내의 오라버니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차마 아내한테는 그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다.

 

 

 

산딸기 / 정재은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날씨가 갑자기 무더워졌다. 아들아이가 하학하는 길에 산딸기를 한 도시락 사 가지고 돌아왔다. 버스에서 내리니 전선주 밑 뜨거운 햇빛아래, 때 묻은 수건을 머리에 얹은 시골 할머니가 새빨간 산딸기를 한 양푼 앞에 놓고 앉았는데, 소문난 명화를 보는 것처럼 강렬한 인상을 주더란다. 삼 남매가 엉키어 떠들썩 먹으며 나의 입에도 한 알씩 넣어 준다. 떫은 듯 새콤달콤 맛 짙은 딸기알이 입 속에서 오독오독 깨물어진다. 그 시고 달고 쌉쌀한 딸기알을 깨물며 나의 기억은 선명하게도 나의 미각을 유혹해 오던 산딸기를 찾아 산자락을 누비던 어린 시절을 더듬고 있었다.


6.25가 났을 때 우리 가족은 충주 읍내에서 산 하나를 넘는 난영이란 마을로 피난을 갔었다. 종범이네라는 선량한 농가의 뜰아랫방에 우리는 피난짐을 풀었다. 10여 호쯤의 촌락인데 주민과 피난민이 반반 섞이어 여름 난리를 치르게 되었다. 종범이네와 우리는 한 식구처럼 한솥밥을 먹었다.


하루걸러 한 번쯤 점심때가 너웃해지면 나는 다래끼를 어깨에 걸고 산비탈에 걸린 목화밭으로 배추를 솎으러 갔었다. 목화밭 이랑 사이에 심은 배추를 솎아 놓고는 뱀을 좇듯 작대기 끝으로 풀섶을 이리 헤척 저리 뒤척이며 멍석딸기를 찾았다. 좀 후미진 곳에서 산딸기가 여남은 포기나 담송담송 모여 난 곳을 찾게 되었다. 검지 손가락 끝마디만큼씩 한 검붉은 산딸기가 소담하게 열려 있었다. 산딸기 맛에 김칫거리 장만은 짜증스럽지 않은 심부름이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나 말고도 이 산딸기를 따 먹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땐 희므르레 덜 익은 딸기만 남겨진 때도 있었다. 그럴 땐 배암딸기나 멍석딸기를 찾으며 서운한 마음을 달래곤 했다. 어느 날 배추를 다듬어 다래끼에 담아 놓고 숲을 헤치며 올라가니 누가 먼저 와서 딸기나무 위에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꼈던지 허리를 펴며 후딱 뒤돌아보았다. 십사오 세쯤, 꼭 내 또래의 머스매였다. 희멀건 얼굴에 눈과 입이 작은 머스매는 유순한 표정에 좀 무안한 빛을 띠고 나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범인이 바로 너였구나 싶어,

"니가 맨날 딸기 다 따갔구나?"

하고 대담하게 다가서며 싸움 걸듯 쏘아붙였다.

"산에 나는 딸기에두 임자가 있냐?"

머스매는 똑 따온 듯한 서울 말씨를 썼다.

 

그러지 않아도 흰 반바지 흰 러닝에 검은 허리띠를 맨 깔끔한 차림새며 계집애보다도 하얀 살결이 서울내기란 딱지처럼 눈에 두드러졌다. 등갱이 넘어 촌락으로 피난 온 애일 거라고 짐작이 갔다. 나는 풀이 죽어,

"내가 먼저 맡아 놨거덩."

머스매는 비죽이 웃으며,

", 산이나 들에 나는 건 누구나 먹는 게 임자야."

나는 흰 운동화를 꺾어 신은 머스매의 희고 통통한 종아리와 뒤꿈치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종아리에 꺼먹 고무신을 신은 내 다리가 창피해서 오히려 오기가 치밀 지경이었다.


