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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無等山)
12/24/2016 10:12 댓글(0)   |  추천(63)

주상절리로 유명한 무등산 입석대


 

 나는 아버지의 유별난 교육열 덕분에 두곳의 국민학교를 다녔다.


 고향에 있는 학교에 입학해서 3학년을 마쳤으니 이게 생애 처음 문턱을 밟았던 학교이고,

4학년 새학기가 시작되기 전 광주에 있는 서석국민학교로 전학을 해서 졸업했으니

입학과 졸업이 다른 두군데의 학교를 다닌 것이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부터 시작한 서울 생활은 학창시절을 보내고 군대를 다녀오고,

직장생활과 결혼을 한 후 미국으로 이민올 때 까지 계속되었다.


 앞으로 내가 몇살까지 살런지는 모르겠지만 내 수명을 80으로 가정했을때,

인생의 1/4 가량은 서울에서 보낸 셈이고 3년이란 짧은 기간을 생활했던 광주는

촌놈이 단계를 거치며 도시에 적응하는 시간이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 싶다.


 넓은 들판과 낮은 민둥산, 따뜻한 인정과 순박함이 넘치던 고향을 떠나 

번화하고 바빠보이는 도시의 생활은 어린 마음에도 무언가 부족하고 갇혀있는듯 한

느낌이 들어 일요일이면 친구들과 칡을 캐러 나즈막한 조선대학교 뒷산을 찾았고,

산길에 익숙해지면서 무등산을 찾아 열매를 따먹고, 날씨가 더운 일요일엔 봄, 가을 소풍때

학생들로 북적거리던 증심사를 끼고 흐르는 계곡에서 벌거숭이 몸뚱이로 멱을 감고

가재를 잡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 당시 무등산 밑자락엔 "무등보육원"이라는 고아원이 있었고(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무등보육원에서 가까운 곳엔 일명 "배고픈 다리"로 불리던 작은 다리가 있었다.

(다리의 중간 부분이 푹 꺼져있어 흡사 배고플때의 형상과 비슷하다 하여 배고픈 다리라 불렀음)


 무등보육원에서 생활하던 원생들 중엔 같은 반에서 공부하며 뛰놀던 친구가 몇명 있었는데

들 중에서 유난히 잊혀지지 않는 한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5학년때 같은 반이었고 1학기때 짝꿍이었던 친구의 이름은 기억에서 사라진지 오래되었지만

빡빡 깎은 머리와 자그마한 체구, 몸에 맞지 않는 헐렁한 옷차림과 하얗던 얼굴은 50년의 세월이 

흘러버린 지금에도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그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금 생각하니 창백했던 얼굴을 하얗게 착각한 것도 같다)


 눈이 슬퍼 보였고 그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것 같던 친구였는데, 운동장에서도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길을 걸을 때도 늘 땅을 내려다보며 걷던 친구였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 땐 도시락을 가져오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학교에서 타원형으로 구운

두툼한 수수 빵을 지급하곤 했는데, 그땐 군것질 할게 별로 없던 시절이어서 빵을 먹는 아이들이

엄청 부러웠고, 우린 빵을 받은 친구들을 꼬드겨서 도시락과 바꿔 먹기도 했다.


 눈이 슬퍼보였던 친구는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탓에 옥수수 빵을 1순위로 지급받곤 했는데,

어떤 날은 빵을 반만 먹고 나머지 절반은 잘려진 부분이 부숴지지 않도록 엄지손가락으로

꼭꼭 눌러 머니 속에 넣어 가져가곤 했다.


 나는 그 친구가 방과 후 보육원에 가서 간식으로 먹기위해 빵을 남겨서 가져가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이유를 물어보니 자기가 간식으로 먹기 위해 가져가는게 아니라 같은 보육원에 있는 

중학생 형들이 트집을 잡아 때리기 때문에 절반의 빵을 가져가서 형들에게 주면 아프지 않게 때리고

빵을 건네지 않는 아이들에 비해 맞는 횟수가 적거나 단체기합에서 빼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풍족하지 못한 식사를 하는 친구가 절반의 빵을 주머니에 넣고 먼길을 걸어 무등산 밑자락의

보육원으로 가는 동안 주머니 속에 있는 빵을 만져보며 얼마나 먹고싶어했을까?


 "배고픈 다리"를 건널때 쯤이면 절반의 빵을 먹은 친구의 배는 공복상태가 되었을텐데,

빵이 풍기는 달콤한 냄새의 유혹을 어찌 견뎠을까? 


 배고픔 보다 중학생 형들이 휘두르는 주먹이 더 무서웠던 것일까? 


 절반의 빵만 먹은 친구에게 도시락을 같이 먹자고 했지만, 고집을 부리며 먹지 않던

친구의 슬픈 표정이 한 해가 저무는 12월이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곤 한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에 다니던 작은 형님, 작은 누나와 함께 방한칸을 얻어 자취를 하고 있었으니

내 도시락 반찬도 달랑 김치일 수 밖에..


 그것도 주말에 먼지를 휘날리며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버스를 타고 집에 가서 가져오거나

아버지께서 가져다 주곤 하셨는데, 힘들게 조달해 먹는 형편상 다양한 반찬을 기대할 있겠는가? 

