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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커네티컷 맨스필드 타운 스쿨버스 운전사가 조양에게
09/01/2019 06:09 댓글(0)   |  추천(23)

장준하 선생 아들 장호준씨가 조국 법무부장관후보자 딸에게 쓴 편지



조양에게,

내 소개를 먼저 해야 할 듯 하군요.

나는 미국 커네티컷 맨스필드 타운에서 스쿨버스 운전사로 살아가고 있는 장호준이라고 해요. 최근 조양의 아버지가 겪고 있는 일들에 대한 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오히려 조양이 당하고 있을 일에 더욱 화가 났고 많이 아팠답니다. 몇 번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그저 동네 아저씨가 해주는 이야기 정도로 들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보냅니다.


나는 어려서 동네 공터에서 야구를 했던 적이 있었어요. 신나게 놀던 중 방망이에 맞은 공이 공터를 벗어나 남의 집 담장 너머로 날아 들어갔고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아이들은 도망을 쳤지요. 하지만 대문을 박차고 달려 나온 집주인에게 결국 몇몇 아이들이 붙잡히고 말았답니다.


집주인은 “이놈 자식들! 다시 또 여기 와서 야구를 하면 그 때는 정말 혼날 줄 알아!”라고 호통을 치면서 아이들의 머리를 몇 대씩 쥐어박고 보내 주었어요. 하지만 나는 보내 주지 않았지요. 오히려 집주인은 내 등을 두드려주며 이렇게 말했어요. “넌 저 아이들처럼 놀면 안 돼, 너희 아버님이 어떤 분이신데, 네가 이렇게 놀면 되겠니?” 억울했었어요.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그냥 몇 대 쥐어박고 보내주면 될 것을 꼭 아버지 이름을 꺼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지요.


내게 아버지의 이름은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시치미였지요. 학교나 군대에서 요시찰 대상이 되어 압박을 받았던 것도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이었고요. 하지만 아버지의 이름은 오히려 내게 큰 혜택을 주었답니다. 신학교를 다니던 시절 성적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나를 가르쳐 주신 교수님이 아버지와 동문수학 하셨던 분이셨던 덕이었고, 해외 후원금을 받으며 암울했던 시절을 버텨내 수 있었던 것 역시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럼에도 아버지의 이름은 늘 내게 족쇄가 되어 부담과 고통을 감수하도록 했었답니다.


지금은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딸아이가 언젠가 내게 “아빠, 초등학교 때 내가 왜 학교 앞에서 불량식품을 못 사먹었는지 알아? 장준하 선생님의 손녀가 길거리에 그런 것을 사먹는다고 할까봐 안 사먹었던 거야”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 아무런 대답도 못한 채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 아버지의 이름이 내 아이에게까지 어떤 시치미가 되고 있는가 하는 것에 가슴이 아려왔기 때문이었답니다.


조양,

물론 그런 생각은 하지 않겠지만 마음 어느 한 구석에서는 “하필 내가 왜 조국의 딸이어서”라는 소리가 들리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래, 내 아버지가 조국이다.”라는 소리가 더 크게 외쳐지리라 믿어요.


물론 나는 조양에게 ‘괜찮아질 거예요. 힘내세요.’ 라든가 ‘참고 기다리면 다 지나갈 거예요’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지금 조양의 아버지에게 하이에나처럼 달려들고 있는 자들로 인해 조양이 겪고 있을 아픔의 시간들을 자랑스럽게 새겼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내 나이 환갑이 지났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나를 ‘장준하선생의 삼남’이라고 소개하고 이제는 내가 그렇게 소개 되는 것이 자랑스럽기 때문이지요.


조양,

어느 날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을 보게 되었던 것 처럼 조양 역시 어느 날 아버지를 닮은 자신을 보게 되겠지만 아마도 지금은 조양이 아버지를 안아 드려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군요. 만일 내가 조양의 아버지와 같은 처지에 놓인다면 딸아이가 나를 한 번 안아주는 것이 가장 큰 힘이 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딸, “그래 내가 조국의 딸이다.”를 더욱 크게 외치는 조양이 되리라 믿으며....


미국 커네티컷에서

장호준


출처: Hojun Chang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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