딸기밭에서 곧잘 그 머스매와 마주치곤 했다. 이름이 성준인데 그냥 준이라고 부른단다. 다 같은 열네 살인데 나는 국민학교 육학년이었고 준이는 중학교 일학년이었다. 준이는 처음 인상처럼 무척 순한 아이였다. 시골뜨기라는 자격지심에 말끝마다 톡톡 쏘아붙이는 데도 준이는 늘 부드러운 억양을 썼다. 내 말투도 어느덧 많이 눅어지며 준과 나는 서먹서먹하면서도 싫지 않은 친구가 되어갔다. 어머니를 졸라서 허리에 고무줄 넣은 소창치마, 소창반소매 속에 나는 꼭 조끼가 단단한 속치마를 받쳐 입고 배추를 뽑으러 갔다. 젖몽오리가 목화 다래알만큼 여물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때는 내가 먼저 목화밭에 나가 있었고 어떤 땐 준이 먼저 딸기밭에 나와 있었다. 준이는 나를 도와 배추도 뽑고 풋고추도 땄다. <성불사의 밤>을 가르쳐 주어 함께 부르기도 했다. 피난 왔다는 사실은 깜빡 잊고 여름 방학에 외가에라도 간 듯 곤충채집한다고 하늘소, 딱정벌레를 잡기도 했다. 마을 앞 논 귀역지에 있는 삼밭에는 풍뎅이가 많았다. 풍뎅이 큰 다리를 한 마디씩 끊어 넙적한 바위 위에 재껴놓고 손바닥으로 주위를 탁탁 치며,

"풍뎅아, 풍뎅아, 앞마당 쓸어라, 뒷마당 쓸어라."

하면 풍뎅이는 쪽 펼친 짙은 청록색의 날개를 번쩍이며 앵앵 세차게 맴돌았다.


어느 날이었다.

"저기 좋은 데 있다. 이리 와 보아."

준이는 나를 데리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갔다. 절벽처럼 선 바위 밑에 50센티쯤이나 굴처럼 패어져 있었다. 그 앞에 산골 물이 자갈 섞인 모래바닥을 투명하게 빛내며 시리도록 말갛게 흐르고 있었다. 인동덩굴, 다래덩굴이 나뭇가지에 얽히어 터널 속처럼 짙은 그늘을 서늘하게 드리워주고, 그늘을 벗어난 물가에 산나리, 패랭이, 범부채 꽃들이 눈부시게 피어 있었다.

 

", 여기서 세수해, 발두 담가 봐라. 무척 시원해."

물속에서 더욱 희고 통통해 뵈는 준이 발에서 조금 떨어져 머뭇거리며 새까만 나의 발을 들이밀고는 손으로 발등을 자꾸 부비었다. 준이얼굴은 햇빛에 그을면 빨개졌다가 다시 희어지는데 시골아이라 그런지 나의 살은 검붉게 익었다가 그대로 까맣게 타 버리는 것이 야속했다. 그런데도

", 네 눈, 나하고 바꿨음 좋겠다."

하며 황소눈깔이라고 놀림 받는 터무니없이 크기만 한 내 눈을 칭찬해 주었다. 준이는 몸을 뒤로 젖힌 채 발장단치며 노래를 부르고 나는 발가락으로 물속의 자갈을 빼글빼글 굴리고 있을 때였다.

 

준이가 별안가 나를 왈칵 잡아다녔다. 내가 미처 놀랄 새도 없이 귀를 짜개듯 날카로운 제트기의 금속성이 내 고막을 때려왔다. 난영에서 1킬로미터가 좀 못되게 흘러내린 계곡을 가로막으며 충주읍에서 안동, 김천으로 빠지는 대로가 걸려 있었다. 인민군이나 말들이 지나가기 때문에 이따금 '쌕쌕이'의 공습을 받곤 했었다.

 

준이와 나는 고꾸라지듯 패여진 바위 밑으로 뛰어 들어갔다. 쌕쌕이의 기총 소사는 꼭 우리들 머리 위에서 쏘아대는 듯 들려졌다. 얼핏 눈을 드니 건너 산마루 위로 원을 그리듯 비행기가 부웅 떠오르다가 곤두박질로 내리꽂히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큰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준과 나는 서로 부등켜 잡고 공포에 떨고 있었다. 공습이 멎고 비행기가 돌아간 것을 확인하자 우리는 꿈에서 깨이듯 감았던 팔을 풀며 부스스 일어나 나왔다. 안도의 숨을 쉬던 준의 얼굴이 먼저 빨개졌다. 나도 얼굴이 화끈 달았다. 뽕긋한 젖가슴이 파닥파닥 뛰고 있었다.


어머니께 꾸중을 들으면서도 나는 배추 뽑으러 가지 않았다. 사흘이 지났을 때 나는 박우물가에 앉아 감자를 벗기고 있었다. 나직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준이가 내 옆을 지나가며 <성불사의 밤>을 부르고 있었다. 준이가 우리 동리에 온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보리쌀 닦는 아주머니들 때문인지 준이는 데면데면한 얼굴로 느릿느릿 가버리고 말았다.