반찬은 둘째치고 보리밥도 배불리 못먹던 가정이 수두룩하던 시절이었는데... 


이런 얘기를 하면 유신교주 박정희를 신봉하는 수구꼴통 꼰대들이 이렇게 배불리 밥을 먹고 사는게

누구 덕인 줄 아느냐고 주둥이에 개거품을 물 수도 있겠지만 그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근면하고 성실하셨던 우리 부모님이 피땀흘려 가난을 해결한 것이지 딸년보다 더 어린 여자들을 옆에끼고

색드립을 일삼던 독재자 박정희가 우리 가족의 끼니와 가난을 해결해 준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얘기다. 


 김치뿐인 도시락이지만 밥을 눌러서 담아주는 작은 누나 덕분에 친구와 나는

절반의 옥수수빵을 눠먹고, 도시락을 나눠먹으며 5학년 1학기를 함께 보냈고

여름방학이 끝난 2학기엔 짝꿍이 바뀌고, 6학년이 되면서 서로의 반이 달라 화장실이나 운동장에서

얼굴을 마주치곤 했지만 졸업한 이후 지금까지 얼굴은 커녕 생사조차 모른 채 살아오고 있다.


 당시 서석국민학교는 학생수가 어찌나 많았던지 1,2,3학년은 서석동 본교에서 오전 오후로 나눠

2부제 수업을 했고, 학생 수를 분산시키기 위해 4학년은 지산동 분교에서 2부제 수업을했으며,

5, 6학년 때는 중학교 입시준비를 하느라 늦은 시간까지 본교에서 수업를 했다.


 4학년 때 우리 형제는 전남여고에서 가까운 동명동 2구 동사무소 맞은편에 방을 얻어 생활했는데,  

자취방에서 지산동 분교로 등교를 하다보면 무지하게 높은 담벼락으로 둘러쌓인 교도소가 있다.


 우린 그 교도소를 "동명동 교도소"라 불렀으며, 교도소 옆엔 굉장히 넓은 채소밭이 있었고,

채소밭에는 푸른 수의를 입은 죄수들이 인분(人糞)이 가득담긴 통을 리어카(손수레)에 싣고와

바가지로 퍼서 밭에 뿌리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죄수들은 감시하는 간수의 눈을 피해 밭 옆으로 난 길을 따라 학교에 가는 우리에게 돈을 쥐어주며

담배 한갑사서 집에 갈 때 던져놓으라고 채소밭 모퉁이 한곳을 지정해주던 기억도 새롭기만 하다.


 우린 그렇게 무등산을 바라보며 학교를 다녔고, 무등산의 품에서 칡을 캐고 야생열매를 따먹으며, 

무등산이 만드는 계곡에서 더운 여름을 보냈고, '무등산'이 들어간 교가를 부르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내가 다녔던 서석국민학교의 교가에도 어김없이 '무등산'이란 세글자가 들어있지만,

아마도 광주에 있는 모든 학교의 교가엔 무등산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무등산(無等山)

1.187미터 높이로 전라남도 광산군과 화순군 사이에 있는 산이다.

산은 웅장하고 높지만 정상 부근의 입석대를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경사가 완만하고 흙으로 이루어진

토산(土山)이어서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고 아늑한 느낌이 드는 그런 산이다.


 누군가는 비할데 없이 높은 산, 또는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어서 무등산( 無等山)이라 부른다 하고, 

어떤 이는 이성계가 이씨 왕조를 세우기 전 전국의 높은 명산을 찾아 순례하며 기도를 올릴 적에

기도를 하는 산마다 왕이 되는 현몽을 해주는데 오직 '무등산'에서만 꿈을 꾸지 못해 이에 실망한

이성계가 "이 산은 명산이 아니다" 하여, 등수가 없는 無等山이라 이름을 지었다는 설도 전해져 온다.


 남도인(南道人)들에게 무등산은 명산(名山)이라기 보단 영산(靈山)의 개념이 더 강할것이다.

반역을 꿈꾸는 이성계의 기도를 묵살하고 대꾸를 안해줬으니 이처럼 영험한 산이 어디에 있을것이며,

노령산맥 줄기와 평야 지대가 연결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광주를 비롯한 인근의 중소도시를

품고 아우르는 어머니와도 같은 산이 무등산이니 어찌 영산(靈山)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느 해인가 서석국민학교와 무등산을 가볼려고 작정을 하고 한국을 방문했건만,

가고 싶었던 학교와 무등산은 근처에도 못가보고 친구들 손에 이끌려 이집 저집 찾아간 술집에서

술잔에 빠져 허우적거리결국엔 술에 푸~욱 절은 몸이 되어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적도 있다. 


 내가 갖고 있는 무등산의 추억이라 해봐야 칡캐고, 열매 따먹고, 계곡에서 멱감으며 놀았던 3년에

불과하지만, 난 지금도 작은 다리를 건널때면 '배고픈 다리'가 생각나고, 노르스름하고 두툼하게 구워진

빵을 보면  슬픔이 가득했던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Gilroy의 넓은 채소 재배지를 지나칠 때면 동명동 교도소 옆의 넓다란 채소밭과

담배가 고팟던 죄수들을 떠올리며 무등산의 추억을 곱씹어 보기도 한다.


(광주에 살고있는 친구가 눈내린 무등산을 오르며 폰으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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