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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겨울
12/01/2016 10:12 댓글(0)   |  추천(67)


백열전등이 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의 골목. "신문이요!" 를 외치는 소년은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뜀박질을 하고, 두부상자 몇판 올려놓은 지게를 짊어진 두부장수 아저씨는 얇은 면장갑을 낀 손으로 딸랑!  딸랑!  종소리를 내며 좁은 골목길을 누비고 있다.

 

조카녀석의 고사리같은 차가운 손은 늦잠자는 장발(長髮)의 내 머리를 흔들며 빨리 일어나 학교가라고 깨운다.


버스정류장을 향해 종종걸음을 내딛는 눈덮힌 길엔 타다만 연탄재가 뒹굴고 있다. 미끄러운 언덕길에 연탄재를 깨트려 부삽으로 뿌리던 구멍가게 아줌마. 승객들을 안으로 밀어넣기 위해 난간의 손잡이에 매달려 몸부림치던 버스안내양.

 

달랑 네개의 테이블이 놓여 있는 작은 가게안에 19공탄 연탄난로를 피워놓고, 혼자 서있기에도 버거운 좁은 주방에선 라면을 끓이고, 바깥 화덕위 검은 솥단지에서 만두와 찐빵을 쪄내던 학교앞 만두가게 아저씨와 아줌마. 등에 업은 아이에게 포대기를 덮어씌우고 발을 동동거리며 육교밑 리어카에서 군밤과 오징어를 구워팔던 젊은아줌마.


두세명의 늙은 꼰대들이 따뜻한 난로가를 차지하고 앉아 차한잔 사주며 던지는 음흉하고 찐한 농담에 장단을 맞추며 되받아치던 빨간 립스틱을 칠한 다방 아가씨. 그저 그렇게....  흐르는 물처럼 우리곁을 스쳐 지나간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둥그런 드럼통에 연탄을 넣은 테이블이 서너개 놓여있는 동대문 이스턴호텔 뒷골목 선술집. 몰려간 술집에서 김치찌개 하나 시켜놓고 막걸리 주전자를 비우던 그 시절의 겨울. 연탄불 위 거무튀튀하고 찌그러진 알루미늄 냄비속엔 벌건 김칫국물에 어우러진 살코기 몇점과 허연 비계가 바글바글 끓고, 한점 두점 셀 수 있는 왕건이를 건지기 위해 숟가락으로 냄비속을 휘저으며 낚시질을 한다.

 

여러개의 숫가락이 냄비속을 휘젓다 보면 국물속의 건더기는 순식간에 없어지고, 우린 마음씨 좋은 아줌마에게 "이모! 김치 쬐끔만 더 주세요" 아줌마가 가져온 김치를 냄비에 털어 넣고 맹물을 부으면 또 다른 김치찌개가 만들어지고, 나는 시답잖은 훈민정주(訓民正酒)를 씨부리며 술잔을 기울이는 친구놈들에게 이빨을 깐다.

 

"나랏 술이 막걸리라 이르매 중국 빼갈과 같지 아니 하야, 어리석은 백성이 마시고자 환장 하이셔도 안주를 몰라 손가락을 빨더라. 이에 짐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 훈민정주를 공표하나니...... "

 

몇차례 새로운 김치찌개를 만들어가며 막걸리를 들이붓다 보면 인정많은 아줌마는 불쌍한 중생들을 위해 잘게 썰은 돼지비계 몇점을 냄비에 넣어준다. 우린, 그렇게 서울의 구석진 풍경과 어우러지며, 시대의 아픔과 술고픔, 배고픔을 함께 하며 추운 겨울을 살아간다.

 

하릴없이 테이블 위의 성냥개비를 분지르고, 성냥꼬투리로 퀴즈놀이를 하며 계란반숙 내기를 했던 그 시절의 음악다방.담배연기 자욱한 학교앞 다방에서 담배를 꼬나물고 긴 머리를 도끼빗으로 빗질하며 시간을 죽이는 죽돌이가 되었고, 실내 한곳의 뮤직박스엔 어항속의 물고기 마냥 유리벽 안의 DJ가 레코드 판을 뽑아 턴 테이블에 올려놓고 되꽂으며 바쁜 손놀림을 한다.

 

이따금 걸려오는 전화에 마이크를 잡고 "아무개씨. 카운터에 전화받으세요" 팝송 월간지에 나온 기사를 자기 혼자만 알고있는 지식인양 이런저런 유머를 섞어가며 죽돌이와 죽순이를 상대로 썰(舌)을 풀기도 한다.

 

어둠이 짙게 깔린 도로변, 카바이트 등불을 밝혀놓은 포장마차는 집으로 가는 나를 유혹하고, 불빛아래 앉아있는 주인 아줌마는 삶에 지친 표정없는 얼굴로 나를 반긴다. 추위에 달라붙은 뱃속을 달래기 위해 따끈한 오뎅과 쏘주 반병을 주문하면 아줌마는 병를 통째로 내주며 반병만 마시고 반납하란다. 헐.. 마시다 보면 빈병이 될텐데...

 

따끈한 오뎅국물에 곁들여 홀짝거리다 보면 이내 차오르는 방광. "어따가 싸요?" 고개를 들어 턱끝으로 어두운 골목길을 가르키는 아줌마. 찬바람 부는 어두운 골목 안쪽에서 일을 볼라치면 어느 집의 대문여는 소리가 들려오고, 오는 물줄기를 황급히 끊으며 몇방울 묻힌 찝찝함과 상쾌하지 않은 느낌을 간직한 채 잽싼 걸음으로 포장마차를 향한다. 

 

늦은밤, 건성으로 책장을 넘기며 "별이빛나는 밤에"  "0시의 다이알"에 라디오 주파수를 맞춘다. "모두가 잠들은 고요한 이밤에 어이해 나홀로 잠못이루나 넘기는 책장엔 수많은 얼굴들..."


유행하던 가요와 팝송을 듣노라면 골목길 저편 끝에선 "메밀묵 사려~~ 찹살떠~억~" 사람에 따라 음정과 박자가 절묘하며 음색(音色) 또한 다양하다. 어떤이는 구성진 목소리로 "메~밀~ 무~우욱~  찹 ~ 싸알~ 떠~억~"

 

평범한 일상속에 한겨울을 지내다 보면 어느덧 계절은 바뀌고, 바뀌는 계절을 뒤따라 그 시절의 젊음 또한 소리없이 흘러간다. 이제 그 겨울의 일상(日常)은 갈 수 없고 되돌릴 수 없는 아련한 추억이 되고 말았지만, 그 추억은 나를 붙잡아 둔 채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시들어가는 나를 더욱 슬프게 할것이다.


이미지출처/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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