 

다음날 점심때쯤 개울가에 앉아 빨래를 빨고 있었다. 뒷등에 누군가의 눈길이 닿는 듯이 느껴졌다. 준이가 그 희멀건 얼굴로 시침 뚝 떼고 서 있었다. 얼른 머리를 숙이고 빨래만 부비었다. 내 옆의 빨랫돌위에 흰 운동화를 꺾어 신은 준의 두 발이 성큼 올라섰다.

", 내일 딸기밭에 안 나오면 죽어, 내가 따져둘 게 있단 말이야."

준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치 거칠고 단호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준이는 성큼성큼 돌다리를 건너더니 엉덩이에 힘을 주어 멋을 부리며 스척스척 아카시아 숲길로 걸어 들어갔다.


다음 날 나는 배추 뽑으러 갔다. 준이는 산딸기를 한 종구리 따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죽인다고 해서 미안해."

준이는 멋쩍게 고개를 꼬았다. 넝쿨들이 터널 속처럼 그늘을 이룬 바위 밑에 올라가 놀다 보니 너무 늦어졌다. 준이가 겉장은 떨어졌지만 삽화가 예쁜 동화책을 갖고 나왔던 것이다. 준이는 목화밭 이랑을 누비며 배추를 뽑고 나는 창칼로 다듬어 다래끼에 담고 있었다.

 

배추를 다듬다가 무심히 고개를 들었다. 계곡 저쪽을 가로지르는 산등갱이 위에 마름모꼴로 편대 지은 쌕쌕이 네 대가 소리도 없이 쑤욱 올라왔다. 벌떡 일어서는데 그제야 귀를 째듯 폭음이 울려왔다. 숨을 곳을 찾을 겨를도 없었다. 준이와 나는 퉁기듯 풀섶에 박힌 커다란 바위 밑으로 굴러들었다. 그날의 폭격은 유독 자심한 것 같았다. 폭탄도 몇 갠가 떨어뜨려졌다. 폭음이 유달리 가깝게 들렸다. 폭격소리가 멎고 한참이 지나도록 준과 나는 두 귀를 막은 채 꿈쩍도 못하고 엎드려 있었다.

 

얼마 만에야 나는 손을 내리며 일어섰다. 큰길 쪽에 보랏빛 포연이 자욱하게 하늘을 덮고 있었다. 넘어가는 해를 정면으로 마주한 위치여서 우리는 땀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세수를 하려고 가늘게 흐르는 도랑물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 너 딸기 깔구 앉아 있었구나."

뒤에서 준이가 소리질렀다. 무망결에 일어나 치마 뒷자락을 당겨 올렸다.

손바닥 크기만큼 딸기 즙이 매어 있었다.

", 속치마. 속치마 좀 봐,"

속치마 뒷자락에는 손바닥 넓이보다 더 넓게 딸기물이 새빨갛게 매어 있었다.

 

나는 치마를 탁 놓으며 치마 뒷자락을 준이가 못 보도록 돌아섰다. 병풍처럼 바위를 배경으로 서 있는 준과 저절로 마주선 자세가 되었다. 준이 얼굴도 새빨개 있었다. 정작 빨개진 것인지 저녁 햇살, 황혼빛을 받아 빨갛게 보이는 것인지 검은 바위에서 붉게 피어난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부신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는 손을 뒤로 돌려 치맛자락을 흡싸며 비슬비슬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초조(初潮)였다.


들일 하시던 이웃 할아버지 윗입술에 파편이 박히어 동네가 어수선했다. 어머니는 경황없이

"피난 온 게 아니라 난리 마중을 왔구나."

다음날 새벽 우리 가족은 피난 짐을 다시 챙겨 이고, 지고 더 깊은 산골로 찾아 마을을 떠났다. 성도 주소도 모른 채 준에겐 온다간다 말도 못 건네고 가족들 뒤를 따라 나도 고개를 넘었다.


결혼하여 서울서 살며 거리에서 혹 얼굴이 희멀건 내 연배의 남자와 엇비끼게 되면 문득 뒤돌아볼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준과의 해후를 원치 않는다. 준이가 <어린 왕자>에 나오는 숫자를 좋아하거나 지배하기를 좋아하는 어른처럼 변해 버렸다면 패랭이꽃처럼 풋되고 눈부신 나의 영상이 깨어지는 아픔을 견디기 어렵겠기에...... 가을 풀처럼 시들은 내 모습을 보이기가 두려웁